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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58화


1093화

이드는 이미 오늘 아침, 모두가 모인 식사 자리에서 지난밤 발터의 저택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들려줬다.

국경도 아니고, 무려 수도에서 두 개의 대형 기사단급 전력이 정면충돌하는 전투가 벌어졌다니.

“세상에, 미치지 않고서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에 포크를 떨어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그렇게 한바탕 마무리되었으니 새삼 놀라지 않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황녀로서는 궁에서도 극소수만 습득한 정보를 듣고 아무도 경악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었다.

“모두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아앗! 설마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거예요? 설마 발터 저택에 침입한 의문의 기사단이 은색 기사단인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어야 해요!”

자신의 말에 혼자 놀란 황녀가 느닷없이 판다처럼 이드를 잡고 늘어졌다.

분위기상 이드가 일의 핵심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드는 그런 황녀를 매달고서 자리를 옮겼다.

문 앞에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히 대기 중인 은색 기사단만 괴롭힐 뿐이니까.

“다행히 황녀의 걱정과 달리 은색 기사단은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자는 저 하나죠.”

“다행이 아니잖아요! 이번 일에 대해 아바마마의 진노가 대단하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건 다행이지만. 특급 뉴스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던 황녀는 오히려 자신이 놀라 하얗게 변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리고 이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앞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폴이었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나설 때라는 듯 황녀를 잡아챘다.

이드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아침에 한 번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데, 그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주겠다니 감사할 뿐이다. 

“그 이야기는 제가 해 드겠습니다, 황녀 전하. 때는 어젯밤이었습니다.”

과연 신나게 나설 만했다.

내공으로 성대를 조율해 가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마치 전문 배우 같아 상당히 볼만했다.

특히 적당히 과장을 섞은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본인의 경험담을 말하는 것인가 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쳤다.

“그때, 이드 님이 외치셨죠. 그대들의 비겁한 행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내가 기사의 검을 들고 나서………… 꺅!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겁니다!”

다만 문제라면 제 흥에 취해 그 과장이 정도를 넘어간다는 것일까. 덕분에 이드는 편히 앉아 있지 못하고 중간중간 스폴에 징계를 내려야 했다.

“들은 사실만 말하란 말입니다. 사실만!”

“뉘에~~ 뉘에~~ 꺄욱!”

딱밤을 한 대 더 때렸다.

그렇게 중간에 몇 번 끊기긴 했지만, 이야기는 가까스로 끝이 났다.

스폴은 뿌듯해했고, 그 옆의 쉴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부단장. 너 그러다 기사 그만두고 배우 하겠다고 하는 거 아냐?”

“훗. 한때 그럴까 싶기도 했지만, 은색 기사단을 버릴 순 없죠. 제가 없으면 은색 기사단이나 단장님이 얼마나 어려워지겠어요?”

“끄응.”

없는 편이 오히려 더 잘 돌아갈 것 같았지만 쉴라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놈의 정이 뭔지.


“감히 제국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기에 다른 곳도 아닌 안티로스에서 그와 같은 짓을 벌였단 말인가요. 흥! 단단히 미쳤군요.” 

싸늘하다.

귀엽고 상큼하던 아가씨는 간데없고, 위엄 어린 얼굴에 차가운 목소리와 눈빛을 한 황녀만 남았다.

같은 이야기를 들은 여기 모두와의 반응과도 달랐다.

그건 아마도 그녀의 몸에 황제의 피가 흐르고, 그만큼 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검후는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놀라기만 할 뿐, 황녀처럼 분노하지는 않았다.

이드는 화난 황녀를 달래는 검후를 돌아보았다.

‘경험의 차이려나. 아니면 제국에 대한 마음이 좀 멀어진 거려나.’

후자라 한들 황제에 대한 배신감이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런 이드의 시선을 느꼈는지, 황녀의 어깨를 토닥이던 검후가 돌아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황궁에선 이 일을 얼마나 알고 있나 싶어서요.”

이드의 물음 아닌 물음에 황녀가 붉게 달아오른 볼을 두 손으로 식히며 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앞서 말씀드렸던 게 다였어요. 아바마마의 진노도 충분히 이해가 가요.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기사단급 전력의 전투였다니.” 

“그럼 습격 사실은 발터 단장을 통해서 보고된 겁니까?”

“보고도 있었지만, 발터 단장의 저택 인근에서 강한 마력 반응이 확인되어서요. 귀족 중 마법에 관심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아 작은 반응은 무시하는 편인데, 전날 밤은 유독 컸거든요. 그리고 때맞춰 급히 이동하는 병력까지 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이드 님 말씀대로 이것까지 놓칠 정도로 황궁이 바보는 아니라서요.”

“크흠. 그렇군요. 거기에 자세한 사정은 발터 단장이 추가로 보고했을 것이고, 라울의 존재까지 알려진 겁니까?”

원래 알려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에 대해 밝히지 않고서는 전날의 습격에 대한 설명이 힘든 것이 사실.

때가 때이니만큼 자칫하면 불손한 목적을 가지고 저택에 전력을 모아 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터 단장이 함께 보고했어요. 그 때문에 아바마마의 진노가 두 배가 되었지만, 일단 해당 문제는 공론화하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 같아요.”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을 둘로 늘릴 필요는 없겠죠. 바벨의 규모도 부담스러울 테고.”

당연히 바벨에서 사과의 의미로 모종의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차피 크게 알려진 일도 아니니, 황제로서는 조금 자존심을 굽혀 실리를 택했으리라.

“황제는 이전부터 그런 정치적 계산이 뛰어났지요.”

“할마마마.”

검후의 말에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 문제에 대해서 검왕의 반응은 어때요?”

“당연히 의심이 되는 상황이지만, 딱 잘라 관계없다고 부정했어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더 추궁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의심을 받았다는 게 중요하네요.”

“네. 이전이라면 그런 의심의 말이 나올 수도 없었으니까요.”

저 기사의 성지가 밤을 틈타 안티로스에서 습격을 벌이다니. 다른 걸 떠나 검후의 존재만으로도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소드 팰러스는 이미 그때와 다르다. 검후도 없고, 존 워스의 문제로 인해 신뢰도 역시 추락한 상태.

밤사이 일어난 습격에 대해 검왕이 불려 갔다는 자체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습격자를 추격하는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어요.

“추격이라. 바벨 쪽에서도 하고 있을 텐데. 검왕이 먼저 말을 꺼낸 겁니까?”

“네.”

이드는 황녀의 대답을 들으며 팔짱을 꼈다. 그러자 황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솔직히 그 습격이 삼검왕의 수작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굳이 적극적으로 추격에 나선다는 것이……….”

“추격은 핑계고, 도망자들을 빼돌리거나 먼저 처리하려는 수작은 아닐까요?”

스폴이 내놓은 의견에 쉴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기사들을 아끼는 검왕의 성향으로 보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라면 차라리 실패를 대비해서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뒀겠지.”

검후도 쉴라의 의견에 힘을 더했다.

그에 이드가 팔짱을 풀고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더욱더 검왕이 추적에 나설 필요가 없잖아요. 스폴 경의 말처럼 괜한 의심만 받을 일인데.”

물론 습격자들이 정말 검왕과 관련이 없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이드를 포함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확신을 하는 상태였다.

“어쩌면 추적,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닐까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요.”

그때 일리나가 차분하게 제 생각을 밝혔다.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과는 다른 시선에서 사건을 살피고 내놓은 의견.

작은 차이지만 그에 자극을 받은 듯 이드가 눈을 반짝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검후와 쉴라 역시 고개를 들어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드님?”

“네. 정말 그럴 수도 있겠어요. 습격자들이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따라 뭔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라울을 다시 보러 가야겠습니다. 습격자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요.”

“만에 하나 습격자들이 국경을 넘을 경우, 존 워스의 문제가 뒤로 밀릴 가능성도 있다고도 전해 주세요.”

검후의 말에 이드 일가를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검후가 말하는 경우가 국가 간의 충돌, 다시 말해 전쟁을 말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큰 사건이 아니라면 존 워스의 문제가 뒷전이 될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바벨도 선택을 해야겠네요. 추적을 추살로 변경할지, 아니면 존 워스의 문제에 대한 논란을 가속할지.”

“황제에게 정보를 흘릴 수도 있어요. 삼검왕을 견제하고자 하는 마음은 황제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다만 제국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중립적인 모습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존 워스에 대한 논의할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 황제도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시 할마마마께서 계셔야 해.’

황녀는 간단히 몇 가지 의견을 주고받은 것으로 순식간에 적의 노림수를 밝혀내는 검후의 모습을 보고 감탄과 함께, 제국을 위해서라도 역시 그녀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그에 황녀는 황제와 검후의 사이의 관계를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의 관계가 계속되는 건 제국의 큰 손해였다.

그렇게 결심을 다진 황녀는 그 후 검후와 따로 이야기를 더 나누고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드는 황녀를 궁으로 데려다준 뒤 발길을 돌려 발터의 저택으로 향했다.

황녀의 말대로 황제가 사건을 인지했기 때문일까. 발터의 저택 주변으로는 순찰 중인 병사 여럿과 함께 곳곳에 몸을 숨긴 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신 발터의 저택에서 감지되는 초인의 숫자는 오히려 줄었다.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기보다는 더 이상 적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이드는 기사들의 눈을 피해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부서진 문과 정원은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모두 원래 모습으로 복구된 건 아니지만, 하루 만에 이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문득 마지막까지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던 퍼블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모습에 그녀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 만에 다시 방문해 주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오늘도 이드를 반긴 것은 퍼블이었다. 전날 도움을 준 것 때문인지 그녀의 응대가 좀 더 상냥해진 듯했다.

그 뒤 라울을 만난 이드는 그에게 삼검왕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검후의 말을 전달했다.

“과연 검후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이드의 말을 귀담아들은 라울은 대뜸 지도를 펼치더니 안티로스를 시작으로 굵은 점을 찍은 후, 점이 향하는 방향으로 선을 그었다. 이드는 안티로스와 연결된 선의 반대쪽을 보고는 혀를 찼다.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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