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75화
1110화
마리를 포함한 바벨의 정보원들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영주 성안에서는 현 뱅커올슨 남작이 평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서재로 꾸며진 집무실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패턴. 이때 집무실에는 그 누구라도 접근할 수 없었다.
남작이 강력하게 명령한 일이었다.
스으읍.
훕ᅳ 후우-
그렇게 밖과 완전히 단절된 집무실 안에서는 특이한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짧게 들이쉰 후, 두 번 끊어 뱉는다.
전체적으로 매우 느리고 고요했다.
이는 남작이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에 따른 호흡이었다.
사람의 접근을 막은 남작은 집무실에서 내공을 운기 중이던 것이다.
한데 중앙에 앉은 남작의 모습이 호흡법만큼이나 특이했다.
이드로부터 무공이 시작된 후, 가부좌는 내공 수련의 기본자세였다.
이후 마법사들을 동반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동공과 와공 등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안정성과 발전성 면에서 가부좌를 대체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한데 지금 남작의 자세는 어떤가.
그는 마치 주군께 인사를 올리는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었다.
온갖 기괴한 내공심법이 많은 중원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렇게 호흡에 집중한 남작의 어깨 위로 짙은 자주색의 아우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몸 내부에서 응축된 내력이 자연스럽게 뿜어지는 형태로, 최소 절정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다시 말해 마스터로서 겨우 검기를 다룰 수 있다고 알려진 남작에게서는 볼 수 없어야 하는 현상이었다.
만약 누군가 지금 그의 모습을 보고 소문을 퍼뜨린다면 당장 영주 성에 있는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둔재로 알려진 남작이 마스터를 넘어 그레이트소드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아아아.”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운기가 끝나고, 남작의 호흡도 일반적인 방식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운기 직후의 충만한 기운을 느끼며 한쪽에 세워 든 검을 뽑아 들었다. 긴긴 세월 자신의 피와 땀을 먹여 키운 병기.
우우웅~
그런 검에서 선명한 자주색 검강이 솟아올랐다.
한때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포기했었던 바로 그 빛
파괴의 결정체이자, 영광의 상징.
하루 이틀 지난 것이 아님에도 검강을 마주할 때마다 감격스러운 남작이었다.
“스승님.”
동시에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 역시 커져만 간다.
인생의 목표에 닿을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어 준 분이니까.
그는 은혜를 아는 남자였다.
“모든 일은 스승님이 바라시는 대로 완벽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심정으로 맹세를 굳힌 남작은 내공과 검을 갈무리했다.
최소한 스승의 일이 완성될 때까지는 이에 대해 세상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딸랑,
“부르셨습니까.”
“내가 지시했던 요리는 끝이 났나?”
“좀 전 확인했을 때 마지막 디저트를 준비 중이라 했으니 곧 완성이 될 듯합니다.”
“좋군. 그럼 이전처럼 자네가 하나하나 확인 후 여기 담아 가져 오게.”
남작은 책상 위에 올려둔 보석함처럼 생긴 작은 상자를 꺼냈다.
디저트도 넣기 힘들어 보였지만, 거기에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었다.
몇 번이나 본 상자를 받아든 집사는 약간의 걱정을 담아 남작을 살폈다.
“요리를 준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어떤 일로 이런 준비를 하시는지 알 수 없어 조금 걱정이 됩니다.”
“하핫. 절대 나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이후 집사를 내보낸 남작은 차분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차피 이 일이 끝날 날도 머지않았다.
그때가 바로 뱅커올슨 남작가가 다시 정계에 나서는 기념일이 될 것이다.
“흐음, 이번엔 술도 좀 챙길까. 아무래도 혼자 계실 때는 적적하실 테니.”
짧은 고민 후 남작은 다시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시골 영지에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다들 이른 잠자리에 들어 집집마다 불이 꺼질 때.
은밀히 둥지를 나선 이드와 그 일행은 영주 성이 가장 잘 보이는 어느 상단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했다.
남작이 언제 움직일지 몰라 좀 이른 시간에 나온 탓에 거리에 아직 사람이 있었지만, 이드 일행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피터의 섀도우 워퍼가 옥상을 중심으로 그림자 장막을 두른 덕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옥상에 모인 이들의 얼굴도 조금 달라졌다.
정보원들 사이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는 마리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 옆을 지키는 인물은 찰스가 아니었다.
그 대신 강렬한 매부리코에 눈썹이 없어서 척 보기에도 흉악해 보이는 얼굴을 한 톰이라는 남자가 함께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흔해 빠진 이름의 소유자인 그의 능력은 바람 소리.
흉악한 얼굴과 달리 바람이 섬세하게 결을 읽어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감지계 초인기의 소유자였다.
마리는 함께 파견된 요원 중 톰을 포함해서 감지에 특화된 세 사람을 영주 성을 감싸듯이 배치한 후, 나머지 요원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키도록 했다.
“아무래도 남작의 이동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만큼 그 행적을 밝히는 방향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남작이 직접 움직인다면 톰이, 마법이나 숨겨진 초인이 돕는다면 다른 두 사람이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있다면?”
“마법과 초인기를 쓴다면 사용 여부 자체는 알아내도 목적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이 경우 남작의 추적이 매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마리의 얼굴은 우울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음에도 남작의 복귀를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내심 남작의 이동에 마법이 사용되었으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이드는 그런 마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마법을 사용했다면 추적은 더 쉽습니다.”
“네? 그 말씀은, 마법의 잔류를 쫓을 방법이 있으시다는……?”
“여기 있는 제 아내가 대단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목적지 정도는 금방 찾아낼 수 있지요.”
사실 라미아의 실력이야 겨우 대단하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말이 되게 하려면 인간이 아닌 드래곤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될까.
문제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입장에선 그저 아내에게 푹 빠진 팔불출로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럼 마법에 대한 부분은 두 분을 믿겠습니다.”
그럼에도 의심의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 것은 귀한 손님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굉장한 실력자임을 앞서 확인한 탓이다.
라미아는 금고 방에서, 그리고 이드는 닷새를 굶은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돌아온 찰스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어차피 당장 존 워스의 행적이 가장 절실한 것도 자신들이 아니라 이 귀한 손님들이었다.
‘아무렴 어때. 일단 제일 골치 아픈 문제에서 우리가 빠졌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에 이 기쁜 소식을 곧장 동료들에게 알린 마리는 더욱 열심히 감시에 온 힘을 다했다.
다만 그런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남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즈음이었다.
남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실 창이 열렸습니다.”
톰의 말에 이드는 즉시 영주 성을 살폈고, 과연 침실에 있는 창을 통해 나서는 남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옷에 날카로운 검을 든 남작의 모습은 마치 도둑 같았다.
거기에 그 움직임이 능숙하고 매끄러운 것을 보아 저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마법을 이용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럴 거라면 굳이 창문을 열고 나올 이유도 없다.
이드의 말에 마리가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눈을 피한 것일까.
모두가 그런 의문을 담아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주변에 대한 경계를 마친 남작이 성벽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발, 두 발. 그리고.
“헛!”
갑자기 남작이 사라졌다.
마리는 당혹감에 헛바람을 삼켰고, 피터의 눈은 가늘어졌다.
“설마 남작 본인이 초인이었다고?”
마법처럼 화려하지 않고,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처럼 갑작스럽지 않다.
품위가 느껴질 정도의 자연스러움이 이런 의심을 들게 만들었다.
“저걸 보고도 떠오르는 게 초인기인 건가.”
그리고 이드는 이런 피터의 반응이 안타까웠다.
눈앞에서 빤히 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초인 어쩌고 하는 소릴 하다니.
이걸 피터의 눈썰미가 모자란 탓을 해야 할지, 무공의 위대함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탓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나저나 저런 은잠술이라니. 누가 만든 거지?’
저만큼 은밀하면 거의 한 문파의 비전으로 취급될 만했다.
어떤 인물이 저런 무공을 창안했는지, 또 그 무공을 어떻게 남작이 익히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당장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엔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다.
피터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다가왔다.
“자칫 남작을 이대로 놓치는 것・・・・・・ 은 아니겠군요. 혹시 보이십니까?”
그는 말을 하던 중 이드와 톰의 시선이 한 방향을 향한 걸 보고는 슬쩍 말을 바꿨다.
“잘 보고 있죠.”
“톰?”
“서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경공술이 엄청나네요. 굉장히 빠릅니다. 거의 날아가는 수준인데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초인기를 이용해 모습을 숨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초인이 내는 특유의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초인이 아니면 어떻게 저리 사라지나………….”
톰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흔들던 피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고, 그 시선을 받은 이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초인기가 아니어도 가능합니다. 무공으로도 충분히 모습을 숨길 수가 있죠.
“크흠. 이건 제가 무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무공을 익히신 것도 아닌데 모르는 부분에 대해 죄송할 거야 없지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걸 따지기보다 남작을 쫓는 게 우선입니다. 벌써 성벽을 넘었군요.”
이드가 단숨에 성벽을 뛰어넘는 남작의 모습을 설명하자, 피터와 마리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감시조를 추적조로 재편성, 추적을 시작하겠습니다.”
“가시죠. 이번엔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두 사람이 아무래도 이를 갈고 준비한 모양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주 성 근처에서 십여 개의 인형이 솟아오르더니, 남작이 사라진 서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도 라미아의 손을 잡고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과연 어디로 가는 건지, 남작의 목적지가 심히 궁금했다.
“과연 그가 향하는 곳에 존 워스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