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2화
499화
‘위험하다.’
자작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꽃 냄새가 물씬 풍길 것 같은 꽃비였지만, 자작은 거기에서 등골이 얼어붙을 것 같은 위험을 감지했다.
붉은 뱀으로 화한 자작은 길게 울부짖었다.
“끄아아아!”
피이이잉!
순간 자작의 발아래로 다시 모여들던 검은 기운이 붉은 뱀의 몸을 타고 올라와 벌어진 입안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부풀려 어른의 상체만 한 크기가 되었다.
이드는 검은 구체에서 곧 폭발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느끼고 한 가지를 떠올렸다.
“브레스? 이무기도 되지 못한 뱀이?”
물론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절대적인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라도 드래곤을 흉내 내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이드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작은 한도까지 모은 힘을 그대로 터트려 쏘아냈다.
퍼엉!
그것은 검은 폭발이었다. 제대로 된 브레스가 아니었다. 발사되는 순간 일어난 폭음은 제어되지 못한 힘의 폭발이었고, 자작이 한 것은 그저 폭발 방향을 지정해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것은 완벽한 브레스였다. 그 힘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 브레스라면 일격에 자작의 성을 무너트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드가 상대했던 혼돈의 파편은 이런 힘을 동작 하나하나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자들이었고, 이드는 그들을 상대하고, 물리친 실력자였다. 이드에게 이 정도의 힘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드는 수백의 꽃잎과 이어진 심상의 통로를 통해 힘을 발현하고 그들의 본모습을 깨웠다.
“멸혼향 회천(廻天)!”
단순히 수백의 꽃잎을 쏟아내는 것이 멸혼향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모양으로 멸혼향이라는 무서운 이름을 가질 수는 없다. 진짜 멸혼향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뭇별들처럼 꽃잎을 닮은 수백의 강편이 각자의 성좌(星座)에서 목표를 중심으로 회전할 때 그 진정한 위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슈르르르륵-
이드의 의지를 받은 꽃잎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좁게 시작해서 넓게 퍼졌다.
자작의 검은 브레스는 꽃잎의 강편에 갈려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자작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꽃잎이 넓게 퍼져 자작과 성의 일부를 포위하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꽃잎에 가장 가깝게 있던 건물의 일부가 깎여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본 자작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둔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성긴 듯했던 성좌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탈출할 만한 공간이 사라졌다.
성좌를 본뜬 진법의 힘이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멸혼향은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초식이 아니었다. 난화십이식 중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초식이었다.
“끄아악. 네가 감히 나를 위협하느냐!”
붉은 뱀으로 화한 상태가 오히려 움직이기 힘들다고 느낀 자작이 화신을 풀었다. 아직 완전히 모습을 찾지 못한 검은 기운이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자작을 떠받쳤다. 자작은 붉은 뱀과 같은 채찍을 사방으로 날렸다.
콰광. 콰광, 콰콰쾅.
채찍이 천지사방에 부딪치고 튕겨 나며 강편들을 두들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멸혼향의 회전에 힘을 더했다.
“내 여인이 오래 끌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 빨리 끝내도록 합시다.”
이드의 말에 자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드의 말이 자신의 모욕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런 천박한 놈. 지고의 삭풍!”
자작은 발악적으로 소리치고는 채찍을 강력하게 회전시켜 붉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끼어들어 빈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기운이 부딪혔다.
츠츠츠츠-
서로 반대로 회전하는 강기의 회전체가 충돌하자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짧은 순간이지만 두 기운은 격렬하게 부딪혔다.
두 힘의 격돌은 불꽃이 되더니 이내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했다.
화르르륵!
얼마나 그 힘이 큰지 남아 있던 성의 한쪽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그 불꽃도 잠시, 힘과 기술의 완성도에서 완전하게 밀린 지고의 삭풍은 앞서 깎여 나간 건물처럼 연기가 되어 깎여 나갔다.
그리고 흘러나온 초인기의 힘은 성좌의 흐름을 따라 흐르더니 곧 허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것은 멸혼향의 숨겨진 이능이었다.
경지에 든 고수는 자신이 발출한 기운을 회수하여 내력의 소실을 최소화하는데 멸혼향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끄아아아악! 이럴 수는 없다! 감히 내게 이럴 수는 없어!”
화려한 기운의 폭풍 속에서 자작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드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이름만 거창하게 붙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고.”
아무래도 ‘지고(至高)의 삭풍’이라는 이름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이 어렵듯, 일단 한번 깎여 나가자 지고의 삭풍은 ‘지고’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힘없이 스러져 버렸다. 멸혼향은 순식간에 크기를 줄여 나갔다.
이드는 멸혼향의 크기가 딱 사람 하나를 그 안에 둘 정도가 되자 초식을 거뒀다. 이대로 끝낼 수도 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만큼 사건이 커진 마당에 범인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잘못하면 엉뚱한 불똥이 자신에게 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붉은 폭풍이 사라지자 그 안에는 혈인이 된 자작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이드를 가리켰다.
“씩씩…… 천박한 망종이여. 너는! 선택받은 자들의・・・・・・ 씩씩…… 적이 되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죽을 것이다!”
자작은 스스로도 이드의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 이드와 싸우려 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저주의 말을 뱉어냈다.
하지만 이드는 앞서 전투에서보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자기 실력을 몰라도 차라리 자신만만하던 처음 모습이 좋았소, 자작. 어찌 마지막에 와서 이런 찌질한 모습을 보이는 건지. 무엇보다 당신 정도의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수십이 떼로 몰려와도 전혀 무섭지 않다오. 아무리도 저주 내용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이만 가시구려.”
“…크…그드….”
이드는 무언가 말을 더하려는 자작의 모습에 그대로 일라이져를 들어서 내리그었다. 이 이상 자작에게는 관심도 없었고 할 이야기도 없었다.
난화십이식
뇌정화
검날의 가장 안쪽 부분에서 붉은 번개가 태어났다. 붉은 빛으로 번쩍이던 번개는 일라이져가 내리그어지자 그대로 검 끝으로 달려가 이드의 의지를 타고 밖으로 뻗어 나갔다. 불규칙적인 문양을 그리며 곧게 뻗어나가는 번개의 모습은 마치 꽃잎으로 만들어진 긴 채찍 같아 보였다. 번개의 채찍은 이드에게 유효타를 주지 못한 자작의 것과는 다르게, 깨끗하게 이드가 원하는 궤적을 그려 내고 사라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말을 잇던 자작에게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몸 중앙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 나타났다. 동시에 그를 지금까지 받치고 있던 검은 기운이 힘없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검은 기운이 사라지자 허공에 떠 있던 자작의 몸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려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드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일라이져를 납검했다.
“그들이라고? 진짜 있는 사람들인 모양인데, 단순한 저주는 아닌 모양이군.”
이드는 자작이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을 두고 생각했다. 끝까지 듣지 못한 게 찜찜하긴 하지만, 앞서 자작에게 말했던 대로 자작 정도의 실력으로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도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심은 해야겠지.”
당연했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함께 움직이고 있는 일행이 있었다. 그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마음 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지하실은 멀쩡하려나? 그 방이 부서졌으면 꼼짝없이 귀족 살해범이 되는데.”
이드는 천천히 허공을 걸어 내려왔다. 일대는 건물의 터만 남은 상황이었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도 무너진 구역에 있었는데, 지금은 돌무더기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이드는 지하 입구의 위치를 가늠하며 주변을 둘러보다 한 곳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부서진 성벽의 일부가 떨어져 있었는데, 커다란 바위 밑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이드가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제압했던 두 경비병의 피였다.
“쯧, 여기군, 라미아에게 같이 좀 챙겨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이드는 입맛이 썼다. 하지만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자작이 초인들을 잡아먹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도 그들의 업보다.
“일단 뚜껑이 덮인 덕분에 지하감옥과 ‘그 방’은 말짱한 것 같은데, 이걸 치워? 말아?”
이드는 뚜껑이 되어 버린 거대한 바위를 손으로 툭툭 치며 고민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냥 두기로 한 것이다. 자작의 포식 행위를 알고 있던 측근이 아직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드가 처리한 것은 어디까지나 포식자인 자작, 한 사람뿐이었다.
당장 자작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듯했던 집사와 기사단장도 멀쩡히 살아 있을 것이다. 괜히 이 바위를 치워서 그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끌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나라에서 금지하는 행위에 대한 증거를 그냥 두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작의 체면은 둘째다. 당장 자작의 공범으로 그들의 목이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영주성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단과 가장 앞에 서 있는 기사단장을 확인하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시간을 끌어 버렸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드는 라미아의 잔소리를 걱정하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까지의 초인과 다르게 본격적으로 초인기와 초인의 기운을 진하게 발현하는 자작의 모습에 생각보다 오래 시간을 끌어 버렸다.
“뭐, 일리나 뒤에 숨으면 피할 수 있겠지. 하하하.”
결과만 말하면 피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리나의 은근한 잔소리까지 더해서 들어야 했다. 빨리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도 일부러 길게 끌었다는 것을 라미아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묵묵히 두 사람의 투정을 들어 주었다. 이것도 그녀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표현 방법의 하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구에서 라미아와 함께 살며 쌓은 생활의 지혜였다. 많은 선현과 선배들이 남긴 최고의 대처 방법이었다.
이럴 때 괜히 변명하고 말을 돌렸다가는 끝없는 잔소리라는 악마의 늪에 빠지게 된다.
“미안해. 다음부터는 걱정하지 않도록 좀 더 신경 쓰도록 할게.”
이드는 두 사람의 잔소리가 그친 듯하자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한편 에단은 세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맹한 눈으로 연인들 간의 사랑 놀음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무리 전설의 인물이라도 여자 앞에서는 별수 없이 바보가 되는구나. 아, 나는 과연 레이디 애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아, 레이디 애나.”
에단은 어느새 품에서 푸른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볼에 비벼 댔다.
그때 그런 에단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움찔.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에단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는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에단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사귀고 있던 애인이 생각나서. 크흠.”
손수건을 보고 하는 짓을 보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뭐… 힘내.”
이드는 간단히 에단을 위로하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일단 라미아와 일리나에게는 미안한 일을 했지만 덕분에 초인에 대해서 한 가지 사실은 알았어. 하지만 그 사실보다 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초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드가 알아낸 사실이 더 궁금했지만, 이야기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던 에단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요?”
“저 산적의 처리와 자작이 포식자라는 사실의 증명.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악질 귀족 살해범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네요.”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가 직접 나서기는 좀 곤란해요. 일도 복잡해지고, 번거로워져요. 꽤 긴 시간 발목을 잡혀 있어야 할 거구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에단, 이번 일도 대장에게 신세를 좀 졌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에단이 생각하기에도 대장을 통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해결 방법일 것 같았다.
‘믿습니다.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