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29화
1064화
발터는 놀람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당시 그는 버서커가 되기 직전이었다. 버티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감각은 희미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선명하게 당시를 기억했다.
정신을 잃은 존 워스를 삼켜 버린 커다란 주둥이.
곧이어 본체를 드러낸 메르시오를 보고 폭주를 시작하는 기사들, 그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충동에 이성을 잃고 비틀거리던 자신의 모습까지. 심지어 그 순간에는 메르시오를 폭주의 이유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각이 정확했었던 거였어.’
하지만 사건이 끝나고 그때를 돌이켰을 때, 발터는 자신의 판단을 뒤집고 우연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건 아마도 사건 당시와 이후의 감각이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데 지금 이드는 그때 느낌이 옳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발터는 아쉽고 아쉬웠다. 좀 더 확신이 있었다면.
“그게…… 착각이나 우연이 아니었군요.”
“무슨 말인가?”
라울의 눈빛이 발터를 향했다. 이드와 발터 사이에 오가는 말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달하려 했네. 그러기 위해 지금 칸이 정리 중이고,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세.”
“…..알았네. 하아. 그나저나 아깝군.”
겨우 아쉬움을 삼켰지만, 입안이 쓴 라울이었다.
발터의 반응으로 봐서 확신은 하지 못한 것 같지만, 어쨌든 이쪽에서도 같은 정보를 들고 있었다는 소리지 않은가. 그래서 아쉬웠다. 보고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이드에게 굽힐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이거 참……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저희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정보였을 줄이야.”
이드는 아쉬움에 몸을 떠는 라울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는 이제는 라울의 얼굴에서 사라진 웃음과 비슷했다.
“내가 운이 좋은 편이오. 그런데, 설마 그렇다고 포상금이 없어지는 건 아닐 테지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정보 수집의 첫 번째 요소가 신속성이니까요. 그러니 일단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그러니까, 해 주신 말씀을 종합하면 두 가지군요. 첫째, 버서커는 혼돈의 파편 때문에 발생한다. 둘째, 존 워스는 혼돈의 파편과 매우 관계가 깊다.”
“맞소.”
라울이 오기 전, 이드는 바벨에 어느 정도까지 정보를 제공할지 고민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에 따라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과 초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존 워스와 메르시오를 떠올려 보면, 그들이 초인을 경계하는 것은 분명했다. 동시에 초인은 혼돈의 파편을 보면 미쳐 버린다.
혼돈의 파편 쪽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니지만, 일단 초인의 모습만 봐도 이건 공존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초인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바벨에, 둘의 관계를 알리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 전력을 다해서 혼돈의 파편에 대해 파고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이후 조사된 내용을 받아 볼 수 있다면 이드의 고생은 확실히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게 분명했다.
지금까진 하나의 나라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는데, 단번에 전 대륙으로 범위가 확대되니 말이다. 그야말로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결정을 내리기 힘든 정보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존 워스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이가 바로 검후였다.
혼돈의 파편과 초인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어차피 존 워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제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요.”
모든 이야기를 들은 검후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나마 드러난 귓불이 분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외부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혼돈의 파편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경계하던 적이었다. 특히 드래곤 로드의 마지막 방문 이후에는 더욱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경계하던 혼돈의 파편 중 하나가 바로 옆에 있었고, 자신이 그런 혼돈의 파편에게 열심히 무공까지 가르쳤다니. 충격이 큰 건 너무나 당연했다.
“이드 님. 다른 놈들은 몰라도 존 워스의 목은 꼭 제가 잘라야겠으니, 양보해 주세요.”
겨우 충격을 추스른 검후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이드는 어지간히도 분했겠나 싶어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 검후와 의논한 끝에 나온 결과가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이라는 사실만은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굳이 그걸 알리지 않아도, 이드 님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받으면 바벨에선 총력을 다할 거에요. 그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우리도 비장의 수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아요.”
뭔가 노련미를 풀풀 풍기는 검후의 말에 이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순간의 검후는 한 세기 동안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온 철혈의 여왕이 분명했다.
그때 모습이 떠오른 이드가 슬쩍 검후를 돌아보았다.
그런 이드를 향해 라울이 물었다.
“혹시 다른 추가 정보는 없습니까?”
“은색 기사단 중에 생명의 관에서 메르시오의 공격을 받은 기사가 있소. 원한다면 대면하게 해 주겠소.”
“……부탁드리죠.”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했다. 일이 일이다 보니 최대한 신중하려는 것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준비하고 있던 카렌이 나서서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그 뒤를 이어 이드가 마탑의 탑주를 통해 확인했던 내용도 공개했다.
“과연. 이 정도면 충분하군요. 물론 저희 쪽에서도 확인 작업을 하겠지만, 명예 후작께서 굳이 이런 문제로 저희를 속일 이유가 없으시겠지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내가 원하는 것은 혼돈의 파편의 제거요. 이번 일을 통해 바벨의 협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혹시 그 협조가 잘 되면 검후께서 저희를 용서하실까요?”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어깨를 으쓱이는 이드의 뒤로 검후가 입을 열었다.
“그 공로를 인정해 주지. 존 워스의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 전까지, 혼돈의 파편에 대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다면 말이다. 물론 그냥 넘어가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하하하. 그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약속드리지요. 검후께서 만족하실 결과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라울은 원하던 것을 모두 얻어 낸 듯 기쁜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이야기가 끝이 났으니 돌아가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아직 이번 일에 대한 조율이 끝나지 않았지 않나. 그건 마저 끝내고 가야지.”
특히 이드의 질문에 대한 답은 조건에 들지 않는 것이 되었지 않던가.
“끙. 제가 잠깐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죠.’
아무렴 라울이 그걸 깜빡했을까. 슬쩍 넘어가려다 딱 걸려 버렸다.
라울은 어쩔 수 없이 진땀을 흘리며 검후를 상대해야 했다.
쉽게 끝나지 않는 두 사람의 설전은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 사이 이드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시작했다. 멀뚱히 선 시사이판을 잡아 그의 초인기를 확인하고, 직접 체험까지 해 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 접하는 독특한 수법이었는데,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네?”
그리고 이를 통해 무공에 응용할 영감까지 얻은 이드는 매우 만족해했고, 자랑하는 초인기가 눈앞에서 해체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 시사이판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협상을 마무리한 두 사람의 설전이 끝나 있었다.
원하던 것을 얻어 낸 검후나 예상보다 지출이 적었던 라울이나 나름대로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런 검후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돌아가는 세 사람을 배웅하는 은색 기사단에게서 더 이상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저택을 떠났다.
창을 통해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가 돌아섰다.
그러자 기사들이 의자뿐인 텅 빈 방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몸뚱이보다 큰 가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하인들이라면 몇 명이 달라붙어 끙끙거렸을, 무겁고 큰 목제 가구들 말이다. 라울들을 만나기 위해 방을 치웠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것인데.
“그 장식장은 저쪽・・・・・・ 아니, 이쪽이었나?”
아무래도 가구들이 있던 자리가 헷갈리는 모양이다.
이드는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검후를 찾았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 중인 듯, 앉은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나름 만족할 만한 협상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이드의 말에 정신이 든 듯 검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협상은 만족스러웠어요. 다만, 존 워스와 혼돈의 파편이 노리는 게 뭘까 싶어서요.”
“어느 쪽이든 우리로서는 절대 좋지 않은 그런 걸 바라고 있겠지.”
이드는 겨우 제자리를 찾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한데 이드 님은 의외로 고민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지 않는 거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고민도, 봐. 뭔가 추측을 하려면 단서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적잖아.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있다가 핵심적인 단서들이 나오면 그때 최선을 다해 움직이면 돼.”
“그럴까요?”
아무래도 검후는 혼돈의 파편 존 워스에 본인이 무공을 가르치고 키웠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이드는 툴툴 털고 일어났다.
“당연하지.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자고. 넌 오늘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까.”
그렇게 접객실 밖으로 검후의 등을 밀어낼 때였다.
뒤에서 턱 하니 이드의 손을 잡는 손이 있었다.
“스폴 경?”
“검후님은 충분히 일하셨으니, 이드 님이 저희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직 가구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고요. 레이디들이 힘든 모습을 그냥 보고 넘기시진 않으시겠죠?”
“레이디가 아니고 기사라며?”
언젠가 스폴이 했던 말을 입에 올리는 이드였다.
“어머나. 그거야 제 마음이죠. 설마 거절하시는 건 아니죠?”
왜 저 가늘어진 눈이 거절하는 순간 당신은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 같을까?
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따라 돌아서야 했다.
아무래도 방으로 돌아가 쉬는 건 조금 늦을 것 같다.
“주인님. 검왕님께서 편지를 전해 오셨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하얀색의 편지가 올려진 은 접시를 들어 올렸다.
“흐흐. 그 엉덩이 무거운 검왕도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군. 먼저 연락까지 하는 걸 보면.
라울의 말을 뒤로하고 발터가 봉투를 뜯어 안에 든 편지를 꺼내 들었다.
길지 않은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린 그는 말없이 편지를 라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어쩌는게 좋겠나?”
“우리야 이제 급할 것 없잖아. 그리고 우리가 방금 다녀온 것처럼, 원래 아쉬운 쪽이 먼저 움직이는 거야. 무시하고 쉬자고. 하하하.”
라울이 팔랑거리는 편지.
거기엔 오늘 밤 발터를 저택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