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55화
1090화
사방에서 번뜩이는 붉은 검강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을 떠오르게 했다.
허미트는 그걸 피해 쉼 없이 발을 놀려야 했다.
번 플레어를 익힌 이래 정신없이 도망치는 것은 항상 상대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손아귀가 저릴 정도로 실감 중인 상대의 실력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 상황이 너무 낯설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는 이드에 대한 상념이 가득 찼다.
‘어째서 저와 같은 실력자가 알려지지 않은 거냐.’
그가 알고 있는 유명한 기사 중에 눈앞에 있는 자는 없었다. 저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무명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실로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마인드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세 분 검왕님들 말고 감히 누가 이런 자를 키워 냈단 말인가!’
이는 강자의 존재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소드 팰러스와 삼검왕의 권위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돌아간 후에 고민할 일.
씨아아악-
힘껏 공격에 나선 허미트의 검이 만티코어의 뱀 꼬리처럼 등 뒤에서 솟아올라 아가리를 벌렸다.
츠칵-
독니를 번들거리는 뱀 대가리를 단숨에 잘라 버린 이드.
“저 인간, 발을 빼려는 모양이네.”
허미트는 한계를 넘어선 충격량에 허공을 디디지 못하고 지붕 위로 추락한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그를 보며 확신했다. 누가 티를 내서 안 것이 아니다. 허미트의 검과 몸짓에서 읽어 낸 사실이었다.
검으로 대화한다는 무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 반응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는 심리학보다 더 정확하다.
그리고 이 대화의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말이나 행동은 꾸미고 속이기 쉽다.
그러나 검으로 하는 대화에서는 그런 가면을 쓰기 어렵다. 오고 가는 검 끝에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파는 순간 목이 떨어질 판에 누가 거짓을 꾸밀까.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심각할 정도로 강자 위주라는 것이다.
강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약자의 모든 것을 읽어 낼 수 있지만, 약자는 철저하게 강자가 보여 주는 것만을 봐야 한다. 게다가 강자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읽어 내지 못한다.
앞서 말한 ‘거짓이 없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드가 허미트의 속을 읽어 낸 것도 그런 이치였다.
허미트의 검은 아직 진득해지지도, 집요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드는 그 속에 감추고 있는 상대의 속내를 읽어 내 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가 감추고자 해도 생각이 변하는 순간 크든 작든 몸은 티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에 적절하게 라미아의 말이 더해졌다.
-어머나~ 마침 저 검사 몸에서 단일 시그널로 이루어진 마나 파장이 발산되었는데, 딱 맞아떨어지네요.
“발산된 마나 파장은 어디로 갔는데?”
-가까워요. 저기 정문 쪽에서 수신했거든요.
마나 파장의 내용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드는 그 내용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두는 거예요?
“라울은 여태 직접 나서지도 않았잖아. 저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이드는 적의 후퇴에 관해서는 신경을 껐다. 의뢰받은 범위 밖의 일까지 굳이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황궁에 침입을 시도한 자들과 달리 이 오색 기사단급의 적에 대해서는 온전히 라울과 바벨에 맡길 생각이었다. 에단과 에린이 하고 있는 일은 지금도 많았다.
거기에 한둘도 아닌, 기사단 급의 전력에 대한 조사다. 위험은 위험대로 있고, 조사는 쉽지 않은 이런 일은 남에게 넘기는 게 최고다. 아무렴 습격을 받은 당사자이니만큼 어련히 이를 갈고 있을까.
“나는 의뢰받은 일에만 집중하려고.”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내고 있는 허미트 말이다.
“퉤! 거기 있지 말고 그만 내려오는 것이 어떻겠소?”
이드는 자신을 부르는 허미트에 순순히 지붕 위로 걸어 내렸다.
내리막을 걸어 내리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 마치 이드의 발아래에 작은 언덕이라도 있는 듯했다.
허미트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환검이 장기인 그 입장에서는 좀 더 입체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허공이 유리하다. 당장 발아래 사각이라는 공략점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니까. 하지만 허미트는 상대가 그 이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피를 토할 정도의 과정을 통해 확인했다. 그래서 차라리 익숙한 지상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뭐, 상대도 인간인 이상 자신만큼이나 발을 디딘 전투가 능숙하겠지만. 그럼에도 지상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부하들이 후퇴하는 사이 어떻게든 상대의 발을 잡고 늘어지기 위해서.
지금처럼 허용치 이상의 충격에 추락해서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것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훅하고 숨을 내쉰 허미트가 입을 열었다.
“후~ 나는 말입니다. 솔직히 어제까지 내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아닙니까?”
“귀하의 실력을 보고 나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누가 내 이름을 기억이나 해 주겠습니까?”
“제 동료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겁니까?”
“……하핫. 무공만큼이나 말도 아프게 하시는군요.”
이드는 땀을 삐질 흘리는 허미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좀 더 아프게 해 드릴까요?”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전 당신들의 후퇴를 막지 않을 겁니다.”
순간 허미트의 얼굴과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억지로 끌어 올리고 있던 입술도 다시 일자를 그렸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저 정도의 경지가 되면 저절로 보이게 되는 것들이 좀 생깁니다.”
부정하듯 미간을 모으던 허미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이드에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무언가 실수한 것도 아니고, 그저 상대의 능력이 뛰어나 저절로 보였다고 하니.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제 생각보다…… 귀하의 실력이 더 대단한 모양이군요.”
그저 이드의 실력에 재차 감탄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놀라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정말 막지…… 않습니까?”
“그건 아래쪽에서 할 일이니까요. 내 일은 당신을 상대하는 겁니다. 그러니 손에 쥐고 있는 걸로 신호를 주셔도 됩니다.”
이드가 손등을 보이는 허미트의 왼손을 가리켰다.
그에 허미트의 표정이 귀신을 마주한 사람처럼 변했다.
후퇴를 결정한 것이 저절로 보였다는 말에도 놀라긴 했으나 그러려니 했다.
하나 눈에 띄지 않도록 특수 제작된 장치까지 단번에 발각되자 어떤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그것참 감사한 일이군요.”
그럼에도 이드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드의 말을 의심하고 더 틈을 봐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공격하는 입장이 아니다. 시간을 끌어서 유리할 것이 없다면 차라리 과감해야 한다.
콰득.
즉시 후퇴 시작이라는 신호를 보낸 허미트는 곧 제 팔목에 끼워진 아티팩트를 부숴 버렸다. 만에 하나 단서가 될 것을 파괴한 것이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드는 그런 허미트를 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우리도 다시 시작해 볼까요.”
“싸우기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그런 명검을 쓸 정도라면 이름 없는 곳에 속한 분은 아닐 테지요?”
이드는 허미트의 말에 처음으로 손에 든 걸 살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모양새. 하지만 사실 이건 라미아가 아공간에서 아무렇게나 꺼내 준, 이름도 모르는 검일 뿐이다.
굳이 무기를 기준으로 소속을 밝히라면 드래곤 로드 소속이려나?
“글쎄요. 상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본인부터 이름과 소속을 밝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 …..”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 같은 충직한 눈을 한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지요.”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까.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검을 드는 허미트였다.
그런 그를 본 이드의 검에 강기가 붉은 불꽃처럼 일렁이며 나타났다.
뒤이어 만류일품의 방위를 밟은 발끝이 부운귀령보로 이어졌고, 뒤이어 혈하검이 보법의 공능을 빌어 지붕 위를 채우며 붉은 안개 지대를 만들어 냈다.
이는 단순한 안개가 아니라, 검이 미치는 범위를 의미했다.
앞서 허미트와 검을 나눌 때와는 천지 차이의 위력.
까드득.
일순간에 모든 방위를 차단당한 허미트는 턱이 부서질 듯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건 터무니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이런 공격을 펼쳤다면 자신은 벌써 패배했으리라.
여태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것인가.
그것이 분하고, 또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이 검법의 이름은 번 플레어. 나는 아직 미숙하지만, 언젠가 이 검법의 진정한 위력을 당신에게 보여 줄 분이 나타날 겁니다! 볼카닉 블루밍!” 마치 유언 같은 외침.
그 뒤를 이은 것은 화산이 폭발하듯 붉은 안개를 밀어내고 피어나는, 화려하지만 굳센 검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어떤 폭풍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의지가 빛났다.
그렇게 피워 낸 검영 속에서 허미트가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와 같은 강자라면!
후퇴할 것을 알고도 무시할 정도로 오만한 자라면!
마지막 순간 자신을 베기 위해 정면에 당당히 나타나리라 여겼다. 그때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순간이다.
‘오라!’
하지만ᅳ
“쯧쯧.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그리고 너무 순수한 면이 있지요.”
혀를 차는 소리는 앞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그에 호흡마저 잊고 급히 돌아서던 허미트는 볼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그물 같은 붉은 강기가 자신을 휘감은 것을 말이다. 그건 어떤 변화도 주지 않은 순수한 수라삼검의 수라섬광단이었다. 혈하검을 통해 외부의 눈을 가렸기에, 제법 마음에 든 그를 위한 마지막 예의라고 할까.
투툭.
이드는 머리를 잃고 쓰러지는 허미트를 보며 검을 휘수했다. 검에는 한 점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단숨에 끝내 버렸네요?
“그가 가진 무공을 다 본 줄 알았거든.”
-아니었어요?
“볼카닉 블루밍이랬나? 감추고 있던 최고 절초 같던데.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네요?
이드는 그녀의 의문에 허미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장담하는 소리 들었잖아. 번 플레어의 진짜 위력을 보여 줄 사람이 곧 나타날 거라고. 그걸 기대하는 거지.”
이드는 쓰러진 허미트를 뒤로하고 다시 난간에 섰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거든.”
정원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싸움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지금은 싸움보다 도망치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의 추격전이 시작되려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