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56화
1091화
착착착착-
사방이 막힌 새까만 방의 중앙에서 황금 수레바퀴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철저한 보안에 라미아조차 용도를 알아내지 못했던 바로 그 물건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느려졌다. 빨라졌다를 반복하며 돌아가는 수레바퀴 주변으로는 라울의 비서들이 둘러앉아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이 없음에도 실을 짜듯 아른거리는 황금빛을 지분거릴 때마다 수레바퀴 위로 떠오른 영상들이 바쁘게 변해 갔다.
그러던 중 한 비서가 다급히 상석에 서 있는 라울을 찾기 시작했다.
“적이 후퇴를 시작합니다.”
“퇴로 차단은 끝났어?”
“퇴로 차단 현재 86%. 아직 도착하지 못한 지원 전력이 있습니다.”
다른 비서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나머지를 보고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내용이지만 라울은 불만을 티 내지 않았다. 비서들에게 화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공격 역시 워낙 갑작스러웠다.
황제의 눈치를 보며 수도 전역으로 퍼져 있던 만큼, 그 병력이 다시 뭉치는 시간까지는 물리적으로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던 거다. 스스로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자신하는 라울은 완벽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빠르게 단념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추격조는 준비되었나?”
“9개 조가 대기 중입니다.”
라울이 인중에 손가락을 대고 문질렀다.
보통 9개라면 적당하다. 하지만 지금 라울의 눈에 차지는 않는다. 그러나 때론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그럼 빠져나가는 쥐새끼들은 추격조에 맡기지. 추격조는 추살 대신 놈들의 복귀 장소를 알아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명령을 내린 라울은 곧 다른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비서들을 향해서도 외쳤다.
“그리고 그 외 전력이 후퇴하는 적을 추격, 사살한다. 단, 추격은 이 주택가의 경계까지만이다.”
그 밖으로 나가 수도 전체를 싸움터로 만들었다가는 필히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건 어쩌면 오늘 적습 이상의 피해를 얻을 수 있기에 반드시 피해야 할 부분이다.
“네!”
라울은 숨 가쁘게 자신의 말을 전달 중인 비서들을 본 후 고개를 숙여 자신 앞에 떠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
순간순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비서들의 것과 달리 오로지 일렁이는 붉은 색만이 가득한 영상은 저택의 옥상, 좀 더 정확히는 이드를 찍고 있었다.
하지만 이드가 옥상에 발을 디디고 붉은 안개를 사방에 뿌린 순간.
영상은 이드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밖으로 새는 것이 없었다.
안개 너머를 꿰뚫어 보려는 시도도 했지만, 보이는 바와 달리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고 단단한 반탄력에 포기하고 말았다. 뭐랄까, 지금처럼 계속 시도하려면 아무래도 만 장 절벽을 뚫어 내는 도전 정신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전력을 다해 볼 만도 하지만, 현재 관계를 보자면 그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라울이 노려보고 있는 와중, 드디어 붉은 안개가 사라지며 옥상의 모습이 나타났다.
목이 잘려 쓰러진 적,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난간에 서서 여유롭게 정원을 내려다보는 이드.
라울은 그런 이드의 뒷모습과 옥상에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시신을 번갈아 보며 침음했다.
“오색 기사단장급의 적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1분 23초인가.”
어디까지나 시야가 가려진 때 기준이었기에 실제 전투를 벌인 시간은 그보다 짧았을지도 모른다.
라울이 손가락을 펼치자, 그간 확보된 이드의 전투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중에서도 메르시오를 상대하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었다.
라울도 몇 번이나 돌려 봤던 영상. 거기에 오늘 가까운 곳에서 이드의 활약을 직접 보고 나자 좀 더 실감이 났다.
“과거로부터 시간을 뛰어넘어 온 괴물이라, 골치 아프게 만드는군.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푸념.
“이제 앞으로 검후보다는 명예 후작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 생겨날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필히 관계 재설정이 필요하겠지. 총수께도 추가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고.”
어쩐지 일거리가 팍팍 늘어나는 것 같아 벌써부터 피곤한 라울이었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정원. 아니, 이미 엉망진창이 된 꼴은 정원이라고 칭하기도 어려웠다.
이드는 그 가운데 서서 천천히 빗질을 시작하는 퍼블 옆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일부러 기척을 낸 착지에 고개를 들던 퍼블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싸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명예 후작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의뢰를 받은 것이니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 오히려 퍼블 양이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초인이란 사실에 놀랐습니다.”
“자랑하기에는 부끄러운 솜씨일 뿐입니다.”
이드는 정말 티끌만큼의 자부심도 비치지 않는 퍼블에 내심 의아했다. 비록 외부 지원이 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초인기가 매우 특별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부분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기에 곧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퍼블 양은 적의 추격에 함께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상대하던 검사가 선두 무리 중에서도 가장 앞에서 후퇴하는 걸 본 이드였다.
“추격에는 재주가 없어서요. 그리고 정원이 이렇게 된 걸 보고도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는걸요.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 퍼블에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오로지 저 이유 때문일까?
‘어쩌면 초인력의 외부 지원이 가능한 거리가 의외로 짧은 걸지도 모르겠는데?’
-아니면 청소라는 개념의 초인기가 가진 한계점일 수도 있죠.
가능성은 많다. 당연히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으리라.
“하긴, 퍼블 양의 힘이면 정리는 금방일 것 같군요. 그럼 옥상에 남겨 둔 시체에 대한 처리도 함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드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 대답하는 퍼블에 당부하듯 말을 더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지만, 저 위에 있는 검사의 시체는 가능한 선에서 정중히 정리해 주었으면 합니다.”
“죄송하지만,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눈빛이 좋은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눈빛을 거론하는 이드에 퍼블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잠시 말이 없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가 확답할 수 없는 일. 그녀는 라울에게 이드의 말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명예 후작님의 말씀은 라울 님께 전하겠습니다.”
“뭐, 어떻게든 이미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부탁하지요.”
그 말에 일순간이지만 멈칫하는 퍼블.
이드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자신을 지켜볼 라울도 과연 퍼블과 같이 움찔했을지 생각하며 무심히 돌아섰다.
“그럼, 적에 대한 정보가 나오면 전달 부탁하죠.”
“아,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라울 님을 뵙고 가시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의뢰를 받을 때 필요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따로 더 할 말은 없군요. 그럼.”
그리고 이드는 터벅터벅 정원을 가로질렀다.
퍼블은 그런 그를 잡으려다 곧 무슨 말을 들은 듯 그대로 멈춰 서서는 살짝 고개를 숙여 배웅했다.
분명 라울의 비서라고 했는데,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완전히 메이드다. 사람 참 헷갈리게 만드는 아가씨가 아닐 수 없다. 정문을 나선 이드는 마침 담 너머에서 재빨리 적을 잡아낸 초인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각각 한 손에 초인을 질질 끌고 왔는데, 그 대부분이 사망한 시체였다.
하지만 저리 거칠게 운반하면 살아 있는 자 중에서도 죽는 이들이 적지 않게 나오리라.
그럼에도 말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갑작스러운 기습과 그로 인해 쓰러진 동료에 대한 분노가 매우 큰 듯했다.
“누군지 몰라도 속 좀 쓰리겠어.”
이드는 그 대상이 부디 삼검왕이기를 바라며 결계를 넘었다.
그리고
푹!
그 자리서 지워진 듯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빠르기에 눈이 휘둥그레진 초인들을 뒤로하고서.
똑똑-
“들어오게.”
손에 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페시딘의 말이었다.
그에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한 기사가 방으로 들어섰다.
기사는 평범하다 못해 밋밋해 보이는 파츠 아머를 걸치고 있었는데, 두툼한 입술에 전체적인 인상이 퍽 고집스러워 보였다.
기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는 페시딘 곁으로 다가섰다.
“빈 기사단이 실패했습니다.”
“실패…….인가.”
팔랑.
페시딘은 책장을 넘기며 방금 들은 단어를 잠시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입에 익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단어인데, 최근 자주 말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피해는?”
“거의 전멸에 가깝습니다.”
질문에 즉답을 하긴 했지만, 너무나 좋지 않은 결과에 기사는 페시딘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마법 등 대신 밝혀 둔 촛불에 얼굴의 그림자가 흔들려 표정을 읽기가 힘들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페시딘이 책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전멸이라고 했나?”
“바벨 놈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퇴로를 넘은 기사는 총 마흔여덟. 나머지는 생포 또는 사살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보고를 듣던 페시딘은 의자에 기대며 턱을 괴었다.
“어째서? 분명 조사된 적의 전력을 40% 이상 상회하는 전력을 투입했는데, 발터가 복귀라도 한 것인가?”
“아닙니다. 청색 깃털 기사단장이 황궁에 있는 것은 보고 전에 확인했습니다.”
“그럼 어째서? 허미트와 코더가 있는데, 두 사람은?”
“허미트는 기사들의 후퇴를 책임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런 아이니까. 아깝구나, 아까워. 겨우 이런 일에 쓰러질 아이가 아닌데.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 아이마저 어쩌지 못하고 빈 기사단이 이리 맥없이 도망쳐야 했단 말인가. 탈출한 기사들에게서 들어온 정보는 없는가?”
“역추적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현재 정보는 차단된 상태입니다.”
페시딘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가려진 그의 입가는 흉하게 변해 있었다. 이드의 바람대로 속이 쓰리다 못해 발광하고 싶은 페시딘이었다.
‘어떻게 키운 기사들인데, 이렇게 어이없는 일로 잃는단 말인가.’
그나마 그들 전부를 소실한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정말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잠시 후 겨우 마음을 다스린 페시딘이 한층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후퇴 중인 기사들이 있다고 했던가? 그들은?”
“미리 명령받은 집합 장소로 향하는 중입니다.”
“당연히 추적이 붙었겠지?”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히… 은밀히 중간에 접촉해서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게. 놈들이 알지 못하도록 최대한 조용히 접근해야 하네.”
“놈들이 모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생포된 기사들은…”
“출동 전 충성 맹세를 받은 기사들입니다. 곧 시간입니다.”
“음. 그들의 이름을 적어 두게. 목숨을 다해 충성한 이들이야. 승리의 날에 적힐 이름이니까.”
그리 말하는 페시딘의 안색이 한층 비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