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4화
990화
정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드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아직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이 산더미인데 말이다.
메르시오의 반응을 보면 뭘 물어봐도 순순히 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해 보고 실패하는 것과 해 보지도 못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종의 백파이어랄까.
메르시오의 화염이 광혼을 태워 버릴 정도로 강렬해서 생긴 일이었다.
안과 밖을 나누는 공간의 틈이 화염에 녹으며 벌어졌다. 그리고 그 벌어진 공간이 순간 붕괴해 그대로 화염을 타고 역류한 것이다.
문제는 그 화염의 출발점이 메르시오의 머리라는 것일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탑주가 노린 강력한 한 수, ‘공간 분쇄의 절반이 메르시오의 머리에 집중되었단 거다.
거기에 마침 공교롭게도 충돌하는 순간이라 원원대멸력 봉의 힘도 약해져서 그 역류를 막아 주지도 못했고 말이다.
“어이, 똥개! 또 숨겨 둔 머리 없어? 진짜 이렇게 죽은 거냐?”
터터턱!
그래도 혹시나 하는 아쉬움에 목을 제외한 부분에 원원대멸력을 해제하고 중요 혈맥을 타혈했다. 하지만 반탄력은 고사하고 한 점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식대법과 같은 수단으로 죽음을 위장한 것도 아니다. 언데드가 아닌 이상, 이종의 기운에 대한 반발과 근본적인 생명력까지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설마 그런 방법이 있더라도 시도하는 멍청이는 없다. 반발력과 생명력이 사라진다는 건 진짜 죽음을 의미하니까.
거기에 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파스스스.
하얀 팔목 위로 그림처럼 나타나는 차원의 인이다.
그레센으로 돌아와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녀석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드가 알기로 차원의 인이 나타나는 것은 딱 두 가지 경우다.
혼돈의 파편이 완전히 제압되거나, 혹은 혼돈의 파편이 죽었을 때.
지금은 후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모습을 내보인 차원의 인이 희미하게 발광했다.
파스스.
그러자 메르시오의 발 한쪽이 가루처럼 부서지며 차원의 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사실 혼돈의 파편에 완전한 죽음은 없다. 그들은 죽으면 다시 봉인되니까. 그러나 지금 차원의 인으로 흡수되면 그대로 끝이다. 이런 정보들도 그저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 흡수되는 것을 보는 건 이드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도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좀 참아라.
하지만 정보 말고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이드로서는 당장 메르시오를 흡수시켜서는 안 됐다.
그런 이드의 말에 차원의 인의 흡수가 멈췄다. 온전하진 않지만, 사소한 부분에선 주인인 이드의 말을 따르는 차원의 인이다.
직후 이드의 관심은 자신을 향한 공간 분쇄를 향했다. 메르시오의 머리를 날려 버린 건 백파이어로 먼저 터졌지만, 남은 반쪽은 이제 시작이다. 콰드드득,
공간이 무너지고, 높아진 압력에 모든 것이 찌그러진다.
그런 압력 속에서도 태주묵혼의 흑기는 이드를 지켰다. 태주묵혼은 막강한 공간 분쇄의 압력까지 막아 내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런 중에도 손끝이 저릿한 것이, 괜히 탑주의 마지막 수가 아니었구나 싶기도 했다.
‘이 정도 할까?’
무너진 공간이 쪼그라든다. 공간 분쇄의 과정이다.
본래 공간 분쇄의 끝은 메르시오의 머리를 날려 버린 것 같은 폭발이 아니라, 소멸이다.
점점 쪼그라들며 높아지는 압력으로 내부에 있는 적을 죽이고, 그 끝에 점이 되어 소멸하는 방식이다.
이때 경우에 따라, 희박한 확률이지만 극도로 압축된 공간이 마이크로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마이크로 블랙홀이 뜨면 사방 수 킬로미터가 다시 한번 뒤집어지는 효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이라면 이번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거다. 멀쩡한 공간 분쇄가 둘로 쪼개졌으니까.
이드는 우선 메르시오를 공간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 후 자신도 탈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쪼그라드는 중심으로부터 강력한 인력이 발생했지만, 이드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움직였을까.
펑!
갑자기 이드의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가 폭발했다.
정확히는 반지와 조금 떨어진 허공의 공간이 갑자기 터진 거다.
그렇다고 반지가 부서질 때의 충격이 적은 건 아니다. 일반 사람이면 손가락은 물론 손이 통째로 날아갔을 거다. 흑기를 두른 이드의 손에는 작은 상처 하나 만들지 못했지만.
폭발이 일어난 공간에서 갑자기 물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반지 안에 있던 물건들이었다. 금과 은부터 시작해서 적지 않은 보석과 번뜩이는 병장기, 거기에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생필품까지.
종류는 둘째로 두더라도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물건들의 값어치는 대충 봐도 남작 영지의 일 년 수익보다 많은 금액이다. 그렇게 튀어나온 물건들은 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바로 공간의 중심으로 빨려들 뻔했다. 이드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분명 태주묵혼 때문에 느려야 할 이드의 손이, 어느새 광인멸혼류로 바뀐 듯 환영을 만들어 내며 허공을 누볐다.
그런 이드의 손에 잡히는 것은 보석. 금은까지 챙기기에는 너무 양이 많아 아쉬운 대로 보석만 따로 챙긴 것이다. 그 외 다른 것은 당연히 포기.
“빌어먹을 던전 같으니라고!”
놓친 물건을 아까워 욕설을 뱉는 이드.
한데 말과 달리 그 눈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찾는 듯 허공을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극한의 압력을 헤쳐 나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 연출이면 탑주도 납득했겠지?”
반지의 폭발은 예정되어 있던 일종의 쇼였다. 탑주에게 보이기 위한 쇼.
라미아에게 공간 분쇄가 가진 특징을 들은 직후 이드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다.
바이트 타블렛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것도 메르시오가 죽어 버리면서 좀 꼬이긴 했지만, 일단 준비한 것이니.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탑주의 주목도를 낮출 생각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 이드의 생각대로 탑주는 결계 밖에서 붕괴되고 있는 공간 안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덕분에 메르시오를 밖으로 밀어낸 후 이드의 반지가 폭발하는 장면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저 웨어울프가 바이트 타블렛을 탈취한 것이야.”
탑주는 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공간 분쇄의 범위 밖에 널브러진 메르시오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쫓아가 놈이 바이트 타블렛을 숨겼을 아티팩트를 빼앗고 싶지만, 막상 그러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서 놈을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이 반복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간 분쇄를 힘으로 뚫고 나오는 중인 이드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라미아도 경계해야 했다.
발을 한번 잘못 들이는 순간, 바이트 타블렛의 확보는 고사하고 자신이 잡혀 버릴 위험이 있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또 정신을 놓아 버리는 일이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스스로를 향해 냉정해야 한다고 되뇌는 탑주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냉정’을 외치는 그가 정작 바이트 타블렛의 탈취범 용의자에서 라미아를 제외했다.
심지어 생명의 관에서 탈취한 바이트 타블렛을 가지고 있던 것도 라미아였는데 말이다.
이는 웨어울프를 향한 분노 때문에 아직 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그 점을 탑주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법의 길에 든 후 지금까지 언제나 냉정, 침착했던 그가 이런 폭주를 경험이나 했겠는가.
‘후~ 일단 바이트 타블렛은 포기한다. 명예 후작이 놈을 죽인 이상, 바이트 타블렛은 또 명예 후작의 소유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이후 거래를 통해 돌려받으면 된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초인 마법의 개조다. 도대체 저 웨어울프와 초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초인이 갑자기 폭주한 것인가. 그걸 알아야 한다. 그걸 알아내면 초인 마법도 완전해질 것이고, 어쩌면…… 초인들도 내 손에 쥘 수 있을지 모른다.’
순간 떠오른 상상 때문일까. 훅하고 뜨거운 입김을 내쉬는 탑주다.
성취욕에 지배욕, 거기에 권력욕까지.
뜨겁게 자극된 욕망에 어서 빨리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 욕심이 한 번 더 탑주의 마음을 굳혔다.
이제 그는 당분간 바이트 타블렛의 행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리라.
“그럼 다시 만나는 날까지 바이트 타블렛을 맡겨 둘 테니, 잘 부탁하겠소. 명예 후작.”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말을 끝으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한 탑주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에이, 놓쳤네.”
직후, 텔레포트 마법을 감지하고 날아온 라미아가 안타까움에 발을 굴렀다. 연결된 마음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드는 라미아를 위로하고는, 광인멸혼류의 광혼을 깨워 일으켰다.
검은 비단 위에 수놓은 은빛 용이 이럴까. 태주묵혼의 광혼이 깃드는 순간 압력에서 벗어난 이드는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그때까지 메르시오의 목을 조이던 원원대멸력 봉의 고리도 사라졌다. 메르시오도 죽었는데 봉의 고리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 방심이었나 보다.
벌떡!
목을 조이던 마지막 고리가 사라지는 순간, 널브러져 있던 메르시오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이드와 토벌대의 반대 방향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언데드?!”
그 모습에 이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죽은 것을 확인했고, 차원의 인이 반응하기까지 했지 않은가.
그런데 죽지 않았다고? 사실은 죽은 척이었다고? 아니면, 언데드로 부활이라도 했어?
당했다는 느낌에 이를 악문 이드의 뇌리에 여러 가지 의문이 스친다. 하지만 복잡한 머리와 달리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펑!
땅이 폭발할 정도로 진각을 찬 이드가 메르시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반응은 빨랐지만,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아직 이드가 붕괴 중인 공간에서 완전히 탈출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푸확.
이드가 공간에서 벗어나는데 걸린 시간은 3초였다. 그 사이 메르시오는 수 킬로미터 밖까지 달리며 계속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에 이드는 즉시 태주묵혼의 운용을 멈추고 광혼의 공능인 뇌전전궁보의 경공에 집중했다.
순간 음속을 돌파한 이드의 모습이 길게 늘어나며, 급격히 거리가 좁혀졌다.
이대로라면 따라잡는 것도 순간이다 싶은 순간.
퍼퍽!
갑자기 메르시오의 등을 뚫고 팔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웨어울프가 아닌 단련된 인간의 팔.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팔의 다음 행동이었다.
뿌드드득.
팔은 폭발로 인해 이미 절반 정도 부서진 메르시오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추적해 오는 이드를 향해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머리를 뽑아 던진다고 맞을 것도 아닌데?
이드가 위화감을 느끼고 속도를 줄인 순간, 날아오던 메르시오의 머리가 공중에서 성대하게 폭발했다.
범위는 넓지 않지만, 묵직한 폭발이었다.
그 때문에 앞이 막히자 이드는 급히 허공을 밟아 올랐다. 강력하긴 하지만, 자신에게는 피해를 주기 힘든 폭발의 용도가 눈가림용 같았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그가 공중에서 내려다본 지상에 메르시오는 이미 없었다.
급히 기감을 넓혀 보지만, 땅속에도 허공에도 메르시오의 기척은 감지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귀신같은 수법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으아~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드는 허탈함에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탑주가 어떻게 생각하든 진작 차원의 인에 흡수시켜 버리는 건데 말이다.
그래 봤자 이미 지나간 일. 이드는 애써 미련을 털어 내려 애썼다.
마침 고개를 돌리니 라미아가 급히 날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에휴~”
할 말은 많지만, 힘없이 고개를 흔들어 답을 대신하는 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