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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38화


974화

어린아이를 인솔하는 선생님처럼 초인들을 유도하는 라미아. 그 앞을 발터가 막아섰다.

“잠시 멈춰 주십시오. 후작 부인. 적에 대해 꼭 전해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자라는 건 알겠네요.”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라미아에 발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존 워스 후작 부인께서 대단하다 말씀하신 저자가 바로 철벽의 검왕입니다.”

번뜩이는 안광에 내리깐 목소리. 본인은 심각할지 몰라도 듣는 라미아의 입장에선 뻔히 아는 사실을 다시 인지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

가면 없이 인간의 몸을 하고 있었으면 표정 관리가 어려울 뻔했다. 이번만은 골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생각한 라미아가 잠깐 말을

끊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군요. 삼검왕의 한 분이 이곳에서 마법사들과 손잡고 오 조를 공격했다는 말, 누구도 쉽게 믿어 줄 수 없는 말이네요. “

“하지만 진실입니다. 저기 쓰러진 놈들도 이 조와 청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입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존 워스라는 사실을 명예 후작께 알려야 합니다. 적은 삼검왕. 명예 후작께서 전력을 다해야 할 강자입니다.”

발터가 라미아를 재촉했다.

그는 이드와 라미아 덕에 위험한 순간은 넘겼지만, 아직 위기 자체를 벗어났다고 보지는 않았다.

이드나 라미아가 조금이라도 밀리게 되면 다시 위급해지는 상황이었다. 당장 존 워스가 있고, 마법사 놈들이 살아 있으니까.

무엇보다 더 나타나는 조원들이 없는 것을 보면 추가 전력도 없는 것 같고, 그로서는 최대한 이드가 존 워스를 잘 상대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가요.”

그렇게 조급한 발터와 달리 라미아는 내심 껄껄 웃고 있었다. 삼검왕 따위에 전력을 다하라니.

‘이드가 정말 작정하면 삼검왕이 아니라 이 던전이 날아간다는 걸 말해줄까 말까’

라미아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으며 느릿하게 움직이는 초인들을 재촉했다.

“후작 부인! 당장 알려야 합니다!”

그 모습에 속이 타는 발터다. 생각 같아서는 석실 가운데서 존 워스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는 이드를 향해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 발터의 손목을 라미아가 잡아끌었다.

“자, 이리 오세요. 이드에 대한 걱정일랑 집어넣으시고. 조장님의 말씀은 이미 이드에게 전달되었으니까요.”

“……언제 말입니까?”

말을 전하는 어떠한 행동도 본 적이 없었기에 발터의 말에 의심의 기색이 어렸다. 라미아가 눈꼬리를 반달로 휘며 말했다.

“저와 이드는 마음이 이어져 있거든요. 무엇보다 적의 정체를 알건 모르건, 싸워야 할 적인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잖아요.” 

“그건・・”

발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조장님에게 가장 급한 건 우선 치료를 받으시는 일이에요. 존 워스는 이드가 잘 상대하겠지만, 적은 그 말고도 남아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다시 재촉하는 라미아에 발터는 미련이 남는 눈으로 존 워스를 돌아본 후 걸음을 옮겼다.

‘부디 명예 후작에게 죽지 않길 바라겠소. 그래야 이번 일을 갚아 줄 수 있을 테니까.’

적의 함정에 당하고, 조원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존 워스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것이 분하고 또 분한 발터였다.

존 워스와 일대일로 제대로 붙는다면 그때는 지금과 다를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하는 발터다.

“그전에 우선 제가 드렸던 대천사 라미아의 은혜부터 다시 발동시켜 볼까요. 가지고 계신 분은 손!”

그런 발터의 옆에서 라미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구사일생.

이드의 검이 자신을 갈랐을 때, 그대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해더웨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탑주의 목소리에 주변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부관주의 꼴이 말이 아니군.”

“죄, 죄송합니다.’

해더웨이는 길게 변명하지 않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탑주는 변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해더웨이의 모습에 혀를 찬 탑주는 회색 뇌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탑주의 손에서 막대한 초인력이 부어지자 뇌에 붙어 있던 살덩이가 빠르게 증식하더니, 곧 회색 뇌를 둘러싸 보호했다.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 그 꼴사나운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하지.”

“급한 상황이라 하시면?”

해더웨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순간에도 그는 검은 공간을 열어 보유하고 있던 초인의 뇌를 꺼내 자신과 연결하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살찐 애벌레가 뇌를 파먹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탑주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사방으로 얽힌 마법진의 한쪽을 가리켰는데, 그곳에선 시퍼런 불꽃이 튀며 마법진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보이느냐?”

“누군가 마법진을 파괴하고 있군요. 마나 소멸 현상으로 보아 마법사는 아닌 듯합니다.”

마법사라면 파괴가 아닌, 해체나 역설계를 통한 붕괴와 오염을 우선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단순 무식하게 힘으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옳다. 침입자가 방어 마법을 부수고 강제로 침입하는 중이다. 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침입자가 명예 후작이 말하던 웨어 울프의 형상이란 사실이다. 또한 생명의 관에 침입했던 자라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당장 사로잡아 그 뇌에 든 정보를 끄집어내야 했다.

한데 그런 상황에 탑주가 자신을 불렀다. 거기에 탑주가 조종하면 간단할 방어 마법이 파괴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제가 상대할 자입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부관주가 멀쩡했다면.”

“면목 없습니다.”

“됐다.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 적은 내가 상대한다. 그러니 부관주는 바이트 타블렛을 책임져라. 적은 이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오고 있다. 바이트 타블렛을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랜달 부관주에게 상대하도록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 끊어진 것인지 끊은 것인지 모르지만.”

“…..”

“아무튼, 시간이 많지 않다. 부관주는 즉시 바이트 타블렛을 지맥에서 분리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라.”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부관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초인들의 뇌를 흡수하고서 겨우 재생한 머리통에서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그리곤 바이트 타블렛과 연결된 마법진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탑주는 그 모습을 보다 곧 바닥을 찍고 사라졌다.

감히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자신의 마탑을 침범한 웨어 울프가 어떤 놈인지 알아볼 참이다.


그런 지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이드는 존 워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정체를 감추고 싶은지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썼는데, 투기가 줄줄 흘렀다. 초인들을 도살하며 피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싸울 것에 대한 기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절대 얌전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것.

‘뭐, 그래 주면 나야 편하지.’

검후에 반기를 든 삼검왕은 어차피 처리해야 할 대상이다.

사실 존 워스가 나타난 순간 그를 이곳에서 처리해 버릴 생각을 하던 이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해더웨이를 날치기당한 상황에 존 워스까지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라미아를 통해 발터의 말이 전해진 것은 그때였다.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는군? 댁의 정체가 철벽의 검왕 존 워스라는 발터 조장의 주장에 불과하지만.” 

“금시초문이오. 난 암살 기사일 뿐이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분명했다. 존 워스가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것. 무슨 국어 책 읽는 듯한 대답이다.

거기에 질문을 더 받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드가 뭐라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존 워스의 검에서 검강이 찬란히 솟아올랐다. 이드를 상대로 간 보지 않고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미였다. 

“뭐, 정체는 그 투구를 벗겨 보면 알 일이겠지.”

“벗길 수 있다면 벗겨 보시든가.”

말이 끝나는 순간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신형이 길게 늘어지며 중앙에서 부딪혔다.

쩡!

세상에서 가장 큰 종이 울린 것같이 엄청난 소리였다. 직후 부딪힌 두 검을 중심으로 일어난 충격파에 바닥과 천장이 움푹 파이고, 사방으로 날카로운 충격파가 날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드는 난화십이식과 수라삼검을 연이어 쏟아 냈다. 그에 존 워스는 단단하고 유연한 힘으로 모든 공격을 받아 냈다.

플레서블.

존 워스가 가진 최강의 검법. 그에게 ‘철벽’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최고의 기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플렉서블은 마냥 방어에 치중한 검법만도

아니었다.

그래서는 검왕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적의 공격을 막은 후 그 힘을 더해 반격한다. 그것이 플렉서블의 요체였다. 그러나 이드를 상대로는 아직 반격다운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존 워스였다.

그에 반해 이드는 존 워스의 검법에 대해 파악을 끝내고 있었다.

‘이런 독문 무공을 쓰면서 존 워스가 아니라니, 눈 가리고 아웅도 정도가 있지. 그나저나 이 검법, 무당의 태극검을 닮았다.’

물론 온전히 같지는 않다. 그 안에 든 핵심 무리 또한 다르다. 그러나 방어적인 부분, 그리고 적의 힘을 당기고, 흘리고, 역이용하는 부분에서는 태극검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이드가 전한 무리가 대단하고, 난화십삼검의 일부를 얻었을 거라 짐작하더라도 기초 공부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이 대륙에서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불리는 무당의 태극검에 비견될 만한 검법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말이다.

거기에 단단한 껍질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수법은 분명 이드가 수련생들을 상대로 가르쳤던 것들. 이전에 이드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시도하다 실패한 기술을, 어느새 자신의 검법에 완벽히 녹여낸 것이다.

과연 삼검왕의 명성이 아깝지 않은 천재성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한계는 분명하다.

태극검이 태극혜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플렉서블로는 아무리 해도 난화십삼검을 이길 수 없다.

물론 검법 역시 검처럼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긴 하지만.

무려 상대가 이드다.

삼검왕의 천재성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드에 비할 수는 없는 일.

오분.

이드가 존 워스의 무력과 플렉서블이라는 검법에 대해 온전히 파악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이게 전력이라면 더 볼 것이 없겠지만.’

이드는 존 워스를 살폈다.

흐트러진 호흡, 악문 이빨, 한계를 넘어 부들부들 경련하는 어깨.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오 분이 아니라 다섯 시간을 싸워도 멀쩡할 사람이 검왕인데 말이다.

아마 지금 이 상황을 제일 믿지 못하는 것은 존 워스 본인일 것이다.

최고라 자신하던 사람이 모든 면에서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은 그런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러니 꺼내 보라고,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들’

이드가 아는 존 워스는 수상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다중 초인기로 의심되는, 섞여 있는 초인력이 느껴진 점이 그랬다. 게다가 이전에는 금빛으로 변했던 눈동자와 함께 변하던 기질까지.

딸깍딸깍.

이드는 파악이 끝난 존 워스의 실력보다 두 단계 더 기어를 올렸다. 그에 따라 존 워스의 속도도 따라 올랐고, 한계를 넘어선 속도는

플렉서블이라는 단단한 철벽에 엉성한 구멍을 만들었다.

“투구를 벗기기 위해 우선 그 철벽 철거 공사부터 시작해 보지.”

콰르르르-

마치 붉은 폭포 같았다.

수라참마인의 강사가 하나로 모여 한 점으로 떨어져 내렸고,

쩌적.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철벽에 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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