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05화
1041화
이드가 물었다.
“이제 뭐부터 할 생각이야? 계획은 있어?”
“생각해 둔 건 엄청나게 많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나하나 세어 보려다 포기한 검후가 말했다.
홀로 감금된 지루하고 긴 시간. 그녀가 가장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생각뿐이었다.
특히 삼검왕의 배신으로 등을 찔린 그녀가 탈출 이후 무엇부터 해야 할지에 대해 고심하는 건 당연히 많이 하는 일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 일이 많아?”
“그보다는 외부의 상황을 몰랐잖아요. 그런 만큼 이런 식은 어떨까, 저런 식은 어떨까 하고 가정해 본 경우의 수가 많은 거죠. 원래는 더 많았는데, 그나마 최근에 이드 님의 소식을 듣고서 그전까지 세웠던 계획을 모두 갈아엎었어요.”
“그거・・・・・・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야?”
이드가 어색한 표정을 하자 검후가 방글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슬슬 상상력에 한계가 오던 참이었거든요. 오히려 새로운 자극이 생겨서 즐거웠죠. 일단 본격적인 계획은 기사단 아이들이랑 클라인 백작과 상의해서 정하려고요.”
그 말에 ‘검후가 돌아오면 모든 걸 뒤집어엎을 것’이라던 클라인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부상만 회복하면 바로 움직이겠네?”
“그렇진 않아요. 부상도 그렇지만, 진짜 회복해야 하는 건 일 년 동안 녹슨 무공이죠. 다른 문제는 몰라도, 소드 팰러스를 정리하기 위해선 실력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소드 팰러스를 언급하는 순간 검후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이드는 그 모습에서 적어도 소드 팰러스에 대한 처리에 대해서는 그녀가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알았다.
“그럼 봉인을 푼 후에 무공을 가다듬는 것까지 도와줄까?”
“정말이에요?”
“어차피 융화에 대해서도 배우기로 했잖아. 같이하면 시간도 단축되고 좋지. 기대해, 열심히 굴려 줄 테니까.”
이드는 언제 꺼냈는지 붉은 모자를 눌러썼다. 그 모습이 마치 지구, 그것도 한국에서 대다수 남성에게 악마라 불리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호호호. 기대되네요. 간만에 즐길 수 있겠어요.”
그러나 붉은 모자의 의미를 모르는 걸 떠나, 순수하게 기뻐하는 검후의 모습에 결국 쓸쓸히 모자를 벗어 버리는 이드였다.
이드는 검후의 모습에서 진성 수련충의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오랜만에 검을 잡아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즐거워할 수 있나 싶었다. 동시에 묘하게 불길한 느낌이 왔다.
진성 수련충은 보기에 따라 극한의 마조히즘 성향과도 같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수련은 수련받는 사람이 아닌, 수련을 시키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후가, 무려 황녀가 수련충이라니! 진성의 마조히스트라니!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치부하고 넘겨 버린 이드는 곧 다른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럼 황궁엔?”
“……그쪽도, 회복한 후에요.”
조금 느리게 돌아온 대답. 그 속에 담긴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황제의 어중간한 태도를 어떤 식으로든 전해 들은 것이겠지.
‘아무래도 방비를 좀 더 철저히 해야겠네.’
저택으로 돌아간 후에도 라미아가 또 고생해 줄 일이 생긴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드는 이드였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 보면, 자신이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검후의 준비는 철저한 것 같았다.
일단 마탑과 초인파, 그리고 혼돈의 파편에 집중하다가 혹시라도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힘을 보태면 될 것이다. 뭐, 완벽히 회복한 후의 검후가 누구에겐들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봉인당한 대신 뭔가 깨달음도 얻은 것 같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오래 감금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성격이 좋고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이 저런 태도를 보이기는 좀처럼 힘들었다.
그렇게 검후에 대한 문제가 정리되자 이드는 본격적으로 그가 방을 찾은 이유를 말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혹시 세레니아가 네게 뭔가 남긴 것 없어? 아니면 드래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한 거라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검후의 표정이 일변했다. 유쾌한 대화도, 황제에 대한 복잡한 심경도 전부 날려 버린 듯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먼저 오셨네요.’
“저기~ 저희도 나갈까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스폴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엔 제발 나가란 말만은 하지 말라는 애원이 담겼다.
드래곤이 사라진 이유라니! 귀를 늘려서라도 듣고 싶을 만큼 궁금증을 유발하는 주제다. 그러나 오히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아쉬움을 안고서라도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
스폴과 쉴라, 두 사람에겐 다행히 검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드 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너희들은 같이 들어 두는 것이 좋을 거란다. 그래야 이드 님이 도움이 필요할 때 적절히 도와 드릴 수 있을 테니까.”
“아하하…… 절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길 빌고 싶네요.”
쉴라와 스폴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양한 사건을 통해 이드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이드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니. 그건 도대체 어떤 끔찍한 상황이란 말인가!
또 그런 때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렇다. 오히려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하지만 검후에게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얌전히 귀를 기울이는 중에, 검후가 입을 열었다.
“이드 님이 사라진 후의 일에 대해서, 이드 님은 얼마나 아시나요?”
“거의 몰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레센에 돌아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일리나도 힘들게 찾았지.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녀를 통해 들은 게 전부야. 드래곤들에게 뭔가 사고가 있다는 것도 일리나가 가지고 있던 세레니아의 아티팩트가 작동하지 않는 걸 보고 나서 안 거야..”
물론 그 전에 레어에 들러 비었다는 걸 알고 짐작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확신한 것은 아티팩트가 작동하지 않는 걸 보고 난 후다.
“사실 정보가 너무 적었지. 에단이 너에 대한 일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아직 숲에서 나오지도 않았을지 몰라.”
정말 에단이 아니었다면 오늘 검후가 구출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로서는 에단이 몇 번이나 감사를 해도 모자란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해 드릴 이야기가 많겠네요. 대신 오늘은 대략적인 사실만 알려 드릴게요. 자세한 건 로드께서 전해 주신 내용을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그런 게 있어?”
“네. 로드께선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을 예측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말한 검후가 잠시 입을 닫았다. 이드에게 할 말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검후가 말한 내용은 이랬다.
상황에 변화가 생긴 것은 초인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전까지 조용하던 혼돈의 파편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걸 확인한 드래곤과 당시의 초인들도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이드가 봉인시켰던 혼돈의 파편이 다시 깨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그건 이미 짐작했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듣던 이드가 그럴 줄 알았다며 말했다.
애초에 혼돈의 파편이 모두 봉인된 것도 아닌 시점에서, 그들이 동료를 봉인된 상태로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검후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봉인된 혼돈의 파편이 깨어났지만, 어차피 그래도 여섯.
문제는 이들의 불사성이었다.
완전히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은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한 위협이었다.
여섯을 한꺼번에 봉인시켜 버리면 좋겠지만, 저들도 봉인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여섯이 모이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서로 지겨운 충돌만 이어 가던 중.
세레니아는 혼돈의 파편이 초인의 성질을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초인의 성질을 바꾼다니?”
뜻밖의 소리에 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두 번이나 말이 끊어진 검후가 쏘아보았다.
“그만할까요? 저도 두 번이나 말하기 귀찮은데, 차라리 나중에 들을래요?”
도리도리.
입을 막은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두고 보겠다는 듯 검지와 중지로 자신과 이드의 눈을 오가며 가리켰다. 품위라고는 없는 모습이지만, 꽤나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위협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드의 의문에 대한 답도 해 주었다.
“초인은 별이 낳은 아이들이다. 그들 모두는 별의 의지를 잊고 있다.”
“응? 별의 의지? 그게 뭔지 알아?”
메르시오에게서 들었던 말을 검후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던 이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뇨. 방금 말은 초인에 대해서 로드께서 해 주신 말이에요. 그런데 별의 의지가 왜요?”
“메르시오가 같은 말을 했거든. 별의 의지라고.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런데 세레니아가 같은 말을 했단 말이지? 자세한 건 모르고?”
“네. 저도 로드께 전해 들었을 뿐이니까요. 전해주신 기록을 보면 좀 더 나와 있을지 모르겠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검후에 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안 봤어?”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때론 아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걸 아니까 저도 억지로 보려고 하지 않았고요.”
“세레니아가 남겼다는 물건, 빨리 확인해 봐야겠는걸. 그거 지금 어딨어?”
있는 곳만 알면 당장이라도 가지러 가겠다는 듯 묻는 이드에 검후가 미묘한 표정으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드 팰러스요.”
그녀의 눈이 향한 방향은 정확히 소드 팰러스가 있는 쪽이었다.
이후 남은 이야기와 함께 세레니아가 남긴 물건의 위치까지 전해 들은 이드가 검후의 방을 나섰다.
그러자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교대하듯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검후의 방을 지키는 평기사들이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검후가 은색 기사단에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윽고 검후의 방문이 닫히고, 이드는 지하로 향했다.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던 지하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곳을 지난 이드는 굳게 닫힌 문 앞에 도착했다.
쉐어 가든으로 가기 전 비올라를 던져 넣은 방이었다.
덜컥.
문은 잠겨 있었다. 단순히 걸쇠를 걸어 놓은 것이 아닌, 마법으로 문을 잠근 것이다. 은색 기사단에 검후, 자신까지 돌아온 상황에 대체 안에서 무얼 하려고 잠근 것일까?
비올라가 데리고 간 랜달의 생명이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다.
몇 번 노크를 해봐도 대답이 없자 이드는 문틈을 따라 손가락을 한 바퀴 움직였다.
가벼운 움직임이지만, 그 한 번으로 문을 봉인하던 마법이 모두 끊어졌다.
직후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힘없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소리.
“끄으으응! 이・・・・・・ 미친놈….”
“우후후후후~”
뭔가 참는 듯한 기묘한 랜달의 신음과 욕설.
그 뒤를 따르는 기쁨 충만한 비올라의 웃음.
아무래도 랜달의 생명은 안전한 것 같다. 생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