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53화
1088화
이런저런 사건이 많은 하루였다.
그간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 중 지금보다 놀란 적은 없다. 개중 가장 신기했던 퍼블의 ‘청소’도 이리 당혹스럽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마나를 교란시킬 정도로 바삐 뛰어다닌 것도 아니고, 반대로 기운이 날뛰는 전장 가운데 있어 기살이 흔들린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이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가 문제였던 걸까?”
“그건 나중에 따지고, 어떻게 해요? 계속 저대로 둬요? 아님, 떠요?”
혹시 라울의 비서 중에 기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인기를 가진 비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합리적인 의심을 세우던 이드는 라미아의 재촉에 비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모습. 들라고 할 때까지 그대로 있을 생각인 것 같다.
사실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대로 무시하는 방법도 있다. 라울이 알고 있다 해도, 어차피 서로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불협화음이 모여 일이 어긋나는 법이니, 갈등이 빚어질 것 같은 경우는 가능한 피하는 것이 좋다.
또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굳이 먼저 떠날 생각은 없다.
이미 이쪽이 주도권을 잡아 끝을 낼 수 있는 상황에, 라울이 자신을 찾아 어떤 부탁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드는 기살을 거두었다.
안과 밖을 나누던 의식 공간이 사라지자 내외의 공기가 섞이며 비릿한 혈향이 코가 아릴 정도로 전해져 왔다.
“인사는 충분하니, 고개를 드세요.”
“감사합니다.”
“라울이 전한 말이 무언지 들어 봅시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울 님께서는 명예 후작님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도움이라…….”
이드는 보란 듯 검사와 싸우고 있는 퍼블을 눈짓해 보였다.
“딱히 도움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당신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라울 님께서는 명예 후작께서 그렇게 물으시리라고 짐작하셨습니다. 해서 그에 대해 적이 숨긴 칼은 두 자루라는 것과, 진짜 위험한 건 두 번째라고도 답하라 말씀 주셨습니다.”
“두 번째 칼이라.”
때마침 퍼블의 빗자루질에 또다시 공격을 파훼당한 검사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야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절정의 은신술로 모두의 눈을 피해 유유히 정원을 가로지르지 않았던가. 비서가 말한 ‘숨긴 칼’에 어울리는 모습.
즉, 저 검사가 숨긴 칼 중 하나라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칼’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저 검사보다 더 뛰어난 인물 말이다.
순간 이드의 입에서 감탄성 같은 헛웃음이 터졌다.
방어선을 두드리는 무리와 퍼블과 싸우고 있는 검사, 그리고 라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 ‘가장 위험한 칼’까지. “이거야 원. 오색 기사단의 상위 호환이 따로 없네.”
마치 노린 듯 비슷한 구성이다.
특히 오색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저들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는 무인이라는 점 역시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소드 팰러스의 것이 아닌 무공으로, 소드 팰러스의 자랑인 오색 기사단보다 뛰어난 무력 집단이라니.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많은 이들이 경악할 것이다.
소드 팰러스와 함께 기사단의 대표가 된 오색 기사단. 한다 하는 가문과 국가에서는 오색 기사단을 뛰어넘는 기사단을 키우기 위해 꽤나 애를 쓰는 중이다.
한데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자들이 이미 그 목표를 이루었다니.
‘이번 공격이 삼검왕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이 더 깊어지죠?’
라미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다.
저와 같은 자들은 하루아침에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지원은 물론이고, 뛰어난 무공, 그리고 교육, 수련, 훈련 등에 대한 다양하고 다각적인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검후와 함께 오색 기사단을 키워 낸 삼검왕은 그에 관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지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저와 같은 힘을 가진 자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무력이 전혀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클라인 백작이 이와 비슷한 뉘앙스의 얘길 한 적도 있다.
물론 그도 설마 삼검왕 쪽에서 오색 기사단을 넘어선 전력을 숨기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섣불리 확신은 하지 말자고. 괜한 선입견이 오판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
‘그건 이드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데요?’
제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한 라미아의 말을 헛기침으로 무시한 이드가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는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색 기사단을 언급하는 이드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한 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가 말한 두 번째 칼이 있다 치고, 해당 정보는 얼마큼 신뢰할 수 있습니까? 또 라울이 내게 바라는 도움이란 게 정확히 뭡니까?”
“정보에 대해서는 라울 님께서 이름을 걸고 보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명예 후작님께서 두 번째 칼을 부러트려 주시길 바라십니다.”
“그런 일이야 본인이 직접 하면 될 거 아닙니까?”
도움을 청하는 이유야 뻔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 물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도 확실하게 차단하는 것이 라울 님의 취향입니다.”
과연 취향일까. 아니면 전력이 모자란 것일까.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하지만 대가 없이 움직일 이유는 없습니다.”
“이번 도움에 관해서는 이후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렴 라울의 약속이다. 검후의 문제뿐 아니라, 혼돈의 파편까지 얽힌 게 많은 관계. 그런 만큼 믿어도 좋으리라.
“그리고 이것을…….’
승낙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비서가 꺼내 든 것은 입과 코를 가리는 하얀 가면이었다. 적들이 알아보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라울이 준비한 듯했지만, 이드는 손을 들어 거절했다.
얼굴을 가리는 정도야 간단한 것을, 굳이 답답하게 가면까지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정확히 어떻게 움직이면 되는 겁니까?”
“명예 후작님께서 상대해 주실 칼은 잠시 후 방어선이 적을 밀어낼 때쯤 나타날 것입니다. 방향은 저쪽. 명예 후작님께서는 적이 저택에 들어서기 전 요격해 주시면 됩니다.”
“생사는?”
“살아 있으면 좋지만, 번거로우시다면 죽여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까다롭지 않아 좋군요. 라울에겐 협조하겠다고 전하십시오.’
“그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러가라는 듯 손짓하는 이드에 비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올 때처럼 조용한 걸음으로 물러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는 곧 적이 나타날 거라던 방향을 노려보았다. 현재 별달리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그럼에도 라울은 적의 위치는 물론, 등장할 시점까지 정확히 알려 왔다. 이드가 처음 적의 존재를 알렸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
“이거, 아무래도 한 방 맞은 거 같지?”
“굳이 그런 거 따질 필요 없잖아요? 그런 것보다 저는 라울이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아냈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탐색해 볼래?”
“……아니요. 라울의 정보 수집 방법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나설 순 없죠. 자칫 제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마법이라는 직접적인 수단이 사용되면 그에 대한 역추적의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 만큼,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그럼 계속 주변을 살펴 줘.”
그렇게 라미아가 할 일을 정해 준 이드는 한창 전쟁 중인 아래쪽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라울이 말했던 대로 방어선이 적을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달받은 대로라면 곧 적이 나타날 시점.
그러나 여전히 이드의 기감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 한 방향으로 집중된 이드의 기감이 뻗어 나간 거리는 3킬로미터.
혹시 라울의 정보에 이상이 있는 것일까. 그런 의심이 들 때였다.
쩌억.
돌연 보이지 않은 무언가가 빛살 같은 속도로 공간과 함께 이드의 기감을 가르며 나타났다.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방어선을 넘었다. 그 은밀성과 속도는 인지하면서도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정도가 아니라, 두 눈 뜨고 집이 어떻게 털렸는지 모르는 급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 이드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이다.
어떤 형태로든 적을 알아차린 이상, 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속도가 빛과 같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드에겐 빛을 가를 수 있는 검이 있는데.
수라삼검.
수라섬광단.
하늘과 땅을 가르며 한 줄기 붉은 선이 생겨났다.
쯔저저적!
소리가 한참 느리게 그 뒤를 따랐고, 곧이어 숨어 있던 공간이 갈라졌다. 빛을 가르는 검기(劍技)와 공간의 충돌. 그것은 벼락보다 강렬했다. 콰르르르릉!
공간이 붕괴되며 일어난 폭음은 천둥소리보다 컸고, 그 뒤를 따르는 충격파는 물리적인 압력이 되어 폭우처럼 저택과 정원 일대를 짓눌렀다.
“크흡!”
“뭐, 뭐야!”
무시무시한 힘의 폭발에 적아의 구분 없이 기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공격은 쉬지 않고 있으니, 훌륭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모습도 곧이어 닥친 충격에는 어쩔 수 없었다.
공간을 가른 이드의 수라섬광단이 곧장 수라의 춤으로 이어지며 갈라진 공간을 통째로 도려내려 했다.
그러자 공간 속에서 낭패한 얼굴로 나타난 존재가 타고 있던 검을 이용해 국화꽃이 펼쳐지는 듯 화려한 검의 그림자의 방패를 만들어 낸 것이다. 쾌검과 환검.
절정의 검공이 충돌한 여파는 공간이 갈라진 것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쯔어어어어엉!
“엉?”
오늘도 평소처럼 순찰을 돌고 있던 오잔은 멍청한 소리와 함께 눈을 껌뻑거렸다.
“왜? 눈에 하루살이라도 들어갔어?”
같이 멈춰 선 같은 조의 동료가 눈을 비비는 오잔을 보고 물었다.
“저거. 자네는 안 보여?”
“뭘 보고 그래?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 저쪽 하늘이 갑자기 시뻘겋게 변하면서 나무들하고 저택들이 태산처럼 커다래졌다니까?”
그 말에 오잔이 가리킨 곳을 한 번 더 돌아본 동료가 심히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코를 킁킁거렸고, 오잔은 질색하며 동료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 이 사람이 나 술 안 마셨어. 내 밑으로 입이 다섯이라고.”
당장 순찰을 돌기 전에도 조장 놈의 살벌한 경고가 있었다.
위의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술을 먹거나, 사건을 일으키는 놈은 무조건 잘라 버리겠다며 말이다.
“그러면서 왜 헛소리야? 하늘을 봐라. 저게 검지, 붉으냐?”
“……에이, 씨벌.”
“쯧쯧, 얼마나 술을 못 마셨으면 헛것이 다 보이냐. 가자. 오늘 일 끝나면 내가 한잔 살 테니까.”
불쌍하다는 듯 목에 팔을 두르고 잡아끄는 동료에 힘없이 끌려가던 오잔은 미련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시뻘겠는데…… 에?”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또다시 돋보기를 가져다 댄 듯 커다래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나무와 저택을 본 탓이다.
“에이~ 씨펄. 가자, 가서 빨자!”
결국 무시를 선택한 오잔.
평범한 병사인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 현상이 강력한 충격파에 결계가 부풀어 올랐다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굴절 현상이라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