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5화
991화
나무가 우거진 어느 이름 모를 산속. 어린 고블린 한 마리가 나무에 기대앉아 운 좋게 발견한 과일을 깨물어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새의 지저귐이 멈추고, 그 대신 불쾌한 소음이 났다.
끼기기긱!
“케켁?”
하지만 호기심보다 식욕이 먼저인 어린 고블린은 금방 호기심을 접고 다시 과일을 입에 물었고,
쩍!
과일과 함께 그대로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어린 고블린의 머리 위 나타난 팔이 공간을 찢어 열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 순간, 같은 공간 좌표를 공유하게 된 나무와 어린 고블린이 찢어진 공간과 함께 절반으로 찢겨 죽게 된 것이다.
그렇게 멀쩡한 두 생명을 죽여 버린 공간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머리가 없는 웨어울프, 메르시오였다.
고블린의 피로 질척해진 바닥에 발을 디딘 그는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간 후, 거목이 쓰러지듯 쿵 하고 쓰러졌다.
메르시오가 쓰러지자 열렸던 공간이 흔적도 없이 복구되었다. 다만 이미 죽은 고블린과 나무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쓰러진 메르시오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팔이 움직였다.
이번에도 메르시오의 머리를 뜯어낼 때와 마찬가지였다. 몸에 손을 박아 넣더니, 그대로 내리그어 생선을 가르듯 등을 갈라 버린 것.
무엇보다 끔찍한 건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갈라진 틈을 당겨 열었다는 거다.
죽으려면 좀 얌전히 죽을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지경이다.
그 순간. 벌건 내장 사이로 사람 하나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후우~ 꼴이 말이 아니군.”
온통 피투성이인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
그 음성의 주인공은 메르시오가 전장 밖으로 옮기려다 포기하고 입속으로 꿀꺽 삼켜 버린 철벽의 검왕, 바로 존 워스였다.
결국 메르시오의 머리를 뜯어낸 것도 그였던 것이다.
존 워스는 곧 메르시오의 몸속에서 일어났다. 메르시오의 배 속에서 회복을 한 건지, 잘렸던 허리도 멀쩡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피투성이 상태로 숲에 발을 디딘 존 워스는 자신의 꼴을 확인하고는 손을 들어 메르시오를 가리켰다.
주루루룩.
그러자 그의 전신에 묻어 있던 피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존 워스의 손짓에 따라 메르시오의 몸으로 돌아갔다.
존 워스는 분명 무공을 익힌 기사다. 그러나 피를 조종하는 저 모습은 어떻게 봐도 무공이 아니다. 차라리 마법이나, 초인기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회복력에, 메르시오의 몸을 찢고 나오는 것. 거기에 완전히 황금색으로 물든 두 눈까지.
그 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지금 존 워스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철벽의 검왕’이 아니란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이어진 존 워스의 행동을 보면 확실했다.
피를 주인에게 돌려보낸 존 워스가 메르시오의 몸에 손을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팔 전체가 조각조각, 아주 작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다만 신기한 점은 그렇게 부서진 팔이 흩어지지 않고 원래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조금 차이는 있지만, 메르시오의 발이 차원의 인에 흡수될 때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현상은 곧 전염이라도 된 듯 메르시오에게서도 벌어졌다.
차이라면 존 워스는 팔 하나지만, 메르시오는 몸 전체가 부서졌다는 것과, 부서진 조각이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덩어리 같았고, 차츰 형태를 잡아 갈 땐 멀쩡하게 머리가 달린 웨어울프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다만 그 크기가 미묘하게 줄어들었다는 점이 이전과 달랐다.
그렇게 온전히 형태가 잡히자 존 워스가 손을 뗐고, 조각났던 그의 팔과 메르시오도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다.
사실 일단 한번 머리가 파괴되면 교황이 모든 성력을 퍼부어도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데 존 워스는 그런 불가능한 일을 너무 태연히 처리해 버렸다.
상대가 아무리 혼돈의 파편이라고 하지만. 아니, 혼돈의 파편이기 때문에 더 특별할 텐데 말이다.
그렇게 혼돈의 파편과 깊이 관계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 존 워스는 쪼개진 나무를 깔고 앉았다. 메르시오를 회복시켰기 때문인지 조금 지친 모습이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지. 아니면, 정말 게으른 똥개라도 된 건가?”
똥개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가. 꿈쩍도 하지 않던 메르시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말조심해. 널 살려 준 것이 누구인지 잊지 마.”
벌떡 일어나 앉은 메르시오가 존 워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다 살았음에도 그의 눈에 혼란스러움은 없고 외려 차분했다. 존 워스의 힘으로 살아난 영향인가. 그 차분함은 존 워스와도 조금 닮아 있었다.
“그래서 나도 널 살려 줬지 않나. 그리고 계산은 정확해야지. 넌 날 한 번 살렸지만, 난 두 번이라고. 차원의 인의 주인을 피해서 한 번, 방금 재생으로 또 한 번 무엇보다 넌 날 그 냄새 나는 배 속으로 삼켰을 뿐이지, 구한 게 아니라고.”
“흥.”
조곤조곤 따지고 드는 존 워스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는 메르시오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줄었다고는 하지만, 메르시오의 덩치는 존 워스가 나무에 걸터앉았음에도 눈높이가 같을 정도로 여전히 컸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으면 제대로 부활시켰어야지. 내 존재를 구성하는 차원에 손실이 생겼다.”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하나? 아니면 물에 빠진 걸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고 하던가. 차원의 인에 흡수당한 걸 난들 어쩌란 말이야. 무엇보다 겨우 3% 아닌가?”
“무려 3%다. 내 힘이 3%나 감소했다는 말이다.”
불만 가득한 메르시오의 말에 존 워스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3%가 아니라 30%가 줄어들어도 메르시오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있다고 저리 호들갑인지.
“그 정도로는 우리가 진행하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흥, 차원의 주인의 힘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힘의 감소가 없을 때도 근소하게 밀렸다. 그 상태에서 3%는 커!”
“호오~ 겁먹은 거냐. 똥개.”
“…..좋아, 널 뜯어 먹고 감소한 3%를 채워 주마.”
“정감 있고 좋은데, 그리 싫다면 그만하지. 네 말도 옳지만, 어차피 그와의 충돌을 피하면 끝나는 문제다. 진행하는 일이 끝나고, 형제들이 돌아오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는 거지.”
“크큭. 그때까지 차원의 인의 주인이 기다려 준다던가?”
“비꼬지 마라. 솔직히 말해서 네가 싸우고 싶을 뿐이잖아. 이번 전투에서 밀린 걸 만회하고 싶은 거고.”
“당연한 일이잖아!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었는데. 이 빌어먹을 해지 계약 때문에 본능조차 억누른 채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단 말이다!”
그간 쌓였던 화가 폭발한 것인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메르시오의 몸에서 뜨거운 열풍이 불어 나왔다. 그에 주변 나뭇잎이 노랗게 익어 버렸다.
존 워스는 그 모습에 못 말리겠다는 듯 살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메르시오를 이해하는 마음도 있었다.
자신들, 혼돈의 파편의 존재 의의는 변혁이다. 멈춰 버린 세상이 다시 힘차게 달리도록 만드는 채찍이었다.
그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세상도 있지만, 자신들의 창조주는 멸망도 변혁의 일부라고 했다. 멸망 후에는 항상 새로운 탄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혼돈의 파편은 오랜 봉인에서 깨어나며 봉인을 풀어낸 마법사와의 해지 계약 때문에, 뼈에 새겨진 창조주의 명령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사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일단 계약 내용이 카논의 대륙 통일이다 보니, 그 후 세상에 변혁을 강요하면 되는 일이니까.
한데, 그 간단한 일이 이드와 드래곤들이 개입하면서 이상하게 비틀어져 버렸다.
이드와 드래곤들의 개입이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대항하는 것 역시 변혁의 한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이에 끼어 있는 해지 계약이 문제였다.
당장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변혁을 강요하려고 하니, 카논의 대륙 통일이라는 계약 내용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드가 사라진 후에도 드래곤들과의 협의에 의해 물러나야 했고, 지금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루한 과정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메르시오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과정이 우리 취향이 아니긴 하지.’
세상에 철벽의 검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속엔 혼돈의 파편 중 일좌라는 정체를 감추고 있는 존 워스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괜히 크게 반응하면 저 성질 급한 메르시오가 길길이 날뛸 테니까.
“이 빌어먹을 그레센! 당장이라도 뒤집어 버리고 싶다고!”
“적당히 해라. 네 맘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냉정히 평가하면 우리의 임무는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다.”
“어디가?”
“차원의 인의 주인이 가져온 변혁. 무공이 세상을 변하게 만들었지.”
무공이 가져온 변화는 크다. 단순히 무력의 상승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무공은 무력을 상승시키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천년 무림의 의지와 중원의 문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대륙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지식이며, 학문이다.
그 영향은 의학, 문학, 마법학 등 위에서 아래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초인도 있지.”
“하! 그딴 혼돈에 빌붙은 찌꺼기가 변혁이라고 말하는 거냐?”
무공을 말할 때 고개를 흔들다 초인이란 말에 대놓고 비웃는 메르시오다.
“거기에 무공?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 물론 달라지긴 했지. 하지만 무공 이전의 마법이나 기사의 단련법과 같이 사회의 극히 일부에 일어난 변화일 뿐이야. 난 인정하지 않겠어.”
“뭐, 어디까지나 내 기준일 뿐이다.”
버럭 화를 내는 메르시오의 반응에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이는 존 워스다.
그의 말처럼 혼돈의 파편이 가진 기준은 그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런 기준의 차이가 없다면 그들의 채찍질을 버텨 낼 세계가 거의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존 워스가 두 손을 들자 메르시오도 흥분을 가라앉히고서 물었다.
“이제 어쩔 거지? 차원의 인의 주인이 바이트 타블렛을 가졌으니, 계획도 틀어졌다. 무엇보다 네 정체도 발각당한 것이 아닌가?”
“아니, 아직이다. 나란 존재에 대해 논란을 만들 만큼의 증거가 없으니까. 언제나 기사들과 으르렁거리는 초인들의 주장은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겠다고?”
끄덕.
희귀한 개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썹을 구길 대로 구긴 메르시오지만,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존 워스에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각자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강제할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의 관계였다.
“차원의 인의 주인도 그렇게 정치적으로 움직여 주길 바라지. 그렇지 않으면 차원의 인에 잡아 먹힐 테니까.”
“끔찍한 소릴. 그땐 네가 날 살리러 와야지. 내가 널 두 번 살렸다는 걸 잊지 말라고.”
“……너나 엉뚱한 짓으로 계획을 어그러트리지 마라.”
“누가 할 소리.”
그게 끝이었다.
형제에 대한 걱정은커녕, 멋없는 인사말도 없이 돌아서 숲속으로 사라지는 메르시오다.
그 모습을 존 워스가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