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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97화


1033화

“끄으으으.”

몸을 움직였다. 팔과 가슴에서 지독한 통증이 올라온다. 단단히 악문 이빨 사이로 어쩌지 못한 신음이 샌다.

국경을 지키는 싸움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상을 당했었다. 하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들 것 같다.

타란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곤 그나마 멀쩡한 팔을 움직여 포션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뼈가 어긋난 상태로는 그걸 들어 마실 수가 없다. 

“스으으읍!”

숨을 뱉어 몸을 이완시킨 후, 폭발적인 흡입과 함께 내공을 더해 일순간에 근육을 조인다.

따딱, 뿌득. 뿌드득.

잘게 부서진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대부분의 어긋나고 부서진 뼈가 근육이 밀고 당기는 힘에 제자리를 찾았다.

뼈가 갈리고 비벼지는 통증은 무시무시했고, 자연히 타란의 입에서는 다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뽕!

그래서인지 그는 서둘러 들고 있던 포션을 마셨다. 뜨겁고 차가운, 단정 짓기 힘든 기운이 다친 부위를 쓰다듬자 통증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후~ 이번 일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겨우 여유가 생긴 타란 백작이 그제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현재 그와 기사들은 계단을 오르는 중간에 있는, 어떤 방에 있었다.

마법이나 초인기의 도움 없이 늪지 슬라임을 처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계단의 공간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길을 여는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방에서 자신이 나설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시에 방마다 쓰러진 동료의 시신도 챙기고.

분명 시간은 걸렸지만, 착실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괴물’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타란 백작은 방의 중앙을 향해 걸었다.

그곳의 바닥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치 원래 그런 게 있었던 것처럼 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하지만 그건 은빛 웨어울프가 갑자기 나타나며 뚫어 놓은 구멍이었다.

결코 작지 않은 크기의 그것을 내려다보자, 까만 어둠만이 보였다.

탑의 바닥은 물론, 그 아래로 깊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둠은 깊었다.

저 밑에서부터 뛰쳐나온 그놈의 목적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아니었다. 염두에도 두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제국의 마탑 토벌에 나타났다는 그 괴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른 단장이 다가서며 말했다. 그 옆에는 피오 단장이 비틀거리며 함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괜찮은가?”

“백작님께서 가장 앞에서 막아 주신 덕분입니다. 부끄러운 꼴이지만 감사드립니다.”

“면목 없습니다. 주군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자네가 신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언제나 생길 수 있는 거야. 방금 일도 그런 것 중 하나고. 그보다, 구른 단장은 그 괴물에 대해 들은 게 좀 있나 보지?”

“저도 단편적인 정보만 접했을 뿐입니다. 저와 비슷한 모습의 존재가 토벌전 마지막에 나타났다고요. 게다가 엄청나게 강력해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신화에 나올 것 같은 싸움을 했다나요.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마 사실이겠지. 우리의 존재가 귀찮다는 양 휘둘렀던 가벼운 손짓에 지금 이 꼴이 난 걸 보면 말이네.”

갑자기 바닥을 뚫고 나타난 메르시오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타란 백작이 그 앞을 막아섰었다. 그러나 메르시오는 그런 타란 백작과 기사들을 손쉽게 물리쳤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파리를 쫓는 것처럼 손짓 한 번에 날려 버렸다.

평소라면 수치스러워 혀라도 깨물고 싶을 것 같은 취급.

그러나 상대가 이만큼이나 강하면 도리어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분명 무시무시한 힘이지만, 오히려 너무 압도적이라 가늠조차 되지 않아 어떻게 두려워해야 할지 몰랐다.

“목적이 검후였을까요.”

“당연히 그렇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모르겠군.”

고개를 흔드는 타란 백작의 말과 함께 탑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그 진동의 원인은 분명 머리 위

도대체 누가 그 괴물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잠작이 되지 않는 타란 백작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군. 누군지 몰라도 아까 그자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면, 그 상대도 최소한 같은 수준이라는 것. 이렇게 되면 검후의 확보는 실패라고 봐야겠지.”

“아직입니다. 멀쩡한 기사들도 제법 있고, 무엇보다 주군께서 무사하시지 않습니까!”

“글쎄…….”

타란 백작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쓰러진 기사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저 멀리 있는 자들뿐. 자신과 비교적 가깝게 서 있어 메르시오의 공격을 그대로 받은 기사 중에는 다시 일어선 이가 없었다. 그들이 방패가 되어 주었기에 뒤에 기사들이라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일단 부상자들부터 급히 치료하지. 위아래 어느 쪽이든, 여기 오래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까.”

타란 백작이 가지고 있던 포션을 꺼내 두 단장에게 건넸다. 그에 단장들이 자신들의 포션까지 더해 기사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타란 백작은 그 모습을 보다 입술을 적셨다.

“어쩌면 오늘이 타란 기사단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군.”

살아 돌아가더라도 그렇다. 전체 인력의 삼분의 이 정도가 죽었으니, 타란 기사단의 규모는 형편없이 쪼그라들 것이다.

쉽지는 않아도 충분히 성공시킬 자신이 있는 임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머리 위에서는 다시 한번 폭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이 탑을 흔들었다.

한데 그 소리와 충격이 앞의 것들과 비교해도 확연히 컸다. 겨우 부상을 수습한 기사들이 다시 휘청거릴 정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상대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싸움의 여파에 휩쓸리는 기사들과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타란 백작이 뚫려 있는 천장의 구멍을 노려볼 때다.

화아아앗.

어둡던 구멍을 통해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지고, 곧이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폭발과 진동이 덮쳐 왔다.

떠떠떠떵!

그와 함께 이어지는 종소리 같은 폭음은 두개골을 뚫고 들어와 머리를 흔들어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에 타란 백작이 억지로 버티고 선 순간.

티킥. 틱 틱. 티틱.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방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그그ᅳ

방을 둘러싼 벽과 천장이 마치 잘 쌓은 블록이 미끄러지듯 교차하며 탑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휘이이잉-

그와 함께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이 타란 백작의 눈을 찔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솟았다.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희미한 느낌의 결과가 이것이라니. 만약 자신이 탑을 잘라 낸 ‘그것’의 진로상에 있었다면?

부르르,

상상하고 싶지 않다. 타란 백작이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파파파팟!

떠러러렁!

그리고 그와 동시다. 검은 선과 은빛 선이 눈앞과 탑을 중심으로, 온 사방을 스치고 지난 것은 그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번엔 머리만이 아니라 전신의 뼈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에서 발생한 폭풍이 밖으로 드러난 탑을 휩쓸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기사들 몇이 바람에 날려가 버리기까지 했다.

“으아아악!”

“사, 살려・・・ 줘…… 어……..”

뻗은 손을 잡아 줄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두 엎드려라! 뭐든 붙들어서 날려 가지 않게 해!”

한발 늦었지만 다급하게 외친 타란 백작은 이어 폭음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연이어지는 이 기막힌 상황의 이유를 어떻게든 꼭 알고 싶었다. 내성에 뛰어들어 쉐어 가든과 싸울 때까지만 해도 곧 승리를 손에 쥐고,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거대한 폭풍에 휩쓸려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원인을 찾던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추락 중인 랜달이었다.

한데 그 꼴이 엉망이었다. 옷은 걸레처럼 찢어졌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어디에서 생긴 출혈인지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특히 작전 전에 만났을 때 번득이던 눈이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차라리 불쌍할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랜달 아래서 충돌하며 모습을 드러낸 이드와 메르시오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움직이던 두 사람이 충돌하는 순간 멈춰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그 순간, 일라이져가 멸천붕의 패황의 힘을 품고 검은 구름처럼 메르시오를 휘감았다.

그에 메르시오는 양팔의 주먹과 팔꿈치에서 뿜어낸 은색 송곳니를 사납게 휘두르며 구름을 찢어발겨 냈다.

쿠릉.

그 충격에 바로 위에서 추락하던 랜달이 다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최상층의 방이 무너지고 랜달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수십 초가 지난 상황에, 그가 아직도 추락하고 있는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타란 백작의 기사들도 마찬가지.

“으아아. 미, 미끄러진다!”

“이거 잡아!”

바닥에 바짝 엎드리거나, 무너진 바위를 안고 버티는 기사들. 그 모습을 보던 타란 백작은 갑자기 솟아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크흐흐흐흐, 내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겨우 이 정도였던가. 이렇게 작은 존재란 말인가. 빌어먹을.”

열과 성을 다해 키워낸 기사들이 제대로 된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여파에 휩쓸려 아등바등하는 모습이라니. 고작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는 실력으로 그렇게 자신만만했던가.

실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와 다를 것이 무언가 말이다.

지금도 보라. 무섭게 충돌하는 저 두 명 중 누구도 자신들을 신경도 쓰지 않지 않은가.

저들에게 자신과 기사들은 겨우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에 또다시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타란 백작이다. 그러다 돌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씹었다

“그래. 무시해라. 차라리 철저히 우리를 무시해라. 우리가 빠져나갈 때까지.”

타란 백작이 두 단장을 향해 조용히 손짓했다.


‘제법 심지가 단단한 인간이네.’

타란 백작은 조심한다고 했지만 이드의 감각에는 사각이 없었다. 기사들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그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기사들이 빠져나가든 자리를 지키든, 그들과 이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혀 상관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드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메르시오와 랜달에 있었다.

사실 좀 전까지는 랜달은 포기하고 있었다. 전력을 내서 싸우기 시작하면 그 사이에 휘말린 랜달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데 싸움이 이어진 시점에서 이드는 어쩌면 랜달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생각을 수정한 것이다.

당연히 이유는 메르시오에 있었다. 다름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메르시오의 공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메르시오의 공격은 단순하지만 무섭게 빠르고 강력했다.

극쾌와 극강.

두 무의의 극에 이른 움직임은 변초가 없음에도 화려했고, 복잡했다.

지금도 메르시오의 공격은 빠르고 강력한 건 마찬가지다.

한데 미묘하게 정신의 관에서와는 달랐다. 당장은 이드도 이거라며 꼬집어 지적하긴 힘들었지만, 분명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이드에겐 좋은 쪽으로, 메르시오 본인에겐 나쁜 쪽으로 말이다.

파파파팟!

비등비등한 움직임. 그 속에서 일라이져가 꿈틀거리는 순간.

“……!!”

메르시오의 팔이 튀어 오르고 미세하게 드러난 틈으로 이드의 손끝에 메르시오의 어깨를 찢고 지나갔다.

“역시 대세는 욕심쟁이가 맞는 모양이네.”

이드는 메르시오와 함께 떨어지고 있는 랜달을 보며 의욕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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