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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04화


1040화

이드와 검후.

과연 두 영웅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런 기대감을 품은 상급 기사들의 눈이 묘한 기대감에 반짝였다.

영웅 대 영웅으로서 나눌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사적으로 나눌 이야기에 더 흥미가 큰 것도 사실.

일단 그림부터가 너무 좋지 않은가. 납치된 공주와 그녀를 구한 영웅!

동화나 옛날이야기 속에 흔해 자빠질 만큼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만큼 인연 맺기에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였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있기까지 하다.

‘우리 검후님이 나이가 좀 많으신 게 아쉽긴 하지만, 그러면 어때? 저렇게 아름다우신데.’

이 순간 이드가 이미 결혼을 했고, 일리나와 라미아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다는 사실은 머리에서 깨끗이 지워 버린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이런 핑크빛 망상은 쉴라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자네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도록 하게.”

“……네에?”

“뭘 그리 놀라나?”

“그게 아니라, 저희도 검후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은색 기사단에 오래 있었던 사람일수록 검후와 보낸 시간이 길고, 그런 만큼 쌓은 정도 깊으니 말이다. 

“그러렴. 나도 이젠 말없이 어디 가진 않을 테니, 편히 쉬고들 오너라. 그간 아쉬웠던 마음이야 나눌 시간은 많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가 저렇게 말하면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검후님.”

대답과 함께 돌아선 기사 몇의 입술이 뾰족하다. 뒤로 빠진 엉덩이도 오리처럼 씰룩거리는 것이 불만 가득한 게 눈에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모습에 검후의 눈이 반달이 될 때쯤 문이 닫혔다.

“호호호.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했던 모양이구나.”

“……엉뚱한 생각을 품은 녀석들도 다소 있는 것 같았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쉴라가 포기한 듯 고개를 살랑이며 답했다.

검후는 오랫동안 보아 왔던 모습이고, 이드에게도 이미 못 볼 꼴을 여럿 보였기에 이젠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때, ‘못 볼꼴’의 주요 제공자인 스폴이 의자를 가져와 내밀었다.

“이리로 앉으세요.”

“고맙게도, 어쩐 일로 서비스가 좋아?”

“저야 언제나 친절, 봉사를 입에 달고 사는 기사니까요.”

픽.

순간 방 안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굳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찾을 필요는 없었다. 세 사람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벙글한 스폴이 이드의 찻잔을 준비하는 사이.

이드가 요리조리 얼굴을 살피자, 대번에 표정이 변한 검후가 손가락을 딱 들어서는 말했다.

“그렇게 뚫어지게 여인의 얼굴을 살피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난봉꾼이나 하는 짓이라고요.”

“나 같은 순정파가 세상에 어딨다고 난봉꾼이래?”

“일리나에게 물어볼까요? 이드 님을 애타게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난봉꾼보다 더한 사기꾼이죠.”

“사고 때문에 벌어진 일을 꺼내는 건 반칙이지. 크면서 꼼수만 늘었구나.”

찰랑,

찻잔을 놓던 스폴이 풋 하고 찻물을 쏟을 뻔했다.

감히 검후에게 ‘꼼수’라는 표현을 쓰다니. 웃음을 참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후훗. 처음엔 사고였지만, 이후엔 실수였다고 라미아에게 이미 들었다고요.’

“그, 그래. 실수도 있지. 하지만 애초에 원인이 사고라는 것도 사실이라고!”

다른 것도 아니고 시간의 문제에서만은 꼬리를 말 수밖에 없는 이드가 급히 차를 마시는 척하며 둘러댔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검후도 더 물고 늘어지는 대신 장난스러운 미소를 차로 녹이고는 물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무슨 이유로 살피신 거예요?”

“대단한 건 아니고, 꾸미고 나니 오히려 어릴 때 모습이 희미해져서 말이야. 아, 그렇다고 못났다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호호. 사실은 저도 어색해요. 이렇게 화장하는 건 오랜만이거든요.”

감금된 동안은 화장을 할 기회가 없었다.

설령 그럴 기회와 시간이 있었다 해도, 시중을 들어 주던 기사들이 없으니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죄송하고, 면목 없습니다. 저희가 조금이라도 빨리 검후님을 구해 냈어야 했는데.”

“그만하렴. 너희들을 탓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니까. 아니다. 마침 말이 나왔으니 말하는데, 지금부터 스스로를 탓하는 이야기는 금지. 이건 명령이야.”

“충!”

힘차게 대답하는 스폴. 그 뒤를 따라 스폴을 찌릿 쏘아본 쉴라가 가슴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이드는 검후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녀의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몸은 좀 어때? 무리해서 메르시오의 공격을 막느라 기맥이 상했을 텐데.”

당시 파랗게 질린 얼굴로 급히 포션을 마시긴 했지만, 포션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아요. 조금 시간을 가지고 치료받으면 금방 괜찮아질 정도예요. 물론 그 전에 이드 님이 내공의 봉인을 풀어 주시면 훨씬 회복이 빠르겠죠?”

“그건 조심스럽게 하자. 안전한 게 제일이잖아. 당장 힘쓸 일도 없는데.”

“없긴 왜 없어요? 쓰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뭐 때문에 그러는데?”

고개를 갸웃한 이드의 질문에 짧은 순간 검후의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머물다 사라졌다.

그녀는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드 팰러스의 문제를 해결해야죠. 그것까지 이드 님께 신세를 질 순 없으니까요.”

아무렴 누가 뭐래도 소드 팰러스의 주인은 검후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검후를 대신해 이드가 나서게 되면 다양한 문제가 연이어 벌어질 수 있었다. 그걸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검후가 직접 검을 들어 모든 문제를 일도양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네. 하지만 몇 달 늦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죠. 하지만 이유는 또 있어요. 제 수련이요.”

검후는 말과 함께 의자에 기대 놓은 검을 무릎 위에 올렸다.

납치되기 전까지 검후가 사용하던 검 중 하나로,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항시 쉴라가 가지고 다니던 것을 내어 준 것이다.

“일 년이나 손에서 놓고 있었더니, 너무 간절해요. 무엇보다 이드 님을 보면서 아직 제 난화십이식이 많이 모자란 사실도 알았으니, 다시 따라잡아야죠.”

“다른 건 몰라도 네 난화십이식이 모자란단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데?”

이드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검후가 난화십이식을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은색 기사단과 황녀를 통해, 그리고 검후의 몸을 살피며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메르시오의 공격을 막아 내던 모습. 그건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다양한 정보를 조합한 결과, 이드가 짐작한 검후의 경지는 12성. 난화십이식을 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거기에 황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쌓아 올린 웅장한 내력까지 더하면, 길고 긴 무림 역사의 수많은 고인 중에서도 손꼽힐 것이 분명했다. 그런 실력을 가지고 모자란다니!

“겸손도 정도껏 해야 보기 좋지. 심하면 사람들이 욕한다.”

“하지만 저뿐 아니라 모두 함께 본 걸요. 다른 검법을 응용하긴 했지만, 난화십이식으로 적의 허리를 잘라 내던 모습을요.”

그 순간을 떠올린 검후가 꿈꾸듯 몽롱한 눈을 했다. 무공에 취한 그 모습은 누가 뭐래도 무에 빠진 완벽한 무인이었다.

그녀에게 무공을 전했던 사람으로서 내심 흐뭇한 이드였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정을 해 줘야 했다.

“아무래도 설명을 좀 해야겠네. 그때 사용한 초식은 단순히 검법 간의 결합이 다가 아니야. 수라삼검이 강력한 무공이긴 하지만, 풍화와 혼용했다고 그렇게 강력해질 순 없지. 그 두 초식 속에는 원원대멸력이라는 무공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어. 메르시오의 허리를 끊어 낼 수 있었던 건 원원대멸력이 기반이 되었기에 나올 수 있는 결과였고,

이어 이드는 원원대멸력의 특징과 지신이 가진 최고의 무공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큰 목표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괜히 나올 수 없는 결과에 도전하다 주화입마와 같은 사고를 당하는 일은 피해야 하니까.

하지만 설명을 모두 들은 후에도 검후의 얼굴엔 실망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보단 못할지언정, 두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원원대멸력이 없어도 어쨌든 세 가지 무공을 결합하면 더 강력해진다는 사실은 분명하잖아요. 분명 도전하고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요.”

“그건 좋지만, 조심해라. 무공의 혼용은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야.”

괜히 무림에서 출신 문파 이외의 무공을 배우길 꺼리는 게 아니다. 줄기가 다르면 충돌이 일어나듯, 웬만해선 이질적인 성질에 능숙하게 사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경고에도 검후는 자신만만했다.

“현재 대륙에 알려진 많은 무공을 만들어 낸 사람이 저라고요. 무공의 결합이 어려워 봤자 무공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을 거 아니겠어요!”

경우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드는 반박하지 않았다.

일리나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 땅에서 어떻게 새로운 무공이 만들어졌는지 그 고된 과정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 놀라움과 기발함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 노력을 무공의 혼용에 쏟는다면…… 시간의 문제일 뿐,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 고생해 봐.”

“왜 남의 이야기처럼 말씀하세요?”

“그럼?”

“당연히 가르쳐 주셔야죠. 이드 님도 옆에 있는데. 그 고생을 또 반복할 이유가 없잖아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요구에 이드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혹시 전에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생각할 정도의 당당함이다.

그렇게 이드가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자 검후가 살그머니 그의 손을 잡고는 귀엽게 눈을 치떴다.

“설마 오래전 그때처럼 그냥 가 버리실 건 아니죠?”

곧 세 자릿수의 나이를 세어야 할 나이에 이런 앙큼한 짓이라니. 그런데 어색하기보단 기억 속 어느 영화의 장화 신은 고양이가 떠오를 정도로 잘 어울렸다.

거기에 이전에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한 미안함까지.

“풋, 알았으니 그만해. 나도 당장 어디 갈 건 아니니까. 넌 보는 사람도 쪽팔리지도 않니?”

이드가 슥 손을 빼내며 말하자, 검후가 깔깔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전혀요. 체면을 차리는 것도 어느 정도죠. 제 나이가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때라고요. 거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드 님께 조르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렴요. 검후 님의 말씀이 옳으시죠. 나이로 보나 사제 관계로 보나 당연한 모습인데,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슬쩍 돌아보는 검후에 스폴이 기다렸다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하다. 하긴 평소 스폴의 모습을 보면 검후가 어느 정도 풀어 주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모습이기는 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슥슥 손을 비비며 이어지는 스폴의 말.

“그럼 검후님께서 배우신 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죠?”

“……”

“……크크큭. 당연히 그래야지.”

순간 눈이 동그래진 검후와 낄낄 웃으며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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