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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72화


1107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밤이 되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로 가득하더니, 온전히 밤이 되자 사람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이랄까?

농사일이란 것이 고되기도 고되고, 새벽부터 시작하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저녁과 밤에 보내는 시간이 짧다.

빨리 잠들고, 충분히 쉬어야 다음날 또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리 바삐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마음이 편해진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발소리가 다가왔다.

“제가 늦었군요. 두 분 다 충분히 쉬셨습니까?”

피터였다.

제법 멀끔한 모습이, 푹 잔 덕분인지 완전히 체력을 회복한 듯했다.

어찌 보면 적지일 수도 있는 곳에서 저렇게 깊이 잠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까.

“마리 씨가 잘 챙겨 준 덕분에 편히 쉬었어요.”

“주무시지는 않고요?”

자고 있었다면 마리가 챙길 것도 없다.

“딱히 피곤하지 않아서요. 잠은 제때 자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고.”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잠이 오는 것이 아닌 이상, 낮에 자는 것보다는 신체 리듬을 최대한 유지하는 게 좋았다.

“하하. 이러면 온전히 저 때문에 반나절을 날린 게 되는군요. 죄송해서 어쩌죠?”

“어차피 밤에 움직여야 했던 일이잖아요. 거기다 아침에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니 별로 미안한 것 같지도 않던데요.”

“맞습니다. 이쪽 일을 하려면 언제나 완벽해야 하거든요. 피로로 인한 실수는 최악이죠.”

“그럼 지금은 어때요?”

“최고지요. 비록 길잡이 나부랭이지만 필요한 대로 부려만 주십시오.”

이드는 자신이 길잡이임을 강조하는 피터의 모습에 고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마침 달도 없는 밤이다.

거리는 물론이고, 창으로 보이는 집들도 절반은 불이 꺼졌다.

이제 그들이 움직일 시간이다.

“그럼 바로 나가 보죠. 빨리빨리 끝내고 쉴 수 있도록.”

“마침 이쪽에서도 대기 중이었습니다.”

피터의 대답과 함께 마리와 찰스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몸에 착 붙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평범한 남편과 아낙이 아니라 은밀하고 냉정한 정보원의 모습이 된 것이다.

“영주 성까지는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마리의 말이었다.

선두에 선 그녀는 자신이 앞장선 이유를 직접 보여 줬다.

구불구불 연결된 그림자를 따라, 건물과 건물 사이의 사각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

영지에 둥지를 튼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텐데도 이미 성안을 완벽히 파악한 듯한 모습이다.

‘이래서야 밝은 보름달 밤이었더라도 우릴 볼 사람이 없겠네.’

이드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유능한 이들이 찾지 못한 ‘흔적’에 대한 잡념도 들었다.

다만 그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건물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영주 성이 점점 가까워진다 싶은 어느 순간.

“우측 전방 그림자 아래 남자 셋이 은신해 있군요. 모르는 사람이라면 재워 두겠습니다.” “아니요. 2조 동료들입니다.”

슬쩍 손가락을 말아 쥔 이드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과연 숨어 있던 이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까닥이더니, 다시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마치 이쪽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알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드의 눈이 마리를 향했다.

“마리 씨가 우리 대화 내용을 알려 준 겁니까?”

“네. 제가 이번 임무의 통신과 보고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침에 그들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다른 요원들의 소집 여부에 대해 물었었다.

아마도 그녀가 가진 초인기가 그와 관련되었으리라.

“그럼 아까 준비가 끝났다고 한 것도 저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까?”

“네. 주변 경계가 필요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괜한 짓이었을까요?”

“아니요. 잘 부탁하죠.”

어쨌든 아군이 더 있어서 나쁠 건 없다.

그리 생각한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의 뒤를 마저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영주 성은 단단한 방패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성문.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두 명의 기사와 여덟 명의 병사.

게다가 성 위에도 각각 네 명의 기사와 네 명의 병사가 있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그들 모두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굳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이쪽입니다.”

앞장선 마리를 따라가자 주변에 숨어 대기 중이던 초인들이 차례대로 초인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티틱티틱-

가장 먼저 경계를 위해 피운 불이 약해졌다.

뒤이어 땅과 하늘에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뭉게뭉게 일어나더니, 그 사이로 넓지만 약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곧 차고 뜨거운 기운에서 에너지를 받아 강풍이 되어 영주 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휘이이이~

“젠장. 또 시작이구먼. 뭐 하나? 장작 더 넣어!”

“넣고 있습니다. 기사님, 밤마다 이게 무슨 난린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지난달에 죽은 메이가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건 아닐까요?”

“헛소리. 메이가 뭐가 아쉬워서 떠돌아.”

“젊은 처녀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한이 없겠습니까?”

병사는 마을의 처녀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기사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반응.

그러나 그런 둘의 손에 신전에서 받은 작은 신상이 들려 있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이 팔린 덕분에 그들은 보지 못했다.

감시해야 할 공간 한쪽이 돋보기를 가져다 댄 듯 부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현상을.

슈루루룩

이드는 제 앞에서부터 성안까지 이어진 터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을 공간 굴절에 사용한 거로군요.”

게다가 이 바람 터널은 바람의 방향만 바꿔 생성한 것으로, 그 덕분에 사용된 초인력이 아주 적어 기사들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그리 말한 마리가 먼저 몸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우주에 떠오르듯 둥둥 떠서 성안으로 이동되었다.

터널을 만든 초인이 바람을 조종한 것이다.

“재밌겠네요.”

그 뒤를 따라 라미아, 이드 순으로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바람을 타고 터널을 이동하는 건 마치 스스로가 총알이 된 느낌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셔야 해요.”

성안에 발을 들임과 동시에 몸을 숙인 마리가 각각 왼쪽과 정면을 가리켜 보였다.

“지하실은 저쪽에서 한 번 더 꺾어 들어가면 나오고, 금고 방은 정면에 있는 계단을 통해 두 층 올라가서 나오는 오른쪽 복도 끝에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이드를 힐끗 쳐다본 마리가 피터를 향해 물었다.

처음엔 이드를 대단한 손님 정도로 여겼지만, 이어지는 피터의 모습을 통해 이번 일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을 이드가 가졌음을 눈치챈 그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질이 없는 상태에서 상관인 피터를 무시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네들은 지금부터 나보다 두 분의 명령을 우선하도록 하고.”

과연 마리의 속을 알아차린 것인지 피터는 이드를 눈짓해 보였다.

그에 마리와 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이런 상황에서 될 수 있는 한 소리는 없는 것이 좋다.

결정권을 넘겨받은 이드는 지하와 금고 방을 번갈아 본 후 말했다.

“하나씩 처리할 게 아니라, 동시에 살펴보죠. 저와 피터는 지하. 나머지는 금고 방. 빠르게 확인하고 빠집시다. 아직 다른 곳도 남았으니까.” 

반대는 없었다.

일행은 즉시 둘로 나뉘어 이동을 시작했다.

라미아 일행 쪽은 마리가 앞에 서서 사각을 따라 이동했고,

“그림자로 주변을 가리겠습니다.”

이드 쪽에선 피터가 섀도우 워퍼를 사용했다.

이드에겐 필요 없는 친절이지만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하로 이동하는 사이, 피터는 점점 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위대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이드 명예 후작의 솜씨를 직접 보게 되는 건가!’

그 미친 듯 빠른 속도는 앞서 경험했지만, 그래도 달리기와 싸움은 분류 자체가 다르다.

통통통. 퉁퉁퉁.

지하의 입구와 가까워짐에 따라 심장의 뜀박질이 격해졌다.

그때, 마리가 말한 코너를 돌아서자 과연 계단을 막고 선 네 명의 기사가 보였다.

‘저들이구나.’

피터의 동공이 넓게 열렸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풀풀 풍기는 기사들.

과연 명예 후작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대감에 이드를 돌아본 피터는 곧 황망한 표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박타박.

이드가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지하실의 입구를 향해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섀도우 워퍼가 드리운 그림자 장막을 넘어서 말이다.

“…….”

피터는 곧 벌어질 상황에 숨을 멈췄다.

침입을 위한 전투는 이미 상정하고 있었다.

빈틈을 찾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은밀해야 했다.

온성이 알 정도로 시끄러워서야 영지에 마련한 둥지도 오늘로서 끝이다.

‘젠장. 내가 사람을 잘못봤나?’

그렇게 생각하는 그를.

“안 오고 뭐 합니까?”

이드가 불렀다.

“어…… 떻게?”

피터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드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기사들은 여전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드는 그대로 멈춰 버린 피터를 보며 다시 한번 손짓을 했고, 피터는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기사들 얼굴 앞에 제 손을 흔들어 보이고서야 그들이 그 자세 그대로 정신을 놓았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도대체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것도 네 명을 동시에.”

“보다시피 점혈입니다.”

“제가 본 점혈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또, 점혈하시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고요.”

쉽게 놀라움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피터.

하긴, 취을난지는 그가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로 쉬운 공력이 아니었다.

당장 그보다 전투 능력이 뛰어난 네 명의 기사도 저도 모르는 새 맥없이 당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드는 굳이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초인기 중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와 비슷한 겁니다. 그보다, 안 내려올 겁니까?”

“・・・・・・ 당연히 같이 가야지요.”

급히 발걸음을 뗀 피터는 이드의 깔끔한 처리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아쉬웠다.

‘드디어 명예 후작의 실력을 직접 보나 했더니.’

그렇게 둘은 지하실을 내려갔지만, 그들이 다시 계단을 올라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빈손이었다.

다만 앞에 선 이드는 조금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완전히 관련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지하실을 나와 코너를 돌아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슈슈슉.

취을난지가 기사들을 깨웠다.

“……크으흠.”

갑자기 정신이 든 기사들은 깜빡 잠든 것이 부끄러워 말없이 눈만 부릅떴다.

설마 누군가가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점혈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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