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51화
1086화
초인들이 치열하게 피 흘리며 적을 막고 있는 어느 방어선 안쪽.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머리 위를 태연하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도 오만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면서.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했다.
그런 그도 난간에 걸터앉은 이드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언제 대륙에 저렇게 제대로 된 은신술이 나왔지? 대단하잖아!”
이드는 근육 덩치의 싸움을 지켜보던 때 이상으로 흥미가 돌았다.
당연하지만, 방법이 다를 뿐 그레센에도 은신술은 존재한다. 방법에 대해 따지면 되레 중원보다 훨씬 다양하니 그 자체에 놀랄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드가 신기해하는 까닭은 느긋하게 저택으로 향하는 자가 은신하는 데 무공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보세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런 이드에 라미아가 답답했는지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였다. 언제 움직였는지 이드의 두 손가락이 얌전히 하라는 듯 라미아의 부리를 잡아 눌렀다가 뗐다.
“쉿, 저기 용사 하나가 고민 중이시잖아.”
“용사는 무슨.. 겁나서 꼼짝도 못 하는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땅이었다. 정확히는 은신술을 쓰는 남자의 동선상에 있는 땅속.
전투의 여파에 두들겨 맞은 듯 움푹 꺼져 있었지만, 이드와 라미아의 눈에는 보였다. 땅과 동화된 채로 그 아래 숨어 있는 초인이 말이다. 라미아의 말처럼 현재 그는 두려움에 넘길 것도 없는 마른침을 연신 삼키는 중이었다.
‘저 새끼도 명예 후작급 같은데…………. 나보고 어쩌라고, 젠장!’
그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아차린 건 순전히 운이었다.
이틀 연속 방문으로 자신들을 괴롭게 한 이드라는 계기가 있었고, 거기에 전투라는 극도의 긴장 상태가 더해져 저자를 보게 만든 것이다. 문제는 저자를 봄으로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임무는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한 기습.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그에게 상대의 강함을 알 재주 같은 건 없지만, 운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은신술 하나로도 답은 나온 셈이나 마찬가지다.
‘어쩌지? 공격해 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은데. 나가면 한 방에 죽겠지? 어차피 소용없는 거 그냥 이대로 있을까?’
두려움에 잡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그의 몸은 착실히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가 위치에 들어서는 순간 움직이기 위해서. 변명 가득한 머리와 달리, 그의 가슴은 동료를 버리는 비겁자가 될 생각이 없던 것이다.
죽음을 알면서도 최소한 동료들에게 적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나서려는 그는 충분히 용사로 불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목표가 공격권 안에 발을 들였다.
스르륵.
‘지금!’
섬뜩한 존재감이 손끝에 걸리는 순간 잡생각을 날려 버린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만히.
그 순간 이드가 그를 말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막 꿈틀대던 기세가 그대로 멈췄다. 돌처럼 굳어 버린 초인에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드가 말을 이었다.
-좋아, 그대로 움직이지 마라. 내가 누군지 알지?
‘…….’
초인의 눈이 또르륵 구른다. 움직이지 말라 해놓고 물으면 어찌 답하라는 거냐는 듯싶다.
그럼에도 얼굴에 불쾌함은커녕 반가움이 가득하다.
사실 흙에 동화된 몸이라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일단 기색이 그랬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소리를 내지 않고 느릿하게 움직인다.
-도와줄 거냐고? 글쎄.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아서. 일단 적을 잘 대비할까 궁금해서 다시 돌아오긴 했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잘 막고 있잖아.
‘…….’
-아니라고? 그런 말은 저 튼튼한 방어선이 무너지거든 말하든가 하지? 그보다 그만 숨을 멈춰. 놈이 네 바로 머리 위에 있으니까.
“!!”
-내가 말린 걸 보면 알겠지만. 저 남자, 이미 네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런 이드의 경고가 끝나는 순간.
초인이 숨은 곳을 지나던 남자의 눈동자가 돌연 뱀의 혓바닥처럼 땅을 훑었다
그 눈빛이 마치 흙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
“풋, 비겁한 놈. 딱 내 취향이군.”
주르륵.
음성의 고저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초인의 온몸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 빌어먹을. 명예 후작의 말이 옳았어.’
그는 어느새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니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완벽한 오판이다. 나가서 공격하면 죽을 거라고? 틀렸다. 공격을 위해 초인기를 발동한 그 순간에 죽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라는 말처럼.
동료들에게 저자의 존재를 알린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후회나 걱정은 없다. 그는 급히 입을 뻐끔거렸다.
‘제발 봐주십시오. 아직 보고 있는 거 맞지요?’
-도와 달라고? 저놈을 막아 달라는 거야?
‘맞습니다. 안에 라울 님이 계십니다. 막아야 합니다.’
-네가 지금 라울을 걱정할 때냐? 게다가 난 어디까지나 구경꾼이라고.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넌 바벨에 있으면서도 라울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그냥 얌전히 보고나 있어.
‘아니, 그래도요! 같은 편이지 않습니까!’
초인이 급히 입을 놀리지만, 이미 이드는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어차피 그가 애원하지 않아도 정말 나서야 할 상황이 된다면 개입할 생각이었다.
지금 라울이 사라지면 이드 쪽도 여러 가지로 곤란해지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당장 바벨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 발터가 꺼내 든 존 워스의 문제도 처리하기 곤란해진다.
“하지만 나설 때 나서더라도 라울의 실력은 구경 좀 해야지.”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 능구렁이 같은 작자의 실력을 언제 보겠어요?”
“그러니까.”
이드는 라미아의 턱 아래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장 돌아가는 척하다 돌아온 이유 자체가 양측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순수하게 바벨 측을 지원할 생각이라면 벌써 나섰을 거다. 지금처럼 방어선을 지키다 쓰러지는 사상자들이 나오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도와줄 의리는 없거든.”
먼저 도와 달라고 붙잡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사이 정원을 가로지른 남자가 저택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 한 창문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뻗어 둥근 원을 그렸고.
틱.
딱 그 크기의 원형으로 잘린 창문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남자가 뚫린 창을 통해 저택 안으로 훌쩍 몸을 들이밀었다.
“원견 마법으로 쫓아가 볼까요?”
그 모습을 본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겠어. 라울도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닌 거 같고, 불청객인 만큼 곧 쫓겨 나오겠지.”
이드가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느꼈기 때문이다. 창문을 도려내고 남자가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하나의 초인기가 급격히 진한 느낌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기운의 생김새가, 갈무리되었던 기운을 깨우는 형태와는 좀 다르다는 부분일까?
‘이게 라울의 초인기인 건가? 그런데・・・・・・ 그렇다기에 이 기색은 그와 좀 다른 것 같은데?”
자신의 착각일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 라울의 기운이 변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던 때였다.
돌연 지진이 난 듯 건물이 떨렸다.
쿠구구구궁!!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은 사절입니다. 당장 사라지세요!”
콰콰콰콰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저택 내부에서 화산 같이 거대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얼마나 거센지, 난간에 앉은 이드의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거릴 정도였다.
콰쾅!
직후 정문이 부서지듯 활짝 열리고, 그곳을 통해 한 남자가 돌멩이처럼 구르며 튕겨 나왔다.
바닥에 닿기 전 중심을 잡고 일어선 그는 조금 전 창문을 통해 저택으로 침입한 바로 그 남자였다.
다만 들어갈 때와 달리 지금 그의 꼴은 결코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게 뒤로 넘겼던 머리가 흐트러진 것은 둘째 치고, 얼굴에는 재로 보이는 검댕이 묻었다. 옷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 것이, 제법 낭패를 본 듯하다.
“빌어먹을 계집년이 감히 이 몸을 조롱하다니!”
부득부득 이를 갈며 문 안을 노려보는 남자에게서는 숨 막힐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폭사된 강렬한 살기에, 정신없이 싸우던 양측의 시선이 일순간 그를 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이드와 라미아는 다른 부분에서 놀라고 있었다.
“계집? 그럼 역시나 라울이 나선 게 아닌 건가?”
“아까 목소리도 여자의 것이긴 했는데 누굴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의문을 가진 사이.
쉬쉬쉬쉭~
뱀이 위협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뿌연 검강이 정문 안으로 쏘아졌다. 손수건을 꺼내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 낸 남자가 내보낸 것이었다. 저택에 커다란 구멍을 낼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이지만, 구멍은커녕 폭발도 없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다니,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군요.”
대신 들려온 목소리.
“어째 귀에 익은데. 설마 퍼블?”
이드는 스스로 꺼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분명 퍼블이지만, 이드가 파악한 그녀에겐 저 남자를 저택 밖으로 쫓아내고, 검강을 막아 낼 정도의 힘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혹시 착각이 아닐까 싶지만, 그런 의문에 못을 박듯 저택에서 달려 나오는 인형이 있었다.
익숙한 메이드복에, 싸움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빗자루를 든 여성은 분명 퍼블이었다.
“저주받을 사생아들 따위가!”
남자는 그 모습에 손수건을 던져 버리고는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다시금 검강을 날렸다.
짙은 회색의 검강에는 방어선의 일각을 단숨에 무너트릴 만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드가 파악한 퍼블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위력.
“먼지는 털어 버려야 합니다.”
한데 그 앞에 선 퍼블의 대응은 상당히 맥 빠지는 것이었다.
먼지가 있을 때 터는 건 옳은 얘기지만, 눈앞의 것은 먼지가 아니라 검강인데?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퍽 퍽. 퍼서석!
정말 먼지를 털 듯 휘두르는 빗자루에 회색 검강이 산산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거기에 웬만한 고수 못지않게 빠르게 허공을 휘젓는 빗자루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감히 내 검강을 먼지 따위로 취급해!”
“털어 낸 먼지는 쓸어 내야 합니다!”
심상치 않은 빗자루질보다 다른 곳에 화를 내는 남자.
그를 무시한 퍼블이 허공을 휘젓던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그러자 그 앞에 순식간에 검은 기운이 뭉치며 남자를 향해 미끄러지듯 밀려갔다. 남자는 말과 달리 퍼블의 공격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초인기가 얼마나 기상천외한지 직접 경험한 덕에 잘 알기 때문이다. 남자는 방어보다는 회피를 선택하며 오히려 퍼블과의 거리를 좁혔다. 예측할 수 없는 초인기지만, 어차피 근접전에 들어가면 무공을 익힌 자신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진 직후.
쿠쿠쿠쿠쿠
굉장하지만, 기묘한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