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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57화


1092화

기사를 내보낸 페시딘의 눈에 책상 위 내려놓은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겠구나.”

고요하던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럴 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으로 독서만 한 게 없었다. 하지만 책은 언제든 다시 읽을 수 있으니,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을 할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페시딘은 책장 앞으로 갔다.

최고급 원목을 사용한 책장은 한쪽 벽을 가득 채울 만큼 커서 책 말고도 다양한 것들이 장식으로 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금고처럼 단단히 잠긴 장을 열자 통신구 하나가 금으로 된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페시딘은 거침없이 거기에 손을 올렸다. 곧이어 내력이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들어 각인된 마법진을 깨웠다.

“약속된 승리.”

팟팟팟.

발동어에 마법이 발동하고, 통신구 위로 세 개의 점이 삼각형을 이루며 나타났다. 그중 페시딘이 누른 것은 오른쪽 아래 있는 점이었다. 그러자 투명하던 통신구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상대가 접속해 있지 않다는 의미였지만, 페시딘은 그대로 기다렸다.

그 상태로 얼마가 지났을까.

책과 함께 꺼내놨던 술병의 술이 절반 정도로 줄었을 때쯤, 까맣던 통신구가 하얗게 변하며 존 워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이 정기 통신일인데 이렇게 애타게 부르다니. 무슨 일인가?”

과연 오래 묵은 친구라는 것일까. 간단한 안부 인사조차 없이 건조하리만치 바로 용건을 물어왔다. 하나 오히려 그 익숙함이 편한 페시딘이었다. 

“허미트가 죽었어.”

“그 녀석이? 쉽게 갈 만한 놈이 아니잖아?”

“부하들이 후퇴할 수 있도록 뒤를 지켰다더군.”

“허. 빈 기사단도 당했나 보군. 그래서 급히 연락한 건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금 라울이 수도에 기어들어 와 있어. 기회라고 생각했지. 한데 지금에 와서는 함정이었나 싶군. 이 소식을 전할 겸⋯ 자네가 허미트를 아꼈지 않나.”

“틀렸어. 나보단 자네가 더 허미트를 아꼈지. 그나저나. 쯧, 자네답지 않게 무리했군.”

가볍게 혀를 차며 질책하는 존 워스.

그와 마르텔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을 탓할 수 있을까. 페시딘은 쓰게 웃었다.

“성급했지. 반성 중이네. 하지만 그냥 당하진 않아.”

“역시 꼼수를 부려 둔 건가. 자네답구먼.”

“이 친구야, 꼼수를 부리는 게 나다운 거란 말인가?”

“부정하고 싶으면 마르텔의 동의부터 얻어 봐. 불가능하겠지만. 하하하.”

“에잉.”

장난스러운 웃음소리에 페시딘은 씁쓸하던 술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존 워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빈 기사단은 전멸인가?”

“다행히 허미트의 죽음이 무의미하진 않았네. 덕분에 코더도 살았고.”

“쯧, 그놈이라면 여우처럼 제 살길부터 챙겼겠지. 둘이 바뀌었으면 좋았을 텐데. 좌우간 그렇게 살아남은 녀석들로 꼼수를 부리는 거지?”

“이봐. 꼼수가……”

“아, 됐고! 설명부터!”

“젠장, 알았네 살아남은 녀석들은 마스로 갈 거야. 그리고 녀석들에게 꼬리가 붙었지.”

만약을 대비해 뽑아 놓은 계획을 꼼수라고 비꼰 것에 심통이 난 페시딘의 설명은 불친절했다.

그러나 마르텔이라면 몰라도 존 워스에게는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했다.

“전투광들이 날뛸 명분을 줄 셈이로군?”

사실 조금 틀린 부분이 있는 말이었다.

빈 기사단의 생존자들이 마스로 숨어드는 문제는 마스의 명분과 상관이 없다. 빈 기사단은 마스에 속한 단체가 아니기에 마스가 나설 일도 아니다. 빈 기사단을 쫓는 것은 바벨.

바벨의 몸집이 크긴 하지만 집단과 집단의 일에 마스가 나설 이유도, 명분도 없는 것이다. 존 워스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도 없다.

그의 말은 당장이 아닌, 몇 수 앞을 내다본 이야기였다.

페시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래서 마르텔보다 자네를 더 좋아하지. 이래도 꼼수라고 할 텐가?”

“꼼수지. 초인 놈들에겐 이보다 치사할 수가 없으니.”

“후후후. 그 부분은 인정하네.”

“자네가 확실히 초인에 데이긴 데인 모양이야.”

그 말에 페시딘은 바로 답하지 못한 채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데인 것인가. 모르겠다. 그러나 초인의 힘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확실하다. 오늘 라울을 확보하는 일은 성공을 확신한 작업이었다. 라울이 수도에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은 행운이 겹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바벨에서도 라울의 정보가 샜음을 모른다. 당연히 대비하지 못했을 순간을 노렸다.

심지어 만약을 대비해 아끼고 있던 패까지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런데 너무도 간단히 실패하고 말았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해 알 수 없었다. 하나 진입과 이탈에 걸린 시간과 바벨의 대처, 그리고 전투를 가려 주었던 결계 유지의 유무까지 모든 걸 종합하면・・・・・・ 그래, 빈 기사단은 간단히 깨졌다는 결과가 나온다.

사실 지금 남은 기사들이 마스로 향하는 것도 원래 다른 그림을 그리다 얼결에 따라온 셈이었다. 이를 테면 어색한 붓질 같은.

존 워스를 상대로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진실은 뼈아픈 실패였다.

대신 얻은 것도 있었다. 바벨과 초인들이 가진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재인식 말이다.

그가 확인한 바로, 발터의 저택에는 절대 자신이 만든 기사단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나?

허미트를 잃고 빈 기사단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다시 말해 발터의 저택에는 이미 굉장한 전력이 숨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전력은 단체가 아닌 강력한 개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것이 그 증거다.

기사단 단위가 저택에 머물고 있다면 사전 조사 단계에서 드러났을 테니 말이다.

바벨의 핵심 전력은 파악되어 있고, 그들의 행방도 모두 알고 있다. 즉, 새로운 강자라는 의미인데. 저들 바벨에 언제 이런 실력자가 또 생겨났을까.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생겨날까.

평소 초인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는 존 워스가 과해 보였다. 하나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초인이란 존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초인의 존재를 관리할 수 있다는 마탑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다.

“그게 아니라 자네 탓이야. 쓸데없는 게 옮았어.”

“아니지. 꼭 필요한 마음이 전해진 거지. 하하하. 좋군, 좋아. 하하하하!”

“그만 웃어. 그보다 마력 소모가 큰데, 자네 어디 있는 건가?

“좀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 말이네. 카논이야.”

만나 볼 사람이라. 페시딘은 굳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존 워스는 초인만 아니라면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기 때문에 친분을 쌓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군. 그럼 거기 일이 끝나면 잠시 마스로 가서 탑주를 만나 주게. 전쟁광이 움직이기 전에 준비를 해야지.”

“알았네. 마스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연락하지.”

툭.

연락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끊는다는 말도 없이 연결이 끊어지며 까맣게 변하는 통신구.

페시딘은 한결같은 태도에 끌끌 웃으며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첫 장을 펼친 그의 눈엔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미완의 마탑 따위의 기를 살려 주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초인부터 해결하자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초인 마법이 완성되고 바벨만 정리된다면…….”

책에 써진 내용이 아닌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바라보는 듯, 먼 곳을 향한 페시딘의 눈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황녀가 왔다. 세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 때와 같이 매번 이드가 직접 모셔 오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이에 대해 스폴은 사치스럽다고 말하면서도 부러워했다.

사실 편의를 위해 이동용 마법진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검후의 반대에 무기한 보류된 상태였다.

아직 공간 이동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수도로 돌아오는 중간중간 라미아의 공간 이동을 이용한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싶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겪는 것과 손녀가 당할 수 있는 위험 수위에 대한 감각이 다른 듯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코 모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어른은 자신의 안위보다 손아랫사람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니까.

그 외 다른 이유도 몇 있었지만, 어차피 핑계를 위한 핑계일 뿐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라면 그런 핑계에 뿔이 난 라미아였다.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검후에겐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드는 그런 상황 속에서 절대 검후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괜한 불똥을 피해 기사들의 수련을 봐주었다.

좌우간 그런 과정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당분간은 이드가 황녀를 마중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사실 말은 하지 않지만, 모두 검후가 고집을 부린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일을 통해 황녀가 조금이라도 더 이드와 친분을 쌓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슨 남녀 관계의 진전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입장이었다.

저택에 함께 머무르며 지켜본 이드 일가의 매우 끈끈한 관계도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간에 있었다.

엘프인 일리나는 말할 것도 없고, 드래곤 로드에 의해 에고 소드로서 태어난 라미아, 그리고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드까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당장 자신만 해도 백 년을 살았지만, 얼마나 더 살지 모른다.

과연 황녀가 그런 시간에 함께 할 수 있을까? 바디 체인지가 일어날 정도로 무공을 수련해야 하는데?

자신을 우상으로 삼고 검을 사랑할 줄도 아는 황녀지만, 검후는 굳이 그녀에게 힘든 수련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만 해도 아들과 남편을 먼저 보내지 않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길이니까.

그녀는 그저 미래에 제국과 황녀 자신을 위해 필요할 때 이드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을 쌓기를 원할 뿐이었다.

“할마마마, 들으셨어요?”

그런 황녀가 얼굴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묻고 있었다.

“무엇을 말인가요?”

검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드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이드 역시 들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 고개를 흔들고는 과연 황녀가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지 귀를 기울였다.

“어젯밤 수도에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아바마마께서 매우 크게 분노하셨어요.”

“어젯밤이면…..”

이드는 황녀를 제외하고 자신에게 모여드는 시선에 혹시 모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확히 무슨 사건입니까?”

“의문의 무리가 발터 단장의 저택을 급습했다가 실패해서 물러났다고 해요. 다행히 당시 발터 단장은 황궁에 머물고 있어,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하는데…… 혹시, 알고 계셨나요?”

신나게 말을 이어 가던 황녀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좌중의 시선을 따라 이드를 보았다.

“흐음. 이번엔 황궁에서도 놓치지 않고 잘 알아차린 모양이네요.”

황궁이 바보는 아니구나 하고 대견해하던 이드는 곧 검후의 손에 꼬집혀 옆구리를 문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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