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24화
960화
달리던 차에 기름이 떨어져 차가 멈추고, 총이 부서진 병사가 두 손을 드는 것처럼.
마법진의 효과는 강렬했다.
“크흐흐, 죽어, 죽어! 죽・・・・・・ 커억!”
“어? 어? 뱀브 블레인? 잘 나오던 불이 왜 안 나……”
트롤 같은 재생력으로 날뛰던 초인은 사지가 찢기고, 손끝에서 불은 뿜던 초인은 잠잠해진 손끝을 확인하다 목이 떨어졌다.
잘 싸우다 초인기를 봉인당한 초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고, 복면의 기사들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좋군. 예상보다 더 효과가 좋아. 자네 감상은 다르겠지만.”
초인기를 봉인하는 마법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그도 처음이었다. 단숨에 무력화되는 초인들에 존 워스는 만족한 듯 발터를 보며 웃었다.
“뭐야, 이거! 왜 저렇게 힘을 못 쓰는 건데?”
마법진이 가동되는 순간 그래도 초인기를 가졌다고 약간의 갑갑함을 느끼던 이드는 수십 초인의 목이 단숨에 떨어지는 모습에 놀라 일어났다. 세 세력이 치고받아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초인들이 몽땅 힘을 잃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드도 더 볼 것 없이 당장 나서야 하니까.
하지만 아직 이드가 고생할 때는 아닌 것 같았다.
교묘히 앞을 막아선 존 워스를 씨근덕거리며 노려보던 발터가 크게 소리쳤기 때문이다.
“칸! 와이드블렌이다. 대 와이드블렌 매뉴얼대로 대응해!”
다행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을 예상한 대응 방법을 미리 준비해 뒀다는 것일까.
충격적인 상황에 굳어 있던 칸이 정신이 든 듯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 와이드블렌 경보! 단장님들께선 움직여 주십시오!”
“초인기가 봉인된 조원은 진형의 중앙으로 이동하라!”
“죽기 싫으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이동해!”
“움직여라, 이놈들아! 내가 목숨 걸고 지켜 줄 테니 영광으로 알아라!”
두 강자의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한데 모여 방어 진형을 짜고 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힘을 잃은 초인은 진 내부로 옮기고, 마법에 대응이 가능해 초인기를 봉인당하지 않은 단장급 초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나마 초인기 봉인 마법이 단장급 초인의 강력한 초인기까지 완벽하게 봉인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간단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법이었다.
짧은 살육이 멈추자 존 워스가 석벽 위에 있는 마법사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마법 하나 완벽하게 만들지 못하다니. 실로 변변찮은 마법사 놈들이 아닌가. 덕분에 자네들은 한숨 돌리는군. 그래 봤자 끝은 정해졌지만.”
“그러는 철벽의 검왕께선 저 완벽하지도 못한, 빌어먹을 마법을 너무 믿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게 보이나. 그나저나 와이드블렌이라니. 이름은 잘 지었군. 마탑에서 붙인 이름보다 센스가 있어.”
와이드블렌은 초인 발생 초기 시절.
가장 활발히 초인들을 사냥, 연구에 열을 올리던 마법사의 이름이다. 그가 사냥한 초인이 만이 넘고, 그의 연구실에는 백 개가 넘는 초인 표본이 든 유리병이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악명이 높은 이유는 초인이 각성하면 관련성을 연구하기 위해 그 가족들도 같이 연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초인들에게 그는 악마보다 더한 마왕으로 불렸다.
초인기 봉인 마법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도 같은 이유다. 와이드블렌이 알려지고, 더욱 완벽해질 경우 초인은 모든 힘과 권력을 잃고, 옛날 박해받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초인들에겐 악마를 소환하는 마법보다 더 위험한 마법.
그래서 마법에 초인들의 마왕 와이드블렌의 이름을 붙였다.
“위험한 마법이긴 하지만 저 마법으로 우리를 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저 마법사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말이야.”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석실에 들어선 후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기만 하고 있는 발터가 긴장하는 순간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페더 폴.”
안전한 석실 위에 있던 마법사 절반이 석실 아래로 내려왔다. 그에 따라 통로에 대기 중이던 인공 초인 시술을 받은 용병과 노예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목표는 와이드블렌 대응 진형을 유지 중인 오 조의 초인들. 존 워스와 발터가 있는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발터는 존 워스의 몫이라는 듯.
그들이 접근하자 복면 기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났다.
“지금입니다! 간격을 좁히고, 가드를 강화하십시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칸의 발 빠른 명령에 진형의 방어력이 올라갔다. 동시에 신중히 상황을 살폈다.
이쪽이 정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쉼 없이 몰아치더니 어째서 갑자기 공격을 멈춘 것인가. 복면들의 공격에 마법사들이 더해지면 이쪽도 무너지는 것은 금방인데.
그건 마법사도 마찬가지인 듯 석실로 내려와 전력을 이끌고 있던 마법사가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따졌다.
“지금 이게 무슨 뜻입니까?”
“뜻은 무슨 뜻? 아무런 뜻도 없소.”
“그럼 어째서 공격을 멈추느냔 말입니다.”
“그거야 당신들이 내려왔으니, 지금부터는 당신들이 처리할 문제이기 때문이잖소. 초인의 확보, 사냥? 아니, 수확이라고 했던가? 적을 베어 죽이는 것이라면 몰라도, 우리가 그런 사소한 일까지 당신들을 대신해서 해 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니오?”
“지금 상황에 그런 말장난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구렁이 담 넘어가는 기사의 발언에 마법사는 기가 막혀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렇다고 기사의 말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 한 사람의 발언이 아니라, 모든 기사들이 한발 뒤로 물러서지 않았나.
“당신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사냥감들이 도망갈 거요.”
“이익. 지금 그걸 말이라고.”
발끈하려던 마법사는 번들거리는 살기를 뿜어내는 초인들의 모습에 다급히 석벽 위에 있는 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위 마법사의 지시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때 해당 마법사는 이미 존 워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서로 협조하기로 했던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아니, 틀린 건 없소. 협조하기로 한 일 중에 귀탑의 재료 확보를 도와야 한다는 내용은 없으니까. 우리들은 그런 하찮은 일을 위해 온 것이 아니오.”
“명심하는 게 좋소. 우린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온 것이오. 무엇보다 이 정도로 사냥감의 힘을 빼 줬으면 우리로서는 할 일을 충분히 다 한 게 아니겠소? 거기에 제일 위험한 맹수도 여전히 내가 붙잡고 있고, 불만이라면 귀탑과의 협력은 여기서 끝내도 아쉬울 것은 없소?” 원한다면 당장 손 떼고 물러나겠다는 존 워스의 제스처에 마법사, 마탑의 장로 두베이스는 뿌득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더 보고 있다가는 존 워스의 얼굴에 파이어볼을 처박을 것 같아서다.
두베이스는 풀지 못한 분노를 칸과 초인들에게 풀기로 했다.
“본 대로, 빌어먹게 협조적인 분 덕분에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재료 확보는 우리 손으로 한다. 어차피 힘도 봉해진 놈들이다. 확보해!”
감정이 담긴 명령에 대답을 기다리던 마법사는 우물쭈물하다 움직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적당히 서로의 이해를 조정한 후에 기사들과 함께하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일이지만, 저 미친 검왕이 장로의 자존심을 건드려 놔서 그러기도 틀린 일.
“인공 초인들을 앞에 세우고 재료 확보를 시작한다!”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는 측면에서 용병들과 노예들을 앞에 세우는 것뿐이었다.
그와 다른 마법사들은 그들의 뒤를 받치며 신중히 초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비록 마법진에 의해 초인기가 봉인되었지만, 그래도 모든 초인이 무력화된 것도 아니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고.
방심했다가 쉽게 당하는 것보다는 신중한 것이 좋다.
“이거 일이 좀 묘하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이드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여간 음흉한 인간들이네.”
이드는 마탑의 마법사와 존 워스, 그리고 발터, 그리고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초인들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라미아가 와이드블렌에 대응할 방법을 만들어 줬는데도. 그걸 감추고 있다는 거잖아,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불쌍한 놈은 아무래도 마탑으로 정해진 것 같다.
다른 것도 아니고, 초인기를 봉인당하는 큰일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비책이 고작 거북이 등껍질에 숨는 것이 다일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쪽에는 마탑의 마법사들 이상으로 초인 마법에 연구한 라미아가 있다. 당연히 그녀와 마법사, 그리고 초인들이 협력해 임시방편으로 내놓은 대비책이 있다.
아무리 적색 기사단의 협조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오 조가 초인 중심으로 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해당 사실은 수뇌부와 오 조의 단장급 조원들에게만 알려졌다.
혹시나 마탑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비책을 만들지 못했다면 몰라도, 대비책이 나온 이상 마탑에서 와이드블렌 마법으로 공격해 들어온다면 치명적인 역공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당연하게도 모이엔 등 이 조의 수뇌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연히 존 워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탑의 행동으로 보아 모이엔이나 존 워스는 이런 사실을 마탑에 전혀 알리지 않은 것 같지 않은가.
“그뿐 아니라 등을 떠밀듯 저 존 워스는 연기까지 했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가 그렇게 연기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
오조를 공격하는 시점에 정체를 감추는 것도 귀찮아했다는 인물이 굳이 연기까지 한 이유.
“역공을 당하면 피해 보는 것은 마탑. 거기에 기사들은 이미 한발 물러선 상태니까. 하하. 지독하군. 결국 소드 팰러스 혼자만 꿀 빨겠다는 속셈이네.”
이드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 상황.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이미 오 조가 단숨에 당할까 걱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기사들이 빠진 이상, 비수를 감추고 있는 것은 이제 오 조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마법사와 인공 초인들일 것이다. 오로지 그들만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이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조와 인공 초인들이 충돌했다. 그 뒤에서는 마법사들이 준비한 마법을 쏟아냈다.
그냥 봐서는 오조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하지만 오 조의 단단한 수비는 무너지지 않았다. 숨기고 있는 대비책도 내놓지 않았다.
가드를 단단히 하면서 그 안에 철저히 약자처럼 숨었다.
그에 마법사들이 큰 마법을 준비하며 긴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칸이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다! 저 혐오스러운 마법사 놈들을 갈가리 찢어 버립시다!”
“와이드블렌 해지 마법. 대천사 라미아의 은혜, 시동!”
“시동합니다~!”
화아악~
오 조의 중앙에서 은은한 빛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