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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64화


1099화

당연한 일이지만 제국인 아나크렌의 황궁은 아름답고 화려하다. 그러면서도 실용적이고 직선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보통 황궁을 직접 보게 되면 이런 점들보다 먼저 느끼는 바가 있다.

바로 거대하다는 것이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지배자가 사는 곳이니 그 역시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실제 황궁에 발을 들이면 그 크기에 압도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만큼 황궁의 중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도 웅장하고 호화로웠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대전에 모든 신하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입이 바짝 마르는 듯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보좌에 올라 있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로 존 워스에게 허락되었던 입궁 시간이 끝났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서 잠시 후 존 워스에 대한 처분이 결정된다.

꼴깍.

대전에 신하들이 가득하건만 수군거리는 소리는 고사하고 기침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존 워스에 대한 처분이 그만큼 중요하고 큰일이기

때문이다.

존 워스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제국이 자랑하는 삼검왕 중 일인이다.

그는 가히 제국의 보물이었다. 또한 공식화하지 않았을 뿐이지, 대내외적으로 그의 위치는 후작이었다.

그와 같은 자를 처벌하는 일은 최소 백 년 내에는 없었다. 즉,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은 충격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그럼에도 이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존 워스가 벌인 사건이 어지간해야 말이지. 무려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토벌해야 할 악으로 지목한 자들과 손을 잡고, 제국의 기사들을 죽였다. 그에 대한 증인과 증거도 분명하다.

반대로 존 워스는 황제가 직접 시간을 주어 불렀음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뿐, 앞으로 나서 스스로의 결백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에 대한 처분을 막을 수 없었다.

‘젠장. 시간이 뭐 이리 빠르냐. 벌써 열흘이야.’

‘제발, 조용히 지나가야 할 텐데.’

‘에고, 속 터져! 검왕께선 오늘도 오시지 않으셨네, 오지 않으셨어!’

‘그러게 말일세. 정말 어쩌려고 이러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이 높아진 귀족들의 눈이 좌우를 오가며 번뜩였다.

“폐하. 발표하실 시간이옵니다.”

레오날도 후작이었다.

“그런가.”

저벅저벅.

근엄한 목소리와 함께, 느릿하지만 묵직한 몸짓으로 황제가 보좌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두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잡생각에 빠져 있던 모두의 눈과 귀가 황제를 향했다.

황제는 자신을 향한 눈을 하나하나 내리누르듯 쓸어 본 후,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위엄을 담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참으로 슬픈 날이다. 나는 진정 이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제국의 자랑이 영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국의 자랑은 나와 제국을 실망시켰다. 존 워스,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였던 그는 영원히 찬란하게 빛나야 할 소드 팰러스에 어둠을 드리웠다. 레오날도 후작은 존 워스가 범한 죄에 대해 고하라.”

황제의 명령에 레오날도 후작이 큰 목소리로 존 워스의 죄목에 대해 열거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레오날도 후작의 입을 통해 발표됨으로써 존 워스의 죄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셈이었다.

“으음.”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는 죄목들의 나열에 몇몇 신하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레오날도 후작의 발표가 끝나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으로 듣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당당하고 정의로운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에 정당한 제국의 지배자이자, 정의로운 기사로서 나 아나크렌의 황제 필리푸스 드 페렌티움 아나크렌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일단 존 워스는 더 이상 검왕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국 안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불러 주지 않을 거라는 거죠. 그리고 그에게 주어졌던 모든 특혜가 거두어졌습니다. 황실이 대신 관리하던 영지를 비롯해서, 품위 유지비도 끊어졌습니다. 뒤에 나온 말이지만 그렇게 거두어진 돈을 존 워스에게 죽은 기사들의 유가족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죽은 기사가 한둘이 아니니, 인당으로 보면 많은 액수는 아니겠네.”

존 워스의 처벌에 대한 따끈따끈한 소식을 들은 이드가 생색내기라는 듯한 말을 꺼내자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려 삼검왕인데요. 그들에게 내려진 영지나, 품위 유지비가 엄청났었나 봅니다. 못해도 최소 이천 골덴 이상은 돌아갈걸요?” 

이천 골덴이면 이십억이다.

“뭐야, 진짜 적은 돈이 아니잖아? 제국에서 그렇게 큰 혜택을 주었었다고?”

“놀라셨죠? 저도 이번에 알고 놀랐습니다.”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에단에 말없이 듣고 있던 검후가 작은 한숨과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혜택은 권력 대신이었어요.”

삼검왕의 명성은 높다.

검후와 함께 수많은 기사의 존경을 받는, 기사 중의 기사였으니까. 그러나 가진 실력에 비해 실질적인 권한이나 권력은 없었다.

일종의 명예직이랄까?

다른 곳에서 그와 같은 실력이었다면 최소 백작 이상의 작위에 거대 영지를 받고 정계에 나가 해당 나라의 핵심이 되었을 텐데. 삼검왕은 그럴 수 없었다.

검후를 따르며 무공을 연구하다 보니, 그럴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기사라고 하지만 인간인 이상 섭섭함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 소드 팰러스로 인해 대륙 모든 기사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제국은 그런 불만이 생기도록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렇게 주어진 것이 품위 유지비라는 명목의 위로금이었던 셈이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가네요. 그러니까 삼검왕 개개인이 가진 재산이 제국 후작급이란 거군요.’

“최소가 그렇죠. 다른 귀족들과 달리 사치할 일도 많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돈으론 한계가 있다. 어쩌면 결국 해소되지 못한 불만이 이런 형태로 폭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뒷말을 삼킨 검후를 보며 이드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사치는 안 했어도, 많이 남았을 거 같지도 않은데요?”

“어째서요?”

“그 돈으로 파티를 하는 대신 사람을 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 그렇군요!”

순간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번득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에 탄성을 터트렸다.

현재 삼검왕이 숨겨 둔 전력이 적지 않은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 그러나 기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든다.

과연 그 자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물론 지지자들의 도움도 있겠지만, 과연 그들만으로 가능할까? 자칫 비밀이 샐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걸 꺼내는 게 나았다.

세 명의 후작급 자금이라면 기사단 몇 개 꾸리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말이 되네요. 끙, 그렇다면 결국 제국의 뒤통수를 때릴 돈을 제국이 채워 준 것이 되겠군요.”

어째서 삼검왕의 꿍꿍이를 알게 된 후에도 그런 쪽으로는 헤아리지 못했을까. 검후의 이마에 가득 주름이 졌다.

그에 쉴라와 스폴이 붙어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드는 재빨리 화제를 존 워스의 처벌로 돌렸다.

“그리고 다른 건?”

“아? 아, 네! 그러니까, 보자. 어! 여깄네요. 제가 볼 땐 이게 검왕의 이름을 빼앗은 것만큼이나 영향이 클 것 같은데, 존 워스를 소드 팰러스에서 추방했습니다.”

“그게 가능해?”

분명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드 팰러스는 전 대륙의 기사들이 자유롭게 배움을 구할 수 있는 기사들의 성지지만, 그 이전에 제국에 속한 땅이니까.

좀 더 정확히 따지면 검후의 영지로, 자손이 없는 그녀의 사후 황실의 품으로 돌아갈 곳이기도 했다.

“이게 아무래도 뒤이은 처벌을 위한 포석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존 워스에게 내려진 걸 거두어 갔다면, 이어진 처벌은 추후 10년간, 죽어간 기사들을 대신해 제국의 전장에서 봉사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아예 돌아갈 곳을 없앤 거로군. 그럼 이제 그는 어디 소속이 되는 거지?”

“그게, 좀 희한합니다. 소속이 없어요.’

“그건・・・・・・ 여기저기 막 굴리겠다는 건가? 나중에 황녀님이 오시면 물어봐야겠네.”

내심 짚이는 부분이 있지만 이드는 성급하게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존 워스에 대한 처벌이었다. 강하다면 강하고, 약하다면 약할 수 있는 딱 애매한 범위였다.

존 워스를 쉽게 버릴 수 없는 제국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랄까.

스폴이 ‘약하다 약해’ 하는 소리를 연발하는 이유였다. 잠시 그렇게 거친 숨을 내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검왕도 이 소식을 들었을 텐데 반응이 나온 게 있나?”

“아, 있긴 있는데・・・・・・ 그게 좀.”

무언가 꺼림칙한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에단에 스폴이 대답을 재촉했다.

“좀, 뭐? 아는 게 있으면 어서 말해 보라고.”

“반응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그냥 웃었답니다. 소리 없이 희미하게.”

“그게 뭐야. 좋은 일도 아닌데, 왜 웃어?”

차라리 길길이 날뛰기를 바랐던 스폴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검왕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이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검후가 그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다고 할 수 있거늘, 그동안 그가 다른 꿈을 가진 걸 눈치챌 수 없었다. 배신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과연 그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에 반해 팔짱을 낀 이드는 천장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진 모습이다.

“어쩌면 기다리는 중인지도 모르겠네요.”

“기다린다니, 뭘요?”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드는 팔짱을 풀고 자신의 의견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지난 열흘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이번에 발표된 처벌에도 말없이 웃었다는 건 뭔가 계획대로 흘러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는 거야. 게다가 지금 그의 부하일 거로 의심되는 기사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지?”

“이제 마스 국경이 코앞이죠.”

도망자들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업데이트 중이던 에단이 즉답했다.

“그래. 그리고 결국 그들은 국경을 넘겠지. 그럼 그 뒤는? 정확한 건 없지만, 전쟁의 가능성이 가장 크지?”

“그러니까 이드 님께선 검왕이 마스와의 전쟁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할 거라고 보시는 거군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떤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확실할 것 같다는 거죠.’

“…..”

이드가 꺼내 놓은 말에 모두 말이 없다.

특히 집단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검후와 쉴라는 본능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는지 작게 수긍하는 분위기다. 그 모습에 이드가 짝 하고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그럼 검왕의 반응은 더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저는 슬슬 카논으로 갈 준비를 해 볼까요.”

물론 그 전에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겠지만 말이다.

“이드, 저도요.”

와이번이 황소를 낚아채듯 이드의 손을 잡아채는 일리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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