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60화
1095화
샤워를 마치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진 이드가 팔다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연한 핑크색 바탕에 귀엽게 생긴 곰 대가리가 가득 그려진 그림이 활짝 펼쳐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팔다리에 감기는 잠옷이 조금 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그 디자인에 반해 버린 라미아의 픽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사자지만 잠옷에 관한 선택권은 없는 이드였다.
“카논 카논 카논이란 말이지.”
이드는 몸을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존 워스의 카논행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라울에게서 받아 온 존 워스의 행적을 본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특히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 중 하나라고 확신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카논행이 의미가 없을 수 없었다.
과거, 혼돈의 파편의 봉인을 풀고 계약을 통해 자신과 카논의 이름을 역사에 크게 새기고자 했던 자가 바로 카논에 충성을 맹세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이 간다 한들, 지금 시점에 카논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짐작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서류에는 각 날짜마다 존 워스를 발견한 위치만 적혀 있을 뿐. 존 워스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이해는 되었다. 감히 누가 존 워스를 은밀히 쫓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바벨이니 이런 정보라도 얻은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나오지 않는 답에 끙끙거리던 이드는 일단 해산을 결정했다. 당장 해결도 나지 않고, 이미 충분히 늦었기 때문이었다.
황녀가 다녀간 때도 이미 어둑했었는데, 거기에 라울까지 만나고 왔다. 사실 늦었다기보다 새벽이 가까웠다고 말해야 했다. 하룻밤 정도야 자지 않아도 몸에 전혀 영향이 없지만, 그래도 잘 수 있다면 자는 편이 좋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머리에 남은 고민거리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딸깍.
“있긴 뭐가 있어요?”
“제가 보기엔 괜한 심력 낭비 같아요.”’
욕실 문이 열리고, 라미아와 일리나가 달콤한 향기를 품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욕실에서 머리와 몸을 말리고 나온 듯 두 사람도 귀여운 잠옷 차림이었다.
이드는 자신의 양옆으로 다가와 앉는 두 사람에 문득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런데 라미아는 굳이 샤워할 필요가 없잖아?”
“필요는 없지만, 하면 안 될 이유도 없죠. 정신적인 충족감은 중요하다고요. 무엇보다 아무 냄새 없는 것보다는 좋은 향이 나는 게 좋잖아요. 맡아 봐요.”
말과 함께 코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진 라미아의 팔에서 기분 좋은 살냄새가 풍겼다. 정확히는 비누와 바디 로션의 냄새겠지만, 좋은 향인 건 분명한
사실.
보기에 따라 인형을 목욕시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라미아의 입장에서 보면 인형의 몸에 빙의한 감각일 수도 있었다.
거기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며칠 전부터는 새의 형태로 밤을 보내지 않고 일리나처럼 이드 옆에 누워 자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을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쭛, 라미아에겐 미안하네. 변화에 전력으로 신경을 써 주지도 못하고 있으니.’
거기에 최근에 벽에 막힌 듯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검의 영혼으로 태어난 그녀는 이드와 함께 차원을 넘어 지구에 가면서 인간의 형태를 했었다.
그러나 그레센으로 돌아오면서 검이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차이는 그레신과 지구라는 차원이 라미아를 인식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다시 말해 라미아의 탄생에 대해 알지 못하는 지구는 처음 접하는 그녀를 검보다는 인간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사실 틀린 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다양한 부분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상위 정신체였다. 굳이 따진다면 정령이나 하위 천사에 가깝다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탄생에는 실제 천사와 정령왕이라는 대단한 자들이 깃털이라든가 축복 등 다양한 형태로 관여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한낱 검의 에고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상위의 존재. 그것이 바로 라미아였다.
다만 라미아의 존재를 처음 접한 지구와 달리, 그레센에는 그녀의 탄생과 태어난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검의 모습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라미아가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총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와 둘째는 영혼과 마법의 도약이다.
어느 쪽이든 한발 앞으로 나가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의 모습을 근본부터 변화시킬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문제라면 어느 쪽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비교하면 인간이 신선이 되는 것만큼 어렵다고 할까?
그에 선택된 것이 세 번째다. 바로 차원의 인의 주인이 된 이드. 영혼으로 묶인 이드라는 필터를 통해 이 세상에 라미아라는 존재를 다시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복잡할지 몰라도, 앞의 것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 덕분에 라미아는 생명체는 아닐지언정 홀로 활동이 가능한 새의 모습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엔 새가 아닌 다른 모습도 가능해졌다. 그래서 쓰고 있는 골렘을 버리고, 진짜 생명체는 아닐지언정 인간의 형태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다만, 생명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없기에 굳이 그런 모습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드가 벽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금속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형태를 바꾸는 건 완전히 익숙해졌다. 우연히 금속을 조종할 수 있는 초인기를 얻은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이 차가운 금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가진 생명체로의 전환이었다. 이 부분이 막막했다. 어떠한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드다. 환골탈태를 거치는 순간 수의근과 불수의근은 물론,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곳을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라미아는 그려 낼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라미아도 이드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드와 함께하는 동시에 한 사람의 당사자로서, 이드가 겪고 있는 일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이 참 고마웠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바보네요. 그런 말을 왜 해요?”
“그냥…….”
“부담 가지지 마요. 실패해도 좋으니까. 어차피 그레센을 떠나면 자연히 해결되는 문제잖아요. 히힛.”
“그땐 당연히 저도 같이 갈 거예요.”
말괄량이처럼 웃는 라미아에 일리나가 잊지 말라는 듯 말을 더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일리나가 말했다.
“좀 전에 카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거죠? 이드가 오늘은 그만하자고 해 놓고선 그러면 어떻게 해요?”
“자연히 떠오르는 걸 어쩌겠어요.”
그러자 라미아가 웃기지 말라는 듯 콧방귀를 뀌며 돌아누웠다. 기존 골렘에 그녀가 애써서 개발한 마법을 새로 더한 덕분에 피부의 질감은 물론, 무게까지 완전히 인간의 모습과 같아진 상태였다.
다만 감각적인 부분에서는 아직 문제가 많았다. 특히 내부적으로 라미아 본인에게 말이다.
“흐흥~ 그게 아니라 손이 근질근질한 거 아니에요?”
“……그것도 부정하진 못하겠네. 그제 있었던 전투로 괜히 입맛만 버린 느낌이거든.”
손바닥 위의 손오공을 보는 듯한 라미아의 눈길에 굳이 부정하지 않은 이드는 말을 더했다.
“그리고 문득 카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시점이다 싶기도 했고, 어쨌든 지금 혼돈의 파편이 가진 원래의 목표를 위해선 계약을 끝낼 필요가 있잖아. 그러기 위해선…….”
“카논을 움직여야겠죠.’
“그런 거지. 당장이야 눈앞에 마스가 있지만, 어쩌면 그게 전초전일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럼 이드는 검왕이 혼돈의 파편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건가요?”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일리나다.
그에 이드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조종까진 아니에요. 제가 본 페시딘은 죽으면 죽었지, 누구에게 조종될 인물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조종이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그것도 배신까지 함께할 정도의 동료라면 큰 의심도 하지 않을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이드 생각은, 제국이 마스와 전쟁을 하고 있으면 카논이 뒤통수를 친다는 거예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아니에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이마를 짚었다.
“아니지. 아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최종적으로 카논이 움직이긴 하겠지만. 아~ 몰라, 몰라!”
“헐? 자기가 시작해 놓고는!”
이드는 기막혀하는 라미아를 못 본 척 이불을 뒤집어썼다.
정말이지, 자기 입으로 쉬자고 해 놓고는 괜히 말을 꺼내서 말이다.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그리고 자자는 듯 손을 튕겨 불을 끄고는 눈을 감았을 때였다.
“그럼 직접 카논에 가 보는 건 어때요?”
은은한 풀 내음과 함께 일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가 주관하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보통 황궁에서 열리는 회의는 황제가 참석하건 누군가 대리하건 오전에는 잘 열리지 않는다.
굳이 특별히 그래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파티가 많고, 게으른 자들도 많은 탓에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오전이 아니라 아침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어전회의다. 황제가 모이라면 모여야지, 신하 된 자가 어쩔 수 있겠는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신하들이 모인 회의실에 입장한 황제는 말없이 시작하라는 손짓을 했고, 그에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나서 회의실 중앙에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그레센의 전도.
지도를 펼친 남자는 그 위에 몇 개의 모형을 가져다 두고는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전날 라울이 이드에게 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즉, 도망 중인 적 기사들이 마스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으음.”
“젠장. 하필이면.’
“골치 아픈 놈들이 끼어들게 되었군.”
마스라는 나라가 얼마나 귀찮은지를 잘 알고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다만 그중 누구도 마스에 대한 두려움을 비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아나크렌은 세상이 다 인정하는 최강국이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제국와 왕국의 전력 차는 분명했다. 마스라는 싸움꾼이 귀찮을 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소.
“신 티그릭이 보기에 이는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당장 제국에 이런 일을 벌인 마스를 벌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가 판을 깔아 주자 성격 급한 순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허! 그리 단순히 여길 일이 아닙니다. 이 자체가 기만일 수 있어요!”
“기만이라니요? 누가 이런 전력을 버려 가며 기만술을 쓰겠습니까?”
“맞습니다. 감히 누가 우리 아나크렌에 기만술을 씁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요!”
서서히 열기를 보이기 시작하는 회의.
주장은 둘이었다. 당장 마스를 벌하자는 쪽과 기다리자는 쪽.
“후작은 어찌 생각하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황제가 가까이 앉은 레오날도 후작을 돌아보았다. 평소 황제가 그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하들이 하나둘 조용히 입을 닫았을 때 후작이 입을 열었다.
“복잡할 것 있겠습니까? 직접 물어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