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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72화


1008화

정점에 이른 태양이 살짝 기울어진 시각.

두두두두.

대충 세어도 백이 넘는 일단의 인마가 너른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정체를 감추기 위함인지 칙칙한 갈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그들은 피나는 훈련을 받은 듯 빠르게 달리면서도 대열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끝에는 앞서 달리는 숫자만큼의 말들이 주인도 없이 대열을 따르고 있었다.

이만한 숫자의 인마가 달리면 그 땅울림만으로 경기를 일으킬 사람도 나올 법하건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 기묘한 일행이 대로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들판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무공의 보급과 초인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의 영역이 이전보다 넓어지고, 반대로 몬스터의 영역이 줄어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몬스터에 의한 위험도가 낮아졌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주 교통하는 대로를 벗어날수록 위험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보통 길이 아닌 곳으로 다니는 경우는 사냥 등의 이유가 아니고는 없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 이들은 마치 그런 것 따위 모른다는 듯, 사람이 찾지 않는 들판을 거침없이 달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일단 숫자부터 세 자릿수인 데다, 달리는 말은 그 자체가 흉기나 다름없다. 이러니 어지간한 놈들은 접근은커녕 도망가기 바빴고, 그 외 눈치 없고 발이 느려 제때 도망가지 못한 놈들은………….

“케에엑!”

사람들의 공격에 쓰러지고, 이백이 넘는 말발굽에 걸레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몬스터의 숫자를 줄이는 공을 세운 이들은 얼마 뒤 큰 산에 안긴 듯 위치한 숲 앞에 도착해서야 미칠 듯한 질주를 멈추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나오라.”

그러자 범처럼 날렵하게 생긴 다섯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숲에서 튀어나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가슴을 두드렸다.

“타란 기사단장 피오 타란이 주군이신 쿤 타란 백작님을 뵙습니다.”

“타란 기사단이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이들의 인사를 받은 남자, 타란 백작이 반가운 미소로 피오 단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와하하하. 잘 와 주었다. 일어들 나게.”

바로 타란 백작과 타란 기사단이 합류한 것이다.

에린이 말했던 2시에서 겨우 20분이 지난 시간으로, 이번엔 그녀의 예측이 거의 정확했다.

이 모습은 곧 멀리서 감시 중이던 검은 돌의 요원에 의해 이드에게 알려졌다.

한편,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타란 백작은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숲 안으로 이동했다.

하루 전에 도착한 타란 기사단이 준비한 듯, 숲 안에는 너른 야영지와 따뜻한 수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 시간마저 아껴가며 말을 달렸던 타란 백작과 수도 기사단은 뜨거운 수프를 단숨에 해치우는 모습을 보였다.

“휴~ 이제 한숨 돌리는 것 같군. 맛이 익숙한데, 역시 데포 경의 솜씨인가?”

“그렇습니다, 주군. 제가 아니면 이 곰손들은 벌써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하하. 암, 내 알지. 자네가 아니면 굶어 죽기 전에 배탈이 나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거야.”

큰 국자를 붕붕 휘두르며 답한 거한의 말에 타란 백작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한 기사와 그 주군 사이라지만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었다. 그에 아쉬운 듯 수프 그릇을 긁고 있던 수도 기사단장이 감탄하자, 마주 앉아 있던 피오 단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참, 민망합니다. 거친 국경을 구르다 보니 예의를 잊은 기사들이 많습니다.”

“민망하다니요. 저 모습을 보고 예의 없다 하면 눈치가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부럽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백작께서 친근히 대해 주셨지만, 역시 오랫동안 함께한 타란 기사분들에 비할 수는 없군요.”

좋은 말을 들었기 때문인가. 대번에 피오 단장의 입가에 친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도 기사단장은 단순하다면 단순한 그 모습에 유쾌한 기분이 되어 마주 웃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부럽기도 했다. 친근한 주종의 관계도, 말로는 민망하다 하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던 피오 단장의 자부심도.

“무슨 좋은 일이 있어 그리 싱글벙글거리나?”

타란 백작이 그런 두 사람 사이로 앉으며 말했다.

“백작님 흉을 좀 봤습니다.”

친근해도 너무 친근한 말투. 수도 기사단장은 피오 단장이 타란 백작의 사촌임을 기억했다.

“흉 없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아. 그보다 기사단의 흔적은 잘 지웠겠지?”

“두 번 확인했고, 문제없습니다. 이 숲 일대도 주변 사냥꾼과 근처 기가이 남작 영지의 도움을 받아 접근을 막아 둔 상태입니다.”

“그럼 세 번째로 다시 확인하게.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임무는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도 안 되고, 실패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네.”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는 타란 백작이었지만, 피오 단장은 귀찮아하기는커녕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 기사에게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보였다.

국경에서 출발할 때 이미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실에서 연락이 온 것은 있나?”

“없습니다.”

“쯧, 이건 속도가 중요한 일인데. 직접 움직인 우리보다 느리면 어쩌자는 것인지.”

연신 호탕한 모습을 보이던 타란 백작이 혀를 차며 역정을 냈다.

그러자 수도 기사단장이 나섰다. 그래도 며칠 타란 백작을 옆에서 모셨다고 보좌를 하는 모습이 익숙하다.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파라켈 후작께서도 이 흐름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으실 겁니다.”

변경에 머무른 타란 백작, 피오 단장과 달리 많은 귀족과 안면이 있어 그들의 성격을 아는 수도 기사단장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거기에 피오 단장이 말을 보탰다.

“어차피 지금처럼 피로한 상태로는 제대로 싸우는 것도 힘듭니다. 오히려 지금 연락이 와도 하루 쉬어야 할 지경이니, 여유를 가지십시오.” 

“자네 농담이 늘었군?”

“예?”

“겨우 며칠 강행군 정도로 제대로 싸울 수 없다니. 그게 농담이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허 참. 작년에 이틀 밤을 새고 예전 같지 않다고 하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당황스럽습니다.”

“자, 그런 사소한 건 두고 다시 작전에 대해서 논해 보세.”

풀었다 조였다. 분위기 조절이 능수능란한 타란 백작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당황하는 것은 수도 기사단장뿐, 피오 단장은 익숙한 듯 자신에게 전달된 작전에 대해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기다리던 왕실 대신, 쉐어 가든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썩 좋지 않았다.

쉐어 가든 내성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연락이었다. 바로 이드가 검은 돌을 통해 마스로 흘려 준 정보가 전해진 것.

이 소식을 접한 타란 백작은 연락이 늦다고 역정을 내던 것과 달리 오히려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최소 서른이란 말이지. 그 이상은?”

“아시다시피 내성이 워낙 특수한 곳이라 그 이상의 정보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피오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전력 강화가 혹 저희 때문은 아닐지요?”

수도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타란 백작이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전력 강화가 아니라 다른 나라로 이동을 했겠지. 마스 땅에서 마스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바벨이 마스와 전면전을 할 것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

“하면 타란 백작님의 말씀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우린 운이 없는 것이고.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달리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전력으로 우리에 대응할 수 없다는 말도 되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정면으로 붙으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군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아마도 제국에서의 토벌전에서 마탑과 완전히 갈라선 것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가까이 지냈던 만큼 마탑이 쉐어 가든에 대한 정보를 알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에 소드 팰러스도 더해 보게. 바벨에서 30명을 동원한 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걸세.”

“소드…… 팰러스 말씀이십니까?”

“소드·

“바벨과 소드 팰러스에도 무언가 있는 겁니까?”

아직 존 워스에 대한 문제가 꺼내지기 전이라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수도 기사단장과 피오 단장이 의문을 표했다.

당장 그들이 탈취해야 할 인물이 검후다. 그런 만큼 소드 팰러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점을 제외하더라도 소드 팰러스는 그들에게 남달랐다.

검후가 바벨의 손에 잡혀 있는 과정에 어떤 더러운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소드 팰러스에는 그들의 젊은 추억이 남겨져 있었다.

그들도 한때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타란 백작 역시 같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있지. 소드 팰러스의 뒤통수가 깨질 만한 일이. 어차피 곧 알려질 테니 기다리게 먼저 알아봐야 말할 사람이 없어 속만 터질 테니까. 우리 작전과 크게 관계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사실 존 워스의 일이 관계가 없지는 않다.

당장 검후가 바벨에 잡혀 있는 것도 존 워스와 삼검왕의 배신 때문이니까. 거기에 쉐어 가든의 전력이 강화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고.

하지만 타란 백작은 굳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알고 나면 속만 터질 일이기 때문이다. 그건 기사로서, 또 무인으로서 아직 소드 팰러스에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린 할 일이 있잖나. 당장 왕실에 연락을 하게. 이러다간 쉐어 가든이 이사를 가겠다고 재촉이라도 해야겠네.”

그리고 마법사를 불러 통신을 연결한 타란 백작은 진짜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강력하게 독촉했다.

“내일까지 연락이 없을 경우 현 전력을 이용해 단독으로 치고 들어갈 테니 그리들 아시오!”

물론 진짜 그러진 않겠지만, 그런 다그침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왕실 역시 쉐어 가든의 전력 강화에 대한 보고를 받은 입장이다. 속이 타는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 현장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았다. 자신들의 일만 마치면 현장이 바로 움직일 수 있는데, 자신들이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탓이니까. 그런 마음에 왕실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총출동해서 파라켈 후작을 괴롭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왕실에 감금되었던 파라켈 후작은 갑자기 들이닥친 귀족들에 의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바벨도 중하지만 고국인 마스 역시 중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마스의 대귀족으로서 책임이 있었다.

그런 차에 타란 백작의 독촉이 온 것이다.

“아무래도 재상이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소.”

그에 신중히 상황을 살피던 왕은 결국 안데르 재상을 움직였다. 파라켈 후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함은 물론, 마스의 귀족들에게 고루 존중과 신뢰를 받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데르 재상이 파라켈 후작과 같은 방에 마주 앉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파라켈 후작은 마스의 충신이네.’

안데르 재상은 한 장의 명령서를 들고 방을 나왔다. 길지 않은 내용의 명령서 가장 마지막에는 파라켈 후작의 서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제 이걸 빚쟁이처럼 구는 타란 백작에게 지급으로 보내 주게. 또, 쉐어 가든의 연락이 오거든 즉시 파라켈 후작과 연결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수고하셨습니다.”

직후 명령서는 마법을 통해 타란 백작의 손에 쥐어졌다.

“역시 쪼아야 일이 빨라. 자, 그럼 이제 우리 차례로군.”

명령서를 접으며 쉐어 가든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타란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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