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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28화


1063화

이드는 할 말을 다듬었다.

검후와 설전을 벌이던 라울을 봐서는 말발에서 밀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내가 이럴 필요가 있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이 나는 이드였다.

자신은 그저 의문에 대한 답만 들으면 되는 것이다. 라울과 치열하게 다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라울과 검후 사이에 벌어졌던 설전의 열기가 옮아 온 모양이다.

검후와 자신은 입장도 상황도 달랐다.

치열하게 혓바닥을 놀릴 필요 없이 필요하면 힘이라는 간단한 해결 방법을 사용하면 충분했다.

흠칫.

마침 그 순간 마주한 라울의 여유로운 웃음이 잠깐 무너졌다.

정작 본인도 자신이 왜 이러나 하는 얼굴인 걸 보면, 생존 본능은 뛰어난 모양이다. 그래 봤자 이렇게 마주한 시점에서 본능이 꿈틀거려선 끝난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번 기회에 혼돈의 파편과 초인 사이의 관계를 확인해야지.’

혼돈의 파편과 초인.

사실 그냥 봐서는 이 둘 사이에는 연결 고리랄 게 없다. 혼돈의 파편은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고, 초인이 나타난 건 백 년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이드는 심증뿐일지언정,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떤 확신을 얻었다.

생명의 관과 정신의 관을 들락거린 메르시오라든가, 초인만 보면 눈이 뒤집힐 정도로 혐오하는 존 워스, 그리고 혼돈의 파편에 단체로 광전사가 되어 버린 초인들의 모습 같은 것 말이다.

“부디 솔직한 대답을 바라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뒤에 계신 검후님이 무서워서라도 그리는 못합니다. 곤란하다면 차라리 답을 않겠습니다.”

불길한 느낌은 벌써 잊은 듯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하는 라울이다.

이드는 과연 그 낯짝이 얼마나 갈지 짐작해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묻지. 그대는, 아니, 바벨에서는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소?”

“혼돈의 파편입니까. 음……..”

라울은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이드가 궁금해하는 게 당연히 바벨이나 미완의 마탑, 혹은 삼검왕에 대한 정보일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대답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글쎄요. 저희 쪽에서는 딱히 답해 드릴 만한 입장이란 것이 없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출현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다른 나라와 같이 탐색. 단계라고 할까요?”

“그럼 이전까지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물론입니다.”

짧게 나온 즉답.

간단하게 진위 확인도 했다. 평온한 호흡과 눈동자. 고요한 초인력과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조합해 보면 확실하다.

“듣기로 검후님께 죄를 지은 이유가 버서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그 질문에 검후를 돌아본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죄인 줄 알지만 수많은 초인을 위해 나서야 했지요. 지금도 검후님의 도움을 바라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명예 후작님께서도 도와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와중에 자신에게 손까지 내민다. 넉살도 좋지.

이드는 그런 라울의 모습에 검후가 감금된 동안 그를 상대하며 얼마나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지 대략 짐작이 갔다.

하긴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인물이니 찾아오면 만나 보겠다고 결정한 걸지도?

“그건 차후에 검후님이 결정하실 문제고. 그렇게 신경을 썼다면 당연히 버서커에 대한 자료도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그들의 모든 정보가 있지요. 명예 후작께서 어떤 이유로 관심을 가지시는지 모르겠지만, 소용없으실 겁니다. 저희도 오랜 시간 노력했지만, 이들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개인 정보가 아니오. 초인들이 언제, 어디서 버서커가 되었는지, 그 위치에 대한 자료를 원하오.

그 말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라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묘한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더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역시 가지고 있기는 하지요. 그렇지만 버서커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가 아닙니다.”

“알고 있소.”

자신이 본 게 맞는다면, 특정 ‘지역’이 아니라 혼돈의 파편을 만났을 ‘때’일 테니까.

“그럼 어째서…….”

저택에 발을 들인 후 여유로운 웃음을 지우지 않던 라울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 대신 의문이 가득 찼다.

또 그 한 편으로는 초조함도 양념처럼 뿌려져 있었다. 이드가 계속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찔러 댔기 때문이다.

“”일단 바벨이 가진 위치 정보를 공유해 주길 바라오.”

……가능합니다. 단, 이유를 알려 주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아무래도 명예 후작께선 버서커에 대한 어떤 단서를 가지신 듯한데. 그렇다면 저희도 꼭 알아야겠습니다.”

“그럼 내 질문을 요구 조건 중 하나로 사용하신다는 검후님의 말씀은?”

“당연히 없던 것으로 합니다. 오히려 명예 후작님께서 찾으신 단서가 진짜라면 그 계산은 확실히 할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바벨에서 책정하고 있는 포상금도 지급될 겁니다.”

조금 전 하나라도 덜 주기 위해 검후와 설전을 벌이던 것과 달리, 손익에 대한 계산이 철저한 모습을 보이는 라울이었다.

사실 그럴 만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초인의 탄생부터 함께했다고 할 수 있는 버서커를 해결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바벨에선 수많은 인원과 자금을 쓰고도 아무 단서도 얻지 못했는데.

당장 라울 뒤로 물러났던 발터와 시사이판만 해도 그렇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이드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바벨이 이 문제에 대해 포상금을 걸어 뒀을 줄이야. 그만큼 간절하다는 표현이겠지만,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인 모양이다. 무표정을 유지 중이던 스폴의 혓바닥이 자동으로 움직여 버렸다.

“포상금의 규모는 어떻습니까?”

순간이드를 포함한 좌중의 모든 눈이 묘한 감정을 담아 그녀를 향했다.

“모두,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스폴은 그들이 알던 것보다 뻔뻔했다. 하긴 이미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으면 차라리 당당할 때가 덜 쪽팔리긴 하니까.

“크흠. 단서의 가치에 따라 다르지만, 포상금은 최대 오백만 골드와 바벨이 보유한 SS급 아티팩트 하나. 그리고 2년간 이루어지는 바벨의 전폭적인 지원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포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히 액수로만 따져도 그렇다.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SS급 아티팩트의 경우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으며, 바벨의 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이런 이유로 바벨 내부에는 오로지 버서커를 해결하는 단서를 찾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드 역시 관심이 갔다.

돈이나 아티팩트는 관심이 없었다. 많을수록 좋기는 하지만, 장담하는데 바벨이 가진 전 재산보다 라미아의 아공간에 든 이드의 재산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그보다 바벨의 전폭적인 지원 쪽에 관심이 갔다. 그들을 부하로 부리지는 못하겠지만, 전 대륙에 혈관처럼 뻗어 있는 바벨의 힘을 빌리면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도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거 관심이 가는군요.”

“그럼 위치 정보를 원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전에 하나 묻지요. 바벨에서 삼검왕에 대해서도 뒤를 파고 있겠지요?”

“그게 관계가 있습니까?”

앞서와 달리 즉답을 피하는 라울이다. 아무래도 검후 앞에서 말하려니 눈치가 보이는 것일까.

이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울이 쩝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중요 인물이니까요. 기본적인 조사는 모두 하고 있습니다.”

“그중 존 워스의 행적에 대해서 라울……”

“자작으로 불러 주십시오.”

“라울 자작이 아는 것은 있소?”

“삼검왕의 행적이라면 모두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그 대답에 이번엔 이드가 놀랐다.

어지간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행적 자체를 기억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특정 기간을 한정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삼검왕의 행적을 안다는 건 최소 그와 동급의 중요 인사의 행정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과연 저게 단순히 머리가 좋은 건지, 아니면 초인기의 일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단한 능력이라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걸 다 기억하다니 놀랍구려. 그럼 말이오. 존 워스의 행적과 버서커의 행적을 겹쳐 보시오.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중 중복되는 정보가 있을 거요.”

이드의 말에 라울은 물론 발터와 시사이판의 표정도 굳어졌다.

딱 ‘이거다’ 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 이드의 말은 존 워스가 나타나면 초인들이 버서커가 된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들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랬다면 벌써 난리가 났어도 큰 난리가 났어야 했다. 무엇보다 존 워스가 초인과 같은 공간에 있던 적이 한두 번인가.

그가 초인을 싫어하긴 해도 세상 모든 초인을 피할 수는 없고, 모든 행사에 불참할 수는 없다. 당장 발터만 해도 황궁과 소드 팰러스의 행사에서 존 워스를 마주한 것이 열 번이 넘는다.

그러나 납득하지 못하는 건 둘째.

일단 이드가 질문을 한 이상 답은 해야 한다. 라울의 머릿속에 버서커가 발생한 위치와 일시, 그리고 존 워스의 지난 행적과 일시가 동시에 나열되며 교차되었다.

“허허…… 미친…….”

그렇게 나온 결과에 라울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몇 곳…… 인가?”

라울의 반응을 이해한 발터가 미묘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런 그의 눈은 라울이 아닌 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드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런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뿌드드득.

분노였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과 바벨에.

또 그렇지 않아도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를 존 워스가 초인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는 사실에.

“여덟. 정확히 여덟 개의 버서커 발생이 존 워스의 행적과 겹쳐. 물론 그중에는 존 워스가 그 장소에 있는 것이 당연한 때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많아.”

보통 세 번이나 만나면 인연이라고 한다.

이 넓은 대륙 어디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를 버서커와 여덟 번이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

그건 바벨에서 버서커 해결을 위해 전문적으로 조직된 팀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즉, 여덟이란 우연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넘었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리고 그게 이드의 말의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 안 됩니다. 존 워스가 도대체 버서커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그 전에 버서커의 위치 정보에 대한 공유는?”

“드리죠. 바벨이 보유한 모든 위치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하나도 빠짐 없이!”

이드는 라울의 확답에 만족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혼돈의 파편과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 지금도 그들을 찾고 있기도 하고, 라울 자작도 정신의 관에서 내가 혼돈의 파편 중 하나와 싸운 것을 알 거요.

“그래서요?”

“그때 우연히 봤소. 혼돈의 파편이 존 워스를 보호하는 것과 초인들이 혼돈의 파편을 보고 미쳐 버리는 모습을 말이오. 발터 백작께서도 기억하고 있을 거요.”

“・・・・그때 그것이?”

이드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발터가 당시를 떠올리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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