이드 2부 – 519화
955화
“으윽.”
갑자기 등장해 도움을 요청한 사내. 게일이 휘청거렸다. 때마침 다친 듯 늘어트리고 있던 팔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여기! 마법사!”
“자네 괜찮나?”
그 모습을 본 후방의 기사들이 허락을 받고는 다급히 달려들어 게일을 부축하며 부산을 떨었다.
돌 위에 서 있던 이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핵심 조연 등장이네.”
“역시 마탑 중계로 구경하고 있었나 봐요. 등장 시점이 완벽하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다. 마수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그 전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오 조 초인들로, 적색 기사단은 한발 물러서 대기 중인 상태였다. 아직 전투에 뛰어들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한창 전투 중이었다면 초인들과 분리시키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전에 게일이 나선 것일 테고.
“손발이 잘 맞는 연극이야. 그런데 배우 연기력은 좀 부실해 보이네.”
“항상 제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인데. 저런 패배자의 연기를 해 봤을 리가 없죠.”
그런 두 사람의 평대로 게일의 행동은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한창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없는 기사들은 그런 모습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신경을 쓰는 기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어색함을 이전에 게일이 벌였던 사고 때문이라 생각하고 넘겨 버리기도 했다. 황녀가 보는 앞에서 이드를 상대로 큰 사건을 만든 후 게일은 많은 기사들로부터 홀대를 받아 왔었으니 말이다.
그래서다.
기사들은 치료 중에도 다급히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게일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조에 속해 있던 게일이다. 적색 기사단과 이 조에 속한 기사들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 의심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며칠 동안 같이 술을 마시고 친분을 나눴던 기사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평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만 같은 오색 기사단 중 적색 기사단이 위험하다는 말에 기사들은 라발을 찾았다.
“단장님! 이건 당연히 도와야 합니다.”
“적색 기사단도 그렇지만, 이 조가 당하게 되면 엄청난 전력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소드 팰러스와 제국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기사들의 의견은 한 가지였다. 무조건 가서 도와야 한다는 것.
이득을 따지지도 않고, 복잡한 계산도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하게 뜨거운 가슴으로 외친 목소리다.
“모두 같은 생각이겠지?”
“반대하는 놈이 있다면 적색 기사단이 아니지요!”
반대하면 무쇠 주먹으로 정신 교육부터 실시하겠다는 듯 거친 고함 소리. 그 때문인지 반대의 목소리는 없다. 대신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과 의기 가득한 기사들의 모습만 있을 뿐.
라발은 그런 기사들을 보며 내심 기꺼웠다.
순수하게 동료 기사를 아끼고 구하려는 자세. 평소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암, 내 기사들이라면 그래야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모이엔과 존 워스의 짓에 분노가 일었다. 무조건 그들을 따르는 적색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실망스러웠다.
저기 주저앉아 치료받고 있는 게일도 마찬가지.
아니, 이드에게 비열한 수작질을 했던 것까지 더하면 끔찍할 지경이다. 이드의 정체를 몰랐으면 모르겠지만……………
절레절레.
라발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찾는 듯 동쪽 통로들 주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 상황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라발 단장님.
자신을 찾고 있다 확신한 이드가 전음을 보냈다.
석실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라발에게 자신의 위치와 함께 도착을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찌릿.
그리고 전음에 이어진 압박감이라고 할까? 압도적인 시선의 폭력과 같은 감각에 어깨를 움츠린 라발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기묘한 감각에 빠트린 것이 이드임을 알았다. 왜냐고? 덕분에 여태껏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던 이드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마치 자신과 이드 사이에 길게 카펫이 깔린 느낌이다.
-휴~ 이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분이 아주 기묘합니다. 마치 처음 검후님을 뵙고, 황제 폐하를 뵈었던 때의 느낌과도 닮았습니다.
-비슷합니다. 본질의 영격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이용한 거니까요. 쉽게 말하면 위압감이죠. 다만 그건 폭력적이니까 적당히 성질을 좀 바꿨죠. 우리가 폭력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본질이라니.
라발을 이드의 말을 되새기다 고개를 저었다. 위압감이 살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알지만 이런 기묘한 감각은 알지 못하는 그다.
새삼 자신이 아직도 무공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산더미처럼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라발은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다는 사실에 오히려 기뻐했다.
굳세게 버티며 흔들리지 않고 끝없이 정진하는 것이 그의 성정이었으니까. 이 점 때문에 검후가 라발을 가르치고 적색 기사단장으로 삼은 이유기도 하고.
하지만 당장은 색다른 수법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예측대로 게일 경이 움직였습니다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하죠. 저들이 바라는 대로 따라 주세요. 대신 기사들에게 혼란이 없도록 이동 중에 계획을 알려 주시고요.
-그럼 원래 계획대로 라미아 님께서 저희를 지원해 주시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함정과 기습을 대비한다고 해도 적의 전력은 강하다. 그리고 대비한다고 해서 함정과 기습을 모두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적색 기사단이 강력하긴 하지만, 적의 전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다름 아닌 적색 기사단과 동급에 있는 청색 기사단이 적이지 않은가. 거기에 같이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 기사들에 마탑까지. 비록 오 조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 전력이 빠지긴 하겠지만, 확실히 적색 기사단만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감이 있다.
라미아의 지원은 바로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라발로서는 든든하지 않을 수 없는 지원이다.
그때, 말이 없는 라발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기사들이 결정을 재촉해 왔다.
“단장님. 어서 결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조장의 허락은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적색 기사단의 이름값이 아무리 높아도 현재는 오 조에 소속된 일개 기사단일 뿐이니, 라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라발이 움직이기도 전에 발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 조가 위기에 빠져 있다고요.”
“게일 경이 그렇게 알려 왔습니다만. 조장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움직일 생각입니다.”
“제국의 기사들이 위험에 빠진 일입니다. 돕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원에 관한 모든 권한을 라발 단장님께 일임할 것이니.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혹시 있을지 모를 부상자를 위해 마법사와 치료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도 적색 기사단 아래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통 크게 내어 주는 발터의 결정이다.
특히 장기 작전에 있어서 부상자의 치유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능력자들까지 보내 준다는 것은 굉장한 배려였다.
발터의 말처럼 제국의 이름 아래 다 같은 기사지만, 사실 나와 내가 책임진 조직을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라발과 적색 기사단에 대한 발터 나름의 감사의 표현이었다.
자신의 요구로 인해 오 조에 소속된 후 앞으로 나서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빈틈을 메워 준 것에 대한 감사 말이다. 보통은 병사들이나 이름 없는 기사단이 할 일인데, 그걸 명성 높은 적색 기사단이 해 줬다. 그러니 고마운 마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발터의 마음을 라발도 잘 느끼고 있었다.
특히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답답함을 티 내지 않고 쌓고 있던 적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간의 불만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오히려 그 자리에 발터에 대한 호감이 차오르며 감사의 표현이 절로 튀어나왔다.
“오 조가 전투 중에 있음에도 동료를 돕겠다는 조장님의 결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저와 적색 기사단은 조장님의 명령에 따라 이 조의 위기를 돕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치료 능력을 가진 기사들을 대동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오조 역시 전투 중에 반드시 부상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살을 잘라 내는 것은 크나큰 오류입니다.”
라발이 단호하게 말했다.
특히 자신들이 빠지기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을 이 조와 마탑의 전력을 생각하면 치료 능력자는 오조에 더욱더 필요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치료 능력을 가진 기사들은 제외하고, 마법사들만 대동하도록 하시죠. 그건 괜찮겠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정도면 적당하다. 오 조의 특성상 몇 포함되지 않은 마법사들까지 거부할 수는 없다. 그들까지 남겨 두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오조와 이 조 양쪽 모두가 말이다.
지원이 결정되자 적색 기사단이 순식간에 이동을 시작했다. 어차피 전투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고,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적색 기사단의 선두에 게일이 섰다. 이 조가 있는 곳까지의 안내를 위해서다.
“크르렁!”
그 모습에 초인과 싸우던 몬스터들이 적색 기사단을 막으려는 듯 달려들었고,
“놈들을 막아! 적색 기사단이 나갈 때까지 절대 뚫리면 안 된다!”
초인들은 그 앞을 막아섰다.
당연히 지원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연출이다.
“그럼 전 라발 단장님을 따라가 볼게요.”
푸드득 하고 이드의 머리에서 날아오른 라미아가 말했다.
“그래.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라발 단장님이 신호를 하기 전까지는 되도록 나서지 말고. 알았지?”
“흥, 제가 무슨 어린앤 줄 알아요? 이드나 실수하지 말고 잘해요.”
샐쭉하니 이드를 째려본 라미아가 휙하고 적색 기사단이 들어선 통로로 날아가 사라졌다.
작기도 하지만 여전히 투명화 마법이 힘을 발휘하고 있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혼자네.”
적색 기사단이 모두 빠지자 다시 진형을 정비하는 한편, 여전히 전투에 한창인 석실을 바라보며 몸을 풀었다. 적색 기사단이 빠졌으니, 이제 연극은 끝나고 본격적으로 오 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드도 그 모든 것을 막아 줄 생각은 없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다.
애초 목적도 오 조의 보호가 아니라 세 세력의 분열이다. 이 전투는 세 세력이 똑같이 피해를 입고서 똑같이 살아 돌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철저하게 분노와 불신만 남기는 것.
그것이 목적이다.
그런 이드의 기다림을 알았기 때문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걸 ‘변화’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퍼퍼퍼퍽!
“죽어!”
서거걱!
“공격이다.”
“뒤에 적이 있다!”
방심하고 있던 뒤쪽 통로에서 검은 투구를 뒤집어쓴 적들이 몰려나와 초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