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2화
988화
바닥을 내려치는 지팡이. 점점 강해지는 빛.
그리고 금방이라도 폭주하려는 정신을 가다듬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
“……시간. 공간. 물질. 태초에 섞이지 않은 혼돈. 그 시원으로 복귀할 때임을 선언한다. 공간 분쇄.”
주문과 시동어는 자신에게 하는 맹세이며, 세상에 대한 설득이다.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좋지만, 탑주의 목소리는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반쯤 녹아 버린 중심핵은 주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닌 덕분일까.
중심핵이 쩍 갈라지더니, 연기가 피어오르듯 유형화된 마나가 솟아올랐다.
화르륵.
아무 전조 없이 갑작스레 일어난 불꽃에 공간이 타들기 시작했다. 마치 무형검처럼 나타나 공격해 오는 화염이다. 하지만 불이 타오르는 것보다 분뢰가 더 빨랐다.
푸푸푸풍!
블링크를 떠올리는 빠른 회피. 그와 동시에 이드의 주먹이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메르시오를 두드렸다.
탑주가 물러나고 베리타스의 촉수도 반의반으로 줄어 버렸지만, 오히려 지금이 싸우기 편하다.
아군 전력이 빠져서 더 편하다니. 트롤링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옛말에도 있다. 똑똑한 적보다 멍청한 아군이 더 무섭다고.
‘거기에 저 똥개도 힘이 좀 빠졌고.’
당장 몸만 쓰던 놈이 화염 공격의 비중을 늘린 것만 봐도 확실하다.
몸을 쓰는 것보다 불을 이용하는 게 더 마나 소비가 적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으니 알 게 뭔가. 일단 보이는 대로 살피고, 대응할 뿐이지.
‘그나저나 탑주는 계속 빠져 있어 주면 좋겠는데. 그렇게는 안 되겠지?’
묵직한 손맛을 보고 있던 이드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된 것이 트롤은 잘 죽지도 않는다.
그런 이드의 예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있었다. 나가떨어진 충격에 겨우 정신을 차린 탑주가 비장의 한 수를 꺼내는 중이었으니까. 트롤 짓까지는 아니지만, 이드의 지금 전투 흐름을 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부숴 버릴 만한 수 말이다.
쿠우우~
그 시작은 베리타스의 울림이었다.
이드는 그 울림이 꼭 자신에 대한 작별 인사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절대 착각일 것이다. 지옥의 마물인 베리타스가 인간에게 정을 느낄 턱이 있나.
그게 아니라도 여기 나타난 것은 베리타스의 본체도 아니고, 그 힘과 본능만을 강림시킨 놈에 불과하다. 인격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싶은 순간, 그나마 남아서 메르시오를 칭칭 감아 이드의 공격을 돕던 촉수들이 모조리 외곽으로 이동해서 철창처럼 늘어섰다. 그리고 이드와 메르시오의 탈출을 막던 공간 결계가 그 촉수에 걸리며 공간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엔 그저 유리에 금이 간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런 단순한 수준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그 복잡한 균열 뒤에 비치는 아득하게 검은 어둠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심상치 않은 현상에 힐끗 돌아본 이드.
아니나 다를까, 환하게 빛나는 지팡이를 들고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탑주를 볼 수 있었다.
“……이거, 탑주부터 처리할 걸 그랬나?”
“커헝! 저 병신 같은 마법사 놈이 또!”
메르시오 역시 같은 생각인 모양,
하지만 말과 달리 정말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놈은 이드를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탑주를 노렸다.
이드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들었으니까.
하지만 잠깐 눈이 돌아갔었어도, 이미 정신을 차린 탑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두퉁!
메르시오의 공격이 닿으려는 순간. 탑주의 몸이 결계 속으로 파고들었다. 결국 메르시오는 변형된 결계에 공격이 반사되어 바닥에 큰 구덩이를 만들 뿐이었다.
“……쯧.”
순간 메르시오와 이드가 동시에 혀를 찼다.
결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그것이 가져올 영향도 심상치 않을 것은 분명한 일.
먼저 움직인 것은 메르시오였다.
놈은 즉시 가장 가까운 결계의 벽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온몸에 화염을 감은 모습으로.
마치 자신에게 닿는 그 무엇이든 녹여 버리던, 지하에서의 모습 같았다.
이드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메르시오를 따라잡으려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이드. 거기 있죠? 여기 밖에서 보는데, 결계의 변화가 심상치 않아요. 마나 패턴과 시공의 반발 계수로 볼 때, 국소적인 공간 분쇄가 일어날 것 같으니까 조심해요.
“…….”
-듣고 있어요?
‘듣고는 있는데, 공간 분쇄가 뭐야?’
고개를 갸웃하는 이드.
그런 그에게 바로 간추린 정보의 폭탄이 떨어졌다. 전투 중에 복잡한 설명은 방해라는 것을 아는 라미아의 배려다.
그런 그녀가 전한 정보는 정확히 탑주의 의중을 꿰뚫는 것이었다.
탑주가 알았다면 자기 뱃속에 들어갔다 왔느냐고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할까?
“역시 마법사. 눈이 돌아갔는데도 음흉하네.”
-뭐가 음흉하다고요?
‘탑주 말이야. 어쨌거나, 그럼 탈출해야 하는 거야?’
-그게 가장 좋죠. 그런데 결계에 차원 속성이 더해졌으니까, 엄청 강력해져서 쉽지는 않을 거예요!
쿠우우웅!
라미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리는 천둥소리. 메르시오가 결계와 충돌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유성처럼 긴 꼬리를 늘인 채 결계와 부딪힌 메르시오지만, 차원 속성이란 것이 굉장한 것인 듯 부서지지 않는다. 오히려 부딪힌 부분을 중심으로 검은 차원 균열이 늘어났다. 그리곤 더 강력하게 메르시오의 힘에 맞선다.
그 모습이 꼭 창과 방패의 싸움 같았다.
‘그런 것 같네. 저 메르시오가 쉽게 결계를 뚫지 못하는 거 보면.’
-여기서도 잘 보이고, 잘 들려요. 특히 마법사들이 난리도 아니에요.
골치 아프다며 하소연하는 라미아.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일생 보기 힘든 광경에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관찰, 기록하려는 마법사들 탓이었다. 그 덕에 기사들까지 나서서 말려야 했으니까. 라미아는 기사들을 보며 목을 그었다. 마법사들을 기절시켜 버리라는 신호였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는 검은 균열의 공간 결계가 일렁이는 모습으로 보였다. 시공의 반발이 커지며 공간이 무너져 내리려는 전조였다. 라미아는 이드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일단 이드도 거기서 빠져나와요. 아무리 결계가 단단해졌어도, 12대 식이면 충분히 헤쳐 나올 수 있으니까. 결계만 뚫고 나면 바로 제 곁으로 이동시킬 수 있어요.
이드는 그녀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고작 결계 따위가! 아우우우~’
결계를 단숨에 뚫지 못하고 한 번 튕겨 나온 메르시오.
그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더욱 거대한 화염을 몸에 둘렀다.
이드는 그런 메르시오를 보다 라미아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꼭 탈출해야 해? 공간 분쇄를 견딜 수 없냐는 거지.’
-그런 무식한 짓을 왜요?
이해할 수 없다는 라미아의 말이지만.
어쩌겠나. 눈앞에 날뛰고 있는 똥개를 잡으려면 이 결계가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 같은데.
지금도 봐라. 자신을 경계는 하고 있지만, 결계부터 뚫기 위해서 등을 돌렸다.
저게 사라지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계속 싸우자고 달려들지, 악당의 최애 대사인 ‘두고 보자!’를 남기고 도망칠지 말이다.
그런 이드의 마음이 잘 전달된 모양이다. 당장 라미아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일단 가능할 것 같아요. 충격은 있겠지만, 태주묵혼에 광인멸혼이라고 했죠? 그 상태만 유지해요. 가만히 보다가 위험할 것 같으면 내가 나설 테니까.
‘아니, 그러지 마. 오히려 탑주나, 메르시오가 그때 그쪽으로 튀는 게 더 곤란하니까.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 좀 있다 밖에서 봐! 아, 그리고 이 반지 말이야.’
-그건 괜찮아요. 이드 생각대로 될 거에요.
마지막 확인을 마친 이드는 바로 움직였다.
그 순간, 메르시오가 다시 한번 결계를 들이박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대식을 두른 이드를 상대하던 메르시오다.
그 말은 곧 그의 화염도 12대식 못지않게 강력하다는 뜻. 이번에 충돌하면 아마 결계를 깨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다.
촤아앙!
태주묵혼을 꺼내 든 뒤로 조용히 있던 일라이져가 저절로 뽑혀 나왔다. 그런 검에 어린 것은 광혼.
“역시 난 검파야. 검이 편해.”
순간 셀 수 없는 검영이 이드의 발을 받치고, 거침없이 메르시오의 뒤통수를 노렸다.
“이 개 같은 놈이!”
갑작스럽게 동족 혐오 발언을 외친 메르시오.
하지만 이드의 공격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드다.
아무리 광혼이 청백 화염에 잘 통하지 않아도, 피해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죽고 싶은 것이냐!”
“죽는 건 너고.”
“오냐! 너부터 죽여주마!”
이드가 앞을 막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자, 메르시오도 탈출을 포기하고 이드를 향해 다시 송곳니를 드러냈다. 다시 검을 꺼내 든 이드의 전투는, 주먹을 쓸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빠르고, 현란하며, 섬세하고, 예리했다.
휘휘휘휙!
적. 홍. 은.
수라삼검. 난화십이식. 무형검강.
삼대 검공을 넘나드는 화려하고 강렬한 무공은 이미 검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사실, 무림 기준으로 순수한 파괴력만 따지면 고금을 통틀어 이드를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무림사 누가 무한한 힘의 상징인 드래곤 하트를 단전에 품어 보았겠는가.
이드가 현묘한 초식 없이 단순히 내력만 무식하게 때려 박아도 막을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드가 있는 곳이 무림이 아니라 그레센이며, 싸우고 있는 상대 또한 인간이 아니라 혼돈의 파편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12대식이 있었어도 드래곤 하트의 힘이 없다면 이렇게 싸우지도 못했을 강적.
지금도 그렇다.
“그따위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날 막아설 땐 언제고, 힘이 다한 것인가!”
“주절주절 개소리도 풍년이다. 방금 전까지 두들겨 맞던 건 잊어버렸냐?”
이드는 메르시오를 농락하듯 현란한 변초 뒤에 숨어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메르시오의 말 또한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예리해도 단순한 검강 정도로는 메르시오의 화염을 뚫지 못한다. 그러나 이드가 설마 그런 사실도 모르고 검을 꺼내 들었을까! 이드는 메르시오의 공격 패턴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공간에 검영을 가득 채워 메르시오를 방심시켰다.
이 공격이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과감히 달려들라고, 조금 더 늦으면 탑주의 공간 분쇄가 시작될 거라고.
그건 기다림이었다. 광인멸혼류 뒤에 숨기고 있는 태주묵혼의 끈기였다. 그리고 끈기는 전술이다.
“크허허헝!”
기다림 끝에 반응이 왔다.
이드가 결계를 등지고 몰리는 순간. 야생의 본능을 폭발시킨 메르시오가 달려들었다.
용을 물어뜯을 듯 벌린 주둥이와 사자의 갈기처럼 이글거리는 화염.
순간 이드를 휘감고 있던 황홀한 빛이 흩어졌다.
대신 나타난 것은 거대한 고리. 너무 커서 메르시오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심장을 조이는 압박감이 있는데!
순간 심상치 않음에 메르시오가 피하려 하지만, 고리가 나타난 순간 이미 늦은 일이었다.
퍼억!
고리가 빛과 같은 속도로 줄어들어 메르시오의 목을 조였다.
천년 거목보다 더 두꺼운 목이 가녀린 아가씨의 허리 정도의 굵기가 될 때까지!
뿌드드득!
메르시오의 목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잡았다. 요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