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0화
497화
“무슨 일입니까?”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빛 없는 방 안에서 불안해하던 파이온이 급하게 물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평소 말을 끌던 버릇도 없이 바로 질문이 나왔다
“하하,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야? 그 담력으로 산적질은 어떻게 했나?”
…죽지 않기 위해서 했지요.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밖이 소란스러운 듯한데. 거기다 누가 군사들이 온다고 소리치며 다니기도 하던데 말입니다.”
“뭐야, 이미 다 알고 있잖아. 따로 말해 줄 필요 없겠구만 뭘.”
말해 주지 않은 사실을 잘도 알고 있다는 듯 기특하다는 얼굴의 대장이다. 심각한 상황을 조금 가볍게 만들고 싶은 듯했지만 파이온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파이온이 좀 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성에 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래서 제가 있는 곳을 들킨 겁니까?”
자신의 말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는지 말하는 중에 파이온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어이, 어이. 얼굴 좀 풀지? 그러다 얼굴로 못도 박겠어.”
대장이 개그센스를 최대로 발휘해 보았지만, 파이온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뒀다가는 못이 아니라 대장의 얼굴을 박아 버릴 기세다. 대장은 자신의 개그가 통하지 않아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돌아서서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럴 일은 없어. 만약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조용할 일도 없고. 넌 모르겠지만 거기엔 어마어마한 인물이 같이 끼어 있거든.”
그런 인물이 있었던가. 파이온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자신이 겪어 봤던 에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티티를 상대했던 엘프도 아닌 것 같았다. 벤이 상대했던 이드라는 검사가 가장 강하긴 했지만, 그도 자작의 상대가 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을 마법으로 옮겨 온 새 형태의 아티팩트의 주인처럼 보였지만 그 힘이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제가 보지 못했던 다른 인물과 함께 움직인 겁니까?”
“뭐, 아직은 그렇게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부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밖에서 우당탕거리며 누군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야. 조심해, 들키지 않고 자리를 비켜 줘야 한다고.”
“아, 미안해. 여기 이런 돌부리가 있을 줄 알았냐고. 젠장,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비키라면 어쩌라는 거야?”
“어쩌겠냐. 기사 놈들이 시키는데, 해야지. 이 집에 뭐 벗겨먹을 게 있다고 그러나 모르겠다.”
“자, 자. 어서 빠지자고.”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두 용병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목소리를 낮췄다고 하기에는 문이 닫힌 부엌까지 소리가 너무 잘 들렸고,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도 초보 연기자처럼 어색했다.
파이온이 그들의 대화에 인상을 쓰며 듣고 있다가 말했다.
“저게 도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아예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 같은데.”
“뭐긴 뭐야. 네가 들은 대로지. 지들 딴에는 자연스럽게 이 집을 노리는 놈들이 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거지. 연기력이 딸린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야. 큭큭.”
낄낄거리는 대장을 파이온이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럼 미리 의뢰를 해 두신 겁니까?”
파이온의 물음에 아궁이 안쪽으로 팔을 넣어 뭔가를 찾고 있던 대장이 고개를 적었다.
“전혀. 말 그대로 옆집일 뿐이지. 그나마 내가 먹으려고 만들다 남은 걸 좀 넘겨줬을 뿐인 사이. 아무래도 그게 고마웠는지 뜻하지 않은 효과를 보이는 모양이야. 아! 찾았다.”
말을 하던 대장이 찾던 걸 찾았는지 읏차 하는 기합과 함께 그것을 당겼다. 그러자 치르륵거리는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궁이 뒤쪽 벽이 텅하는 소리와 함께 삐딱하게 열렸다.
파이온이 그 모양을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이곳이 이드의 물음에 대장이 말했던 시크릿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요리도 하시는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요즘 남자들의 필수 스킬 아니냐. 자, 들어가라.”
대장이 손을 털면서 말했다.
“들어가면 쇠사슬이 늘어져 있을 거다. 그걸 끝까지 당기고 문을 덜컥거릴 때까지 밀어서 닫아라. 그래야 시크릿룸이 밀폐된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십니까? 저하고는 면식도 없고, 그쪽 분 말씀대로 산적질이나 하던 놈인데 말입니다.”
파이온은 살짝 혼란스러웠다. 평범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인으로 각성한 뒤 세상을 떠돌며 쓴맛을 보고, 하이탈 자작에게 걸려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 중에 한 번도 이유 없는 친절은 없었다. 상황이 위급할수록 이런 점은 특히 더했다. 헌데 지금 대장은 여태까지 겪어 온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저 비밀통로로 들어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전 딱히 드릴 게 없습니다.”
대장은 파이온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상대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걱정 마라. 딱 봐도 빈털터리인 너한테 뭘 받을 생각 없다.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다만, 그건 다른 사람한테서 받아 낼 테니 네가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어쭙잖은 말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라. 더 있다가는 들키겠다.”
대장은 피식 웃으며 파이온의 등을 밀었다. 파이온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아궁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장은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는 장작을 아궁이에 던져 넣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솥에 물을 부어 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정보가 없는 한 이곳에서 비밀통로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산적질을 몇 년이나 했으면서, 아직 저런 애송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흐흐흐. 제대로 굴리면 에단처럼 쓸 만한 놈 하나 나오려나?”
대장은 뒤돌아서며 웃었다. 왜 숨겨 주냐니. 세상을 좀 안다는 놈은 절대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일단 득이 된다고 생각되면 입에 넣어 삼키고 볼 일이지, 절대 손에 쥐고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대장이 집에서 낄낄거리는 사이 이백의 병사와 기사들이 집을 철저하게 둘러싸고 원진을 형성했다. 그들 너머에는 갑작스러운 수비군의 움직임에 놀란 얼굴의 용병들이 서 있었다.
“포위를 마쳤습니다. 대장님.”
“아, 수고했다.”
밤중에 하달된 명령을 받고 동문수비군을 모두 데리고 달려온 동문 수비대장이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문 수비대장은 수백의 눈길을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포위……!”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수비대장이 크게 소리치려는 찰나, 대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순간 수백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히야. 많이도 모였네. 설마 이 인원이 전부 날 잡으러 온 건 아닐 것이고, 수비대장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말하는 대장의 모습에 수비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명색이 도시의 치안을 지키는 위치에 있는 만큼, 용병들이 블랙리스트라고 칭하는 외국의 정보 요원들에 대해서는 그도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서로 각국의 국경에 정보 요원들을 보내 놓고 있는지라 어느 정도 선에서는 눈을 감아주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관계였다. 헌데 오늘 그들을 정면에서 치고 들어온 것이다.
‘영주님의 명령에 급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저 집에서 놈이 나오지 않는다면 조용히 덮을 수 없는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미 질러 놓은 상황이다. 이제 와서 뺄 수는 없다.
“이곳에 수배 중인 산적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즉시 무기를 버리고 조사에 적극 협조하기 바란다.”
“어허허.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위험한 인물을 숨겨 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인물을 찾았다면 먼저 넘겨드렸겠지요. 수비대장님께서도 여기에 그자가 있다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질 않습니까?”
물론 잘 알고 있다. 조금만 꼬아서 보면 타국에서 영주의 살해를 시도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새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용병들을 의식해 낮아져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곳에 놈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첩보를 확인해야겠지.”
“물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순순히 집을 내어드릴 수 없는 것이 제 입장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우 차라리 서로에 대해서 모른다면 편하다. 바로 집을 수색하도록 한쪽으로 비켜서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심이란 놈이 뭔지, 오히려 서로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쉽게 비켜 줄 수가 없다.
“쯧, 쉽게 되는 일이 없군. 저자는 내가 상대한다. 그동안 안을 뒤져라.”
수비대장은 피곤한 얼굴로 수하들에게 명령하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대장 역시 검을 꺼내 들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수비대장의 동조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검이 날았다. 군더더기 없는 강격이었다.
타앙!
대장은 강격을 막음과 동시에 상대의 낭심을 차올렸다. 예의를 차린 인사에 난데없는 실전으로 답이 돌아온 상황이었지만 수비대장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발로 상대의 다리를 막고 칼을 비틀어 손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 공격은 다시 상대의 검에 막히고 대장의 팔꿈치가 열린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수비대장은 몸을 틀어 공격을 흘리고 팔을 들어 열린 겨드랑이로 검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대장이 굽혔던 팔을 뻗으며 회전시켜, 검을 든 팔을 밖으로 걷어내고 상대의 가슴을 차서 떨어트렸다.
“후~”
순간 두 사람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서 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단 세 호흡 사이에 두 사람이 나눈 수준 높은 공방일체의 초근접전에 모두 긴장해서 숨을 쉬는 것을 잊은 때문이었다. 특히 외곽에서 구경꾼 포지션으로 서 있던 용병들은 웅성거리며 두 사람의 실력을 평가하기 바쁜 모습을 보였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어깨의 힘을 빼는 수비대장은 내심 편치 않았다.
생각지 않게 붙게 된 근접전에서 서로의 실력을 확실히 느낀 때문이었다. 어떤 잔재주를 피울 한 톨의 여유도 없이 오롯이 각자가 가진 진실된 실력을 토해 내게 만드는 근접전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우열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보다 강하다.’
그리고 그 근접전에서 수비대장은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실력으로만 보면 상대는 어지간한 영지의 기사단장급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자신이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빌어먹을!’
내심 한숨을 내쉰 수비대장의 눈에 집으로 들어가려다 어중간한 모양으로 멈춰 서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다.
“수색하라고 하는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수비대장의 재촉에 기사와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집 안으로 달렸다. 동시에 수비대장도 다시 대장에게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상대를 빠르게 제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상위기사들도 나서라!”
“옛!”
촤촤촤촹!
수비대장의 말에 다섯 명의 기사가 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대놓고 이야기하기에는 자존심이 차마 허락지 않는 수비대장의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 수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대장이 강하기는 했지만 수석기사급의 수비대장과 상위기사 다섯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던 것이다.
여섯 명은 한데 어울리며 검을 휘둘렀다. 아까전과 같은 살벌한 근접전은 아니었지만 은빛 검광이 밤 공간을 환하게 밝힐 만큼 빠르고 화려한 검투였다.
승패가 분명히 보이는 싸움이었다. 넓은 원을 형성하고 있던 여섯 명이 천천히 압박하고 들어오면서 원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검을 휘두르는 것이 버거워진 대장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기까진가.’
대장은 세 개의 검신에 제압된 자신의 검 위로 두 개의 검광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아앙!
징을 닮은 쨍쨍한 소리와 함께 어깨까지 전달되는 저릿한 진동을 느끼며 대장은 검을 놓치고 말았다. 동시에 수비대장의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제압해라!”
“옛l!”
짧은 대답에 이어 세 명의 기사가 납검할 여유도 없이 검을 던지고 대장의 양팔과 어깨를 제압하고 오금을 차서 무릎 꿇려 제압했다.
‘허헛 이거 생각 외로 쪽팔리는구만.’
대장은 지금 상황을 외국의 다른 특수 기사단에서도 볼 거라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잠깐이고, 꼬인 문제를 푸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준다. 잠시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파괴력과 살상력이 강한 기술들은 서로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비기를 사용했으면 상황이 좀 달랐으려나?’
대장도 그 부분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다.
대장은 너무 강하게 잡아 뻐근한 어깨에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러니 그만 놓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승패도 났는데 제가 다시 덤비기야 하겠습니까?”
기사들이 그 말을 듣고 수비대장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잡고 있어. 결과에 상관없이 성으로 데려가서 영주님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대장은 내심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영주성으로 가신 마스터 일행들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잡혀 가는 건 좋지 않은데.’
그때였다.
―늦었습니다. 명령을 받고 지원을 나온 트와이스 시온 파견대입니다. 저는 임시 대장직을 맡고 있는 마치입니다.
‘오러텅!’
아래로 숙여져 있던 대장의 눈이 빛났다.
ᅳ현재 상황은 대략 파악이 끝난 상태입니다. 파견대의 개입을 원하시면 고개를 끄덕여 주십시오.
대장은 마치의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서 자신이 잡혀 감으로 인해서 마스터에게 어떤 곤란함을 줄지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에겐 일리나스 귀족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마스터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개입하겠습니다.
대장의 대답을 들은 마치가 말을 끝내는 순간 용병들과 건물 지붕 위에서 사십 명의 검은 복면들이 날아들었다.
“무, 무슨? 적이다. 사방을 경계해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수비대장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지만 그의 부하들보다 새롭게 나타난 복면인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복면인 셋은 가장 먼저 수비대장을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했고, 다섯은 대장을 잡고 있던 세 명의 기사를 제압했다. 그리고 열 명은 집으로 들어가서 집을 뒤지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제압했다.
“어우, 살살 좀 잡지.”
대장이 뻐근한 팔과 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때까지 수비대장을 상대하던 세 명의 복면인이 대장의 뒤로 빠지고 나머지 복면인들과 함께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대장의 곁으로 다가와 땅에 덜어진 그의 검을 건넸다.
-명령에 따라 트와이스 시온 파견대 지휘권을 지라지 대장님께 넘깁니다.
복면은 여전히 오러텅으로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다 보니 혹시나 누가 엿들을까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그에 반해 대장, 지라지의 반응은 덤덤했다.
“지휘권, 확실히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지라지의 등 뒤로 집 안에서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병사와 기사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그들의 뒤로는 열 명의 검은 복면이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집을 비운 열 명은 지라지의 뒤에 합류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대처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특히 용병들은 갑자기 나타난 복면을 경계하면서 좀 더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괜히 가까이 있다가 눈먼 칼에 맞을 위험을 피할 생각에서였다.
수비대장과 지라지가 다시 마주섰다. 복면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 탓도 있지만, 서로 양과 질에서 누가 우세하다 말하기 힘든 일이라 자연스럽게 대치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거 덕분에 상황이 제법 복잡해졌소.”
사실 안가를 덮친 시점에서 이미 조용히 끝나기는 틀린 일이었지만, 이렇게 인원이 늘어나면 그 뒤처리는 수 배로 늘어나게 된다. 수비대장은 그냥 조용히 영주성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끝내지 않은 지라지를 은근히 탓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바쁜 사람이라서 복잡한 것은 원하지 않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습니까.”
“어쩔 생각이오.”
이제는 이야기로 풀기도, 싸우기도, 도망가기도 애매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이 지루한 대치는 상당 시간 이어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그 계기가 금방 등장해 주었다.
콰아아앙!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말이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린 곳에서는 벽의 일부가 부서졌던 영주성의 한쪽 구역이 이번에는 통째로 무너져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