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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59화


1094화

난잡하게 찍은 점과 선.

비싼 지도를 더 이상 못 쓰게 되었다.

이드가 거기에 손을 댔다. 설명은 없었지만 점과 선의 의미는 분명했다.

점은 도망 중인 기사들의 퇴로다.

추적자를 떨구고, 목적지를 교란시키기 위한 과정이 어지럽게 표시된 거다.

그러나 그 복잡한 퇴로는 이미 그 의미를 잃었다.

보통 이런 작전은 한정된 지역 안에서 행적을 감추기 위해 사용된다. 경우에 따라 국토 전역을 배경으로 길고 복잡한 경로를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도망칠 여유와 시간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

지금 저 기사들에겐 까놓고 말해 똥 쌀 시간도 아까울 것이다. 대담하게 수도에서 일을 벌인 것까진 좋지만, 그로 인해 황제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당장이야 바벨만 따라붙겠지만, 곧 제국이 움직인다. 여유가 없으니 움직임은 한정적이게 되고, 자연히 진행 방향도 감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점들 사이를 관통하는 굵은 선이 그 증거다. 그 끝과 끝에는 안티로스와 마스가 있다.

선을 따라 손가락을 옮기던 이드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후훗.”

“웃으시는 이유라도?”

“나올 놈들이 나온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하.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기는 하지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크게 웃는 라울.

이드는 그런 그를 보며 저택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 삼검왕의 노림수에 대해서 내놓은 의견 중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이 바로 마스였는데, 결국 그게 정답이었던 거다.

웃음을 멈춘 라울이 말했다.

“확실히 마스라면 골치 아픈 문제를 모두 때려 박을 수 있는 곳이죠. 이 전쟁광들이라면 제국과도 충분히 싸울 겁니다.”

마스를 언급했던 검후의 의견과도 비슷한 말이었다.

검후도 미완의 마탑이나 마스 기사들에 대한 삼검왕의 영향력을 떠나서, 마스라는 나라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싸움꾼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현재 대륙 최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크렌에게도 거침없이 선전 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던가?

들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가치 없는 척박한 땅이 많고, 아래로는 겨울만 되면 몬스터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레이논 산맥이라는 골칫덩이를 두지 않았다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국가가 바로 마스였다.

“라울 경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한 차선책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게 다 명예 후작님 덕분이지요. 아마 지금쯤이면 검왕도 발등에 떨어진 불로 정신없을 겁니다. 하하하.”

다시 낄낄거리는 라울.

적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란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있을까. 그런 모습을 보며 이드가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당연히 있지요. 이거 한 번 보시겠습니까?”

말과 함께 라울이 꺼내 온 것은 첫 장에 ‘마스 왕국 동향’이라고 적힌 서류 뭉치였다. 하나 당장 가볍게 읽어 보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이드는 첫 장을 펼치지도 않았다.

“・・・・・・너무 두껍군요.”

“제목 그대로의 보고섭니다. 그런데, 여기엔 마스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국지전이 일상 같은 나라라서 항시 싸울 준비가 되어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는 건, 사전에 아무런 교감이 없었다는 거로군요?”

“그만큼 성공을 확신했던 거지요. 실제로 그때 명예 후작께서 적절한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기도 했고 말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을 건네는 라울이었지만,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사상자는 늘었을지언정, 그때 자신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라울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작 위험했다고 말하는 당사자의 눈에 한 점의 위기감도 없다는 것에 더해, 라울이 누군가에게 생포되는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을 습격한 자들은 마법사나 초인처럼 이드가 그 능력을 완벽히 파악하기 힘든 자들이 아니라 단번에 그 속을 손바닥 들여야보듯 할 수 있는,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니만큼 이들에 대한 이드의 이미지는 단순한 상상이 아닌 현실 레벨의 시뮬레이션이라고 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만큼 정확했다. 다시 라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스로 향하는 발길이 제대로 된 건 아닐 겁니다. 아마도 정말 매뉴얼대로, 차선책을 준비하기 위한 차선책이었겠지요.” 

“같은 생각입니다.”

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형식적인 차선책 정도가 아니라 단순히 언급된 적이 있는 정도의 계획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것이었다.

하나 아무리 이드나 라울이라도 그 속사정까지 추리해 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라울과 바벨이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충분한 정보였기에 이드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바벨의 대응은 무엇입니까? 추살, 아니면……………..”

“음, 미완의 마탑과 그들을 품에 안은 마스는 언제가 되었든 처리하긴 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좀 빨라진다고 해도 큰일은 없겠지요.” 

“그건 바벨의 결정입니까?”

“아니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와 발터가 고삐를 쥐고 있습니다. 따로 바벨 안에서 논의할 필요 없이 제 선에서 결정이 가능하죠.

“처음 만날 때도 그랬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시군요.”

무려 국가 간의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한 문제다. 거기에 제국의 권력 싸움과도 연계된 문제를 홀로 결정하다니.

이 문제만 보면 바벨 안에서 라울이 가진 결정권은 황제 이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럼, 지금 발터 백작님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존 워스에 대한 건에도 속도가 붙겠군요?”

“물론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어떠한 형태로든 결과를 낼 겁니다. 언제든 다른 곳으로 불똥이 튈 여지가 있었던 건이기도 하니까요.”

그건 다시 말해 도망친 기사들의 마스행으로 인해 엉성하게 진행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리라.

그렇게 이해한 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검후께도 그렇게 전하도록 하죠. 어차피 존 워스 건은 발터 백작께 맡긴 일이니, 우린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부디 검후님께 실망을 드리지 않기를 바라죠.”

마치 빚쟁이처럼 독촉하는 이드에 라울이 넉살 좋게 웃었다.

“아마 결과를 보시면 검후님도 만족하실 겁니다. 저희의 용서를 받아 주실 정도로 말이지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이 자료는 보라고 주신 것이니 가져가서 보도록 하지요.”

“・・・・・・꼼꼼하시군요.”

두꺼운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끼운 이드는 천하제일 구두쇠를 보는 듯 자신을 보는 라울을 향해 싱그럽게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적 기사들이 마스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그에 대한 라울과 바벨의 대응 방향에, 이 서류 뭉치까지.

얻은 것이 많은 밤이다.

“아, 이왕 가져가실 거 하나 더 가져가시겠습니까?”

그런 이드를 잡은 건 라울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라울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고 말하는 장사꾼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한 장의 서류를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드를 향한 의미심장한 눈빛엔 묘한 자부심 같은 것이 엿보였다.

“준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어떤 겁니까?”

“간단한 정보인데, 검후님은 물론이고 명예 후작께서도 상당히 흥미를 가지실 만한 겁니다.”

“내가 관심을 가질 문제라면…… 역시 존 워스입니까.”

라울이 내민 종이를 받아든 이드는 그 첫 줄에 적힌 이름에 반사적으로 아래로 향하려는 눈을 애써 멈췄다. 그리곤 마스 왕국 동향이라는 서류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에 이드는 자신을 주시하던 라울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존 워스와 연결되어 있을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이드의 반응을 살피고 싶었으리라.

이드는 그런 라울에게 있는 그대로 감사를 전했다.

“확실히 흥미로운, 좋은 정보입니다. 다음에도 기대하죠. 아무렴 존 워스나 혼돈의 파편은 공동의 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만.”

그리고는 바람처럼 문을 열고 사라지는 이드다.

“……어째 손해만 본 느낌이군.”

방에 홀로 남은 라울은 묘하게 썰렁한 느낌에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말처럼 정말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이드가 전해 온 검후의 말을 통해 도망치는 기사들의 목적지를 미리 알았다.

“확실히 혼돈의 파편에 대한 집착은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반응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이드가 있던 자리를 다시 한번 돌아본 라울이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매일 그가 처리해야 할 서류가 정말 산더미다. 당장 밀린 일들도 많다.

물론 무엇보다 가장 급한 건 존 워스에 대한 문제를 재빨리 마무리하는 거다. 도망친 기사들로 인해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말이다. 

“바쁘다. 바빠!”


“발터 백작의 저택에 갔다 오는 거 아니었어요? 들고 오는 게 뭐 그렇게 많아요? 누가 보면 친구 집에서 선물 받아 오는 줄 알겠네요.”

“이만큼 자주 얼굴을 보면 반쯤 친구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드는 자신을 반기는 라미아의 말에 답하고는 환하게 불이 밝혀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황녀를 데리고 떠날 때 멤버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자고 기다렸던 겁니까?”

“검왕이 내놓은 수에 바벨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해서 말이죠.”

“여자끼리 모인 김에 이드 님에 대한 흉도 좀 보고요.’

검후에 이은 스폴의 말.

테이블에 놓여 있는 지구산 과자의 빈 봉지를 보면 확실히 그렇게 보이기는 한다.

“어떤 흉을 봤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전혀! 그보다 여러분들이야말로 내 손에 들린 것들이 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드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스폴의 말을 단박에 끊어 버리기 위해 손에 든 물건들을 흔들었다. 그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탁자 위를 치웠다.

이드는 그 위에 가져온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특히 애써 보지 않고 존 워스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류도 잘 꺼내 놨다. 

“지도하고 서류네요? 두꺼운 것과 얇은 것.”

“이 지도는 도망치는 기사들의 행적을 표시한 겁니다. 우리 짐작이 정확했더군요. 기사들이 향하는 곳이 마스였어요.’ 

이드는 지도를 먼저 펼치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제목 그대로 마스 왕국에 현재 동향에 대한 바벨의 보고서죠. 이걸 보면 마스는 이번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건 존 워스에 대한 정보라는데. 저도 아직 보지 않았으니, 같이 보죠.”

과연 다른 사람들도 당장 저 두꺼운 동향 보고서를 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인지 모두의 눈이 이드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렇게 펼쳐진 종이에는 짧은 내용과 함께 지명과 날짜가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다름 아닌, 지금 현재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존 워스의 행적에 대한 정보였다.

그리고 그 가장 아래 적힌 지명.

“지금 이 시점에 카논이라고?”

혼돈의 파편이 가진 계약을 알고 있는 이드는 카논이라는 이름이 절대 의미 없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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