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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77화


1013화

목표가 코앞이란 사실에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타란 백작과 기사들은 곧이어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접객실을 나섰다. 하지만 브리더 자작을 비롯한 세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서 답답한 침묵을 유지했다. 각자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텅!

그러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위리더 남작이었다. 그가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내성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은 절대 불가한 일입니다! 자작님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 성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실 후작님이 이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럼 어쩌나? 이해가 되지 않아도 명령이 떨어진 것을. 그렇다고 타란 백작과 기사들을 쫓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전・・・・・・ 입성을 거부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떼쓰는 갓난아기처럼 오리 주둥이가 된 위리더 남작을 보곤, 그만하라는 듯 그의 등을 치는 피더스 남작이다.

“쯧, 아이처럼 억지부리지 말게.”

정말 못 말릴 친구다. 왕실과 주군의 명령을 거부하라니. 아무리 자신들이 바벨의 인간이라고는 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그런 결정을 했다가는 의심을 사는 문제 이전에 밖에 있던 타란 백작과 기사단이 당장 내성으로 밀고 들어왔을 터.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것이 이 친구의 단점이긴 하지.’

“아이는 누가 아이란 말인가?”

불끈하는 친구를 밀어 버린 피더스 남작이 말했다.

“이번 일은 자작님께서 직접 후작님께 여쭤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 뭔가 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네. 무언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이곳에 검후가 있는데 이런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닌데, 일단 자네들은 타란 백작과 기사들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해 주게.”

“맡겨 주십시오.”

“거절할 명분이 없어 들이긴 했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남쪽뿐이야. 그 선을 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네. 그게 누구라도 말이지. 자네들도 경계를 설 기사들을 세우고 확실히 전해 주게.”

혹여라도 허락된 공간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발견된다면 피를 볼 생각까지 하는 브리더 자작이었다.

“충!”

뒤이어 빠르게 경계를 세우기 위해 두 남작이 접객실을 나서고, 브리더 자작 역시 작은 한숨과 함께 방을 나섰다.


타타탓.

두 개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지붕을 스쳐 지나간다.

환한 낮임에도 그 모습이 이상하게 흐릿했다.

“후우~ 후우~”

안내를 맡은 요원은 거친 숨을 뱉었다. 이렇게 숨이 차도록 달려 본 것이 얼마만인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항상 속도보다 은밀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움직였는데, 지금은 그런 걸 다 무시한 상태다.

검은 돌의 새 주인이 첫 명령을 내렸다. 그걸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렇게 가까이서 안내를 할 수 있어 영광이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길지 않았다.

빨라지는 속도에 자신의 숨이 거칠어지는 반면, 반의반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이드의 모습은 너무 편안해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위장술보다 더 완벽하게 기척과 감각을 속이는 능력은 무슨 수법을 쓴 것인지 아무리 살펴봐도 근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이제 검은 돌이 명예 후작님의 부하가 되었으니, 어쩌면 우리도 저 기술을 배울 기회가 있을지도……..’

어쩔 수 없이 솟는 기대감에 김칫국부터 대량으로 원샷 중인 요원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어느 건물 그림자 안쪽에 멈춰 섰다. 가쁜 숨을 애써 삼킨 요원이 그리 크지 않은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저 여관입니다. 짐 상자는 현재 3층 좌측 끝에서 두 번째 방에 있습니다.”

“기사는?”

“짐 상자를 가져온 기사 두 명이 같은 방에 있습니다. 명령하시면 바로 그들을 유인해 내겠습니다.”

이미 검은 돌이 여관 직원으로 변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들은 내가 처리하지. 자넨 내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게.”

“옙.”

요원은 즉시 대답했다. 반론도 없었다. 아무렴 누구의 명령인데.

다음 순간 부운귀령보를 시전한 이드가 요원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요원은 그 모습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던 이드는 요원이 말한 방의 창문 옆에 벽을 디디며 나타났다.

그런데 그 모습이 조금 독특했다.

옷이며 검, 머리카락 따위가 땅이 아닌, 이드가 디디고 선 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흡인공이 아닌 중력을 조종한 듯했다.

그 상태로 마치 우물을 들여다보듯 여유롭게 방 안을 살피자, 과연 기사 둘이 보였다.

하나는 경계를 서듯 문 앞에 서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의 상자를 열고 무언가 조작 중이었다.

ᅳ벌써 시작한 모양인데. 어서 들어가요.

끄덕.

라미아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린 직후.

“음?”

“모기?”

두 기사는 귀 가까이서 들리는 모깃소리에 서로가 있는 반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 풀썩 쓰러져 버렸다. 벽을 뛰어넘는 경공타혈로 혼혈이 찍힌 것이다.

두 사람이 쓰러지자 이드가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고, 바로 라미아가 상자를 향해 날아올랐다.

푸드드득.

그 사이 이드는 기사들을 확인했다.

“역시 진짜 기사가 아니었네. 마법사가 위장한 거였어.”

이드는 상자 옆에 쓰러진 이의 심장에서 고요하게 회전하는 써클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괜히 상자를 열어 조작하고 있던 게 아니었던 거다. 한편으로는 당연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런 아티팩트를 준비했다면, 다룰 수 있는 마법사도 필요했을 테니까.

이드는 곧 그들에게서 관심을 떼고는 상자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에는 상자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석판이 들어 있었다.

중앙에는 주먹만 한 마나석이 박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손톱만 한 서른세 개의 마나석이 별자리를 따라 반짝이고 있었다.

라미아는 그 중 중앙에 박힌 마나석에 올라앉아 있었다.

“좀 알 것 같아?”

“훗, 제 실력을 알면서 그렇게 물어요?”

“그럼 뭐라고 물어야 하는 건데?”

“이 물건의 속을 속속들이 다 파헤쳤냐고 물어야죠.”

“……다 파헤쳤니?”

이드가 조금 아니꼬운 표정을 한 채 앵무새처럼 라미아의 말을 따라 했다.

“완벽하게 파악이 끝났어요. 이거면 내성이 어떤 대비책을 가지고 있는지도 역 추리가 가능해요. 완벽한 저니까 가능한 거라고요.”

조금 흥분했는지, 완벽이란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는 라미아다.

누가 보면 재수 없는 모습이지만, 그녀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분석을 시작한 지 수 분이 지나지 않아서 구조와 구성에 대해 완벽히 파악을 끝냈으니까 말이다.

아마 힘들게 이 아티팩트를 만든 마법사들이 이런 모습을 봤다면 허탈감에 눈물을 뚝뚝 흘릴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다른 상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까?”

이드가 묻자 라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파악은 끝났는데, 이 스타 월에 제 코드를 박아 넣는 작업이 남았어요. 제가 처리할 동안 이드가 다음 상자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서 불러 줘요.” 

어차피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던 일이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다시 창문을 넘어, 요원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단숨에 이동했다.

“흡? 죄・・・ 송합니다.”

“놀란 것까지 죄송할 건 없네. 그보다, 다음 상자가 있는 곳으로 가지.”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한데, 어깨에 있던 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이드가 깜빡한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요원이다.

“아, 그녀라면 상자를 조작 중이지. 나중에 부르면 되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네.”

“아…… 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새의 정체가 라미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요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내심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했다. 이드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니까.


“끝.”

두 손을 터는 것처럼 날개를 탁탁하고 날개를 턴 라미아가 상자의 테두리로 자리를 옮겼다.

파직. 파지지직.

그와 함께 중앙의 마나석에서 정전기 같은 마나가 서른세 번 방출되어 석판에 자리한 작은 마나석을 두드렸다. 그건 컴퓨터로 치면 일종의 리부팅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끝나자 아티팩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의 마나 흐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신호를 보내면 조작 권한은 내게로 넘어오게 되어 있지.’

“이드, 여긴 작업 끝났어요.”

라미아는 다음 장소에 도착해 있을 이드를 부르며 쓰러진 기사와 마법사를 처음의 그 자세로 일으켜 세웠다.

-수고했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 잊지말고.

“그런 건 기본이죠. 지금 갈게요!”

투툭.

슉.

말이 끝나는 순간 라미아의 모습이 사라지고, 기절해 있던 두 명이 해혈되며 정신을 차렸다. 그건 찰나의 어긋남도 없이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음? 잘못 들었나?”

“모깃소리? 그거라면 나도 들었어. 여기 어디 있는 게 분명해. 주인을 불러서 약초라도 좀 태워야겠어.”

덕분에 방에 남은 두 사람은 자신들이 기절했다는 것도, 그 사이 이드와 라미아가 찾아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중요하게 지키고 있는 아티팩트가 리부팅 했다는 사실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일은 다른 일곱 개의 여관에서도 차례로 일어났다.

그리고 일곱 여관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이드와 라미아는 내성의 비상시 대처 방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검후를 공간 이동으로 놓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많다, 많아. 검후를 감금하고 있어서 특히 신경을 쓴 건 알겠지만, 이걸 보니 진짜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걸 알겠네.”

이드는 라미아가 적어 낸 수십 개의 초인기와 마법이 적힌 리스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가지각색의 다양한 방법에 대해 대처했음을 알 수 있는 리스트였다.

“정말 힘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또 검후님을 눈앞에서 놓쳤을 테니까요.”

함께 리스트를 확인한 쉴라도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곧 이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저들이 준비한 비상수단도 알았고, 해결 방법도 손에 넣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쉴라 경은 어쩌고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일분일초라도 빨리 저 저주스러운 곳에서 검후님을 꺼내 드리고 싶습니다만…… 이드 님의 생각은 다르신 듯하네요. 휴~”

“맞아요. 조금 기다려 보자고요. 우리 패도 늘었으니, 검후를 놓칠 걱정도 없으니까. 과연 어떤 놈들이 붙어 오는지 이 기회에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이드가 리스트를 돌돌 말아 쥐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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