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30화
1065화
라울이 돌아가고 이틀이 지났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흥에 취한 사람들의 열기는 여전했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내일부터 시작될 일상을 준비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던 저택에서는 이드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서재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가볍게 점심을 먹은 후라 더 나른한 것 같다.
은색 기사단과 검후는 식사만 함께하고는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집사는 이드에게 손님의 방문을 알려 왔다.
“누구라고?”
“발터 백작님의 부관이라고 밝히신 분입니다. 약속한 물건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하셨습니다.”
발터의 부관이라면 칸이라는 남자일 거다. 이드는 기억에 있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의문을 표시했다.
“그쪽에서 받기로 한 물건은 없을 텐데.”
“돌려보낼까요?”
무려 제국 실세 중 하나인 발터의 명령으로 온 칸임에도 집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현재 그의 임시 주인은 검후와 명예 후작으로, 발터 이상 가는 대단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집사란 본래 모시는 주인에 따라 그 행동이 바뀐다. 간단히 말해 호가호위라고 할까?
물론 주인을 믿고 위세를 부린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주인의 권위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건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얼마나 중요하면 집사가 되기 위한 전문 교육 과정 중에 주인의 위치를 바르게 인식하는 법이 있을 정도일까.
즉, 방금 돌려보낼지를 묻는 집사의 질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기에 검후와 발터의 관계를 들어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가차 없었다. 집사 역시 여느 제국 사람들처럼 검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만나 보지. 그는 어디에 있나?”
“1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접객실로 안내하려 했지만, 거부하셨습니다.”
“이리로 안내해 주게.”
“차도 준비할까요.”
“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집사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방문을 나섰다. 잠시 후, 칸을 서재로 안내한 집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애써 긴장을 삼킨 칸이 정중히 인사했다.
“명예 후작님과 두 분 후작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청색 깃털 기사단에서 발터 단장님을 모시고 있는 칸이라고 합니다.”
“경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대체 무얼 가져왔다는 건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드의 말에 칸이 들고 있던 가죽으로 된 서류 가방을 열어, 여섯 개의 봉투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이드가 봉투 하나를 열어 보니 그 안에는 두툼한 서류가 들어 있었다.
곧 칸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봉투 안에 든 서류는 저택의 소유 증명서입니다.”
“소유 증명서? 여섯 개 모두가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재 머물고 있으신 이곳을 둘러싼 여섯 개 저택에 대한 겁니다.”
이드는 들고 있던 봉투와 나머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현재 이드가 머무는 카일란 소유의 이 저택은 안티로스에서도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곳 중 한 군데에 자리했다. 당연히 집값이 무시무시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한미한 남작 가문의 영지보다 비싸다고 하면 되려나? 한데, 그런 저택이 무려 여섯이다.
다 팔면 분명 자작 영지를 사고도 남을 만한 액수일 것이다.
하나 이게 어디 돈이 중요한 일인가. 정말 대단한 건 이틀이란 짧은 시간에 그 비싼 저택을 사버린 수단이지.
특히 이 주변에 저택을 소유한 자들은 모두 한가락씩은 하는 권력자들이 대부분이다. 당장 이 저택의 주인인 카일란을 봐도 그렇고 말이다. 단순히 돈을 더 준다고 쉽게 팔 사람들이 아닌데, 이틀 만에 여섯 명이나 꼬드겨서 전부 사 버리다니.
“능력이 좋은 건 알겠는데. 이걸 이리 들고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아무렴 자랑하려는 건 아닐 테고.
“라울 님께서는 약속의 이행이라고 하셨습니다. 검후.
“과연. 그쪽의 약속인가.”
확실히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님의 비밀을 지키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라고.”
비록 몰래 숨어들어 와 저택 안에서만 머물고 있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안심하긴 힘들다. 라울만 해도 너무 쉽게 찾아내지 않았던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항상 통하는 건 아니었다.
해서 바벨, 정확히는 발터의 협조를 받고자 내건 조건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이 여섯 장의 소유 증명서였다. 일단 저택을 가장 가까이서 살필 수 있는 주변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사가 갑자기 두 집이나 이사 갔다는 얘기를 했었지.’
원래 그런 자질구레한 보고까진 잘 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검후와 이드가 은밀하게 머무는 중인 만큼 주변의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 이사가 알고 보니 검후가 내건 조건 때문이었단다. 칸이 제때 알려오지 않았다면 이드라도 검은 돌을 시켜 알아봤을 법하긴 했다.
“적극적인 협조에는 감사를 표하지. 그것 때문이라면 굳이 이렇게 소유 증명서까지 보일 필요는 없네.”
“받아 주십시오. 이 소유 증명서는 두 분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드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이 선물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절할 필요 없겠군. 용무는 이게 끝인가?”
“아닙니다. 더불어 전해 드려야 할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중요한 사안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리한 것이다.
그에 이드는 그의 진짜 방문 목적이 소유 증명서의 전달이 아닌, 이쪽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 페시딘에 관한 건가?”
그 말에 어떻게 알았냐는 듯 칸의 눈이 커졌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칸의 말에 따르면 그들 측에서는 검후를 방문한 그날 밤에 날아온 초대장을 포함해서, 페시딘 쪽에서 요청한 세 번의 초대를 전부 무시했다고 한다.
파티에 참석할 때도 얼굴만 비추는 방식으로 페시딘과의 접촉을 피했고. 그런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이드는 무시당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을 페시딘을 생각하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무려 검왕이 차였으니, 제법 약이 오르겠어. 그런데, 굳이 그렇게 만남을 피하는 이유가 있나?”
“……원래 아쉬운 쪽에서 나서는 거라고, 우리가 먼저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라울 자작의 말이겠군?”
슬그머니 이드의 시선을 피하는 칸의 귀가 붉다. 라울의 주장이 유치하다고 여겨서인 것 같았다.
하나 그와 달리 이드는 라울의 주장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았다.
라울과 검왕의 대화는 검후 때보다 몇 배는 더 살벌할 것이 뻔했다.
말뜻 그대로 설전, 입으로 시작된 싸움이 언제든 칼을 뽑아 드는 상황으로까지 번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자리라면 만나기 전부터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라울은 검후와 거래를 끝낸 뒤다.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라는 거다.
지금은 오히려 페시딘이 쓸데없는 자존심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아마 검후에게 이 사실을 전해 주면 냉소하면서도 재미있어할 것이다.
“지금 팝콘을 뜯으면 딱일 것 같은데, 그렇죠?”
일리나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미아의 말이었다.
와장창!
“이 빌어먹을 잡것들이 도대체 뭘 하자는 거야!”
장식으로 사용하던 공예품을 던져 깨 버린 페시딘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을 수 없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몇 번이나 초대장을 보냈음에도 무시당한 그는 결국 직접 발걸음을 옮겼었다. 다름 아닌 오늘이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방문한 발터의 저택은 비어 있었다는 점이다. 발터는커녕 하인이나 집사조차 없었다.
어둠에 잠긴 저택이 여태 무시당한 초대장과 겹치자 페시딘은 자신이 조롱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마음 같아선 눈앞의 저택을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가 검왕이라도 수도 한가운데에서 그럴 순 없었다.
해서 겨우 분을 참고 돌아왔다. 그러나 분노한 마음 한편, 납득이 가지 않는 발터의 대응에 의혹이 가득 찼다.
“협의를 하건 말건 한 번은 대면을 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게 몇 가지 물건을 더 부순 후에야 속이 좀 후련해진 페시딘은 의자에 앉아 냉수로 속을 달랬다. 그는 한결 차분해진 가슴으로 상황을 돌이켜 봤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지금 이 대응이 발터에 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발터라면 이런 구질구질한 짓거리는 하지 않아. 라울인가. 설마 그자가 안티로스에 와 있는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존 워스를 날려 버릴 수 있다면, 바벨의 핵심 인물이 나설 이유로는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라울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그의 의견을 전달할 방법은 많다.
좌우간 발터가 라울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그에 대응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마탑의 일로 라울과 이런저런 협의가 필요했던 페시딘인 만큼, 그의 실력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대장만 받아 챙긴 건 그저 시간 끌기용인가. 어떤 조건을 건든 그와 상관없이 존 워스의 건을 터트리겠다는 거지.”
그제야 발터를 앞세운 바벨의 의지가 읽히는 페시딘이었다.
설마 이렇게 이빨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페시딘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이 단호한 결단이 자신과 소드 팰러스를 향한 공격인지, 아니면 그간 초인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해 온 존 워스에 대한 증오와 복수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쪽인들 무슨 상관인가.
퐁.
페시딘은 잔에 술을 따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인정해야겠군. 확실히 당황스러웠어. 아마 맥없이 당했을지도 모르겠군. 존의 정보가 없었다면 말이지.”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후끈한 느낌. 그것에 집중한 페시딘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비릿한 살기가 입꼬리에 매달렸다.
“과연 어느 쪽의 더 많이 준비했을까? 어디, 판 한번 뒤집어 보지.”
그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 냈다.
내일이 기대되었다. 대전이라면 아무리 발터라 해도 더 이상 자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피해도 상관없다. 검왕으로 불린 이후 그는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이번 일도 언제나처럼 이길 것이다.
날이 밝았다.
축제가 끝난 후 황궁에서 열리는 첫 대전 회의를 위해 대신들이 모여들었다.
어지간하면 빠지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 오늘은 의아하리만치 단 한 사람도 그런 이가 없었다.
심지어는 축제를 이유로 모여든 귀족들조차 떠나지 않고 황궁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오늘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끌시끌.
“이거 발터 백작이…….”
“긁어 부스럼이 아닌….”
빼곡한 대신들로 인해 대전 앞이 시장처럼 소란스럽다.
성향에 따라 각기 자리한 그들은 각자 기대와 우려를 품고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이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소란이 순식간에 잦아들며,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거기에는 오늘 터질 폭탄의 도화선 둘이 마치 운명처럼 마주 서 있었다.
딱 봐도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꿀꺽.
긴장감에 누군가 침을 꿀떡 삼켰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여기서 한판 하는 건 아니겠지?”
“모르지요. 들리기로는 발터 단장이 만나 주지 않아 사전 조율도 못 해 봤다니까요.”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허~ 왜 말립니까? 저 두 분의 이런 모습을 지금 아니면 언제 보겠습니까?”
그렇게 흥미와 우려 등을 담은 사람들 속에서 드디어 페시딘이 입을 열었다.
“…….”
뒤이어 발터도 말했다.
“…….”
그런데 두 사람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 주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만 들리는데 말이다.
분명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한 것이리라.
순간 누군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마음을 대신해 말했다.
“이런 젠장. 그 나이 먹고 무슨 비밀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