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81화
1116화
이 층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고블린이었다.
길을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 앞을 막고 나타난 놈들은 수도 많은 데다 야성이 폭발한 건지 눈마저 시뻘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고블린은 고블린일 뿐이다.
덕분에 피터만 신났다.
“하하하. 이건 누가 봐도 제 몫이로군요.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추적조도 주저앉은 상태에서 이드 부부의 뒤꽁무니만 쫓던 그로선 지부장 체면이 말이 아니었는데, 이제야 겨우 활약할 구석이 생긴 것이다. 그의 마음을 아는 섀도우 워퍼가 신나게 춤을 췄고,
“켁…….”
“케륵. 케르르륵!”
그 뒤를 고블린의 단말마가 따랐다.
그런 일방적인 학살에도 이미 눈이 돌아갔기 때문인지 놈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는 문득 안쓰러움에 혀를 찼다.
당연히 고블린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고, 과거 여기에 섰을 초인들에 대한 애도였다.
고블린이 만만한 놈들은 아니지만, 훈련받은 병사라면 한두 마리쯤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하나 지금처럼 저만한 숫자를 앞에 두었다면 최소 마스터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했다.
문제는 초인들이, 그것도 초인기를 쓸 수 없는 초인들이 이곳에 있을 때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성 밖보다 마법의 영향이 약한 것도 일부러 그런 거겠지?”
이드가 그 사실을 안 건 성안에 발을 들인 직후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강력한 의념 마법으로 초인들을 쓰러뜨릴 거였다면 굳이 이런 장치들이 있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성에 발을 디디는 순간, 가까스로 여기까지 온 초인들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의념 마법이 약해졌다.
거기에 이 층은 일 층보다도 조금 더 희미했다.
그렇다고 초인기를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맨몸으로 저 많은 고블린 앞에 던져진다는 말인데.
그건 그냥 죽으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일 층에선 두려움을. 이 층에선 공포를 이 패턴은 딱 흑마법 쪽인데 말이에요.
“흑마법에 이런 과정이 필요해?”
“제물이 있을 때요. 그냥 올리는 것보다 정신과 감정을 극한으로 몬 후에 바치는 편이 더 효과가 좋거든요. 마신과 악마들이 만족스러워하니까요.”
“하지만 혼돈의 파편이 뭐가 아쉬워서 흑마법을 써?”
세상의 종말을 여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마신이고, 악마다.
“지금 우리 둘 다 그 이유를 몰라서 끙끙거리는 거잖아요. 아, 다 쓰러졌네요.”
아닌 게 아니라 복도는 어느덧 흥건한 피 때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자리하던 피터는 한껏 즐거운 표정을 한 채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 살육하는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리 생각할 사람은 없으리라.
이미 몬스터는 이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적이니까.
“완벽히 처리했습니다. 그나저나 몸이 가뿐한 게, 아무래도 저희를 괴롭히던 마법은 중단된 듯합니다. 확인을 위해 잠시 섀도우 워퍼를 풀어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걸 푸는 순간 다시 초인기를 사용하긴 어려울 테니까요.”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라미아와 이야기하던 주제였다.
해서 위협적으로 경고를 날리는 이드였다.
그와 함께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 말해줬다.
“…….”
밖에 있을 추적조를 염두에 두고 말을 꺼냈던 피터로서는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호론석 결계를 넘는 순간 시작된 공격이 사실은 오로지 초인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쩐지 초인 발생 초기에 있었다는 사건들이 떠오르는군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과거 그 시절에 초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실험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냥하고, 태워 보고, 갈라 보는 마법사들의 연구 대상 말이다.
당시의 일을 떠올린 것인지 피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모를 일이죠.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끝에 그 답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 말한 이드가 고블린 시체 사이를 걸어 나갔다.
피가 흥건했지만, 그 위를 걸어가는 이드의 발엔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파팟.
그리고 그건 단숨에 이드 옆으로 공간을 뛰어넘은 라미아도 마찬가지. 피터는 자신이 도륙한 고블린들을 잠시 노려보고는 곧 그 뒤를 따랐다. 뒤이어 나온 것은 여러 마리의 트롤이었고, 그다음은 오크였다. 이 몬스터들 역시 피터가 직접 상대했다.
스스로 공격 능력이 부족하다던 그의 힘은 말과 달리 강력했다.
과연 그냥 지부장에 오른 건 아니었다.
그리고 오크를 모두 도륙한 후에야 이드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다.
그걸 발견한 건 오크들이 웅크리고 있던 석실 안에서였다.
캄캄하고 냄새나는 공간이기에 보통이라면 가까이 가지 않고 지나쳤겠지만, 어둠을 꿰뚫는 이드의 신안 덕에 그 안에 쌓여 있는 게 훤히 보였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뼈였다.
오크나 저 앞에 있는 고블린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뼈.
“이건・・”
그 앞에 선 피터는 참혹한 얼굴로 말을 잊지 못했다.
그에 비해 이드와 라미아는 짐작한 일이었다는 양 침착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일 층에 가득하던 죽음의 흔적과 달리 시체가 없었거든요. 장치들 사이에 끼어 있는 뼈를 봐서는 그리 열심히 치운 것 같지도 않고. 그러던 차에 이 층에서 몬스터의 냄새가 나기에 혹시나 했죠.”
물론 이드도 확신을 하진 못했다.
라미아가 던전에서 사용되는 동결이라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해서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세상일이란 것이 참 묘하게도 안 좋은 예감은 거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하하하. 이거 미치겠군요. 바벨이 초인을 수호하기 시작한 이후 감히 이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은 없었는데, 마탑이란 잡것들에 이어 이곳까지! 뿌드득. 이 일에 관련된 자라면 설령 황제일지라도 바벨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가 부서질 기세로 앙다문 피터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드는 절절히 느껴지는 분노에 과연 그가 미완의 마탑에 대해 알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물론 초인을 상대로 벌인 짓은 여기가 좀 더 잔악하지만, 초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은 것은 미완의 마탑 역시 마찬가지.
그에 대해 많은 초인들이 함께 분노했다.
하나 그 뒤에서 미완의 마탑을 지원하고 있던 곳이 바로 바벨이 아니었던가.
과연 그런 그들이 이 공간의 주인에게 분노할 권리가 있을까.
“이 뼈들은 나중에 수습하고, 일단 가시죠.”
겨우 화를 수습한 피터가 여전히 식식대는 숨을 뱉으며 말했다.
만약 그가 미완의 마탑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그걸 처음 인지했을 때 역시 지금처럼 분노했을 듯하다. ‘하긴, 단체의 결정이 항상 소속된 개인들의 뜻은 아니지.”
조직 상부에서 더러운 일을 진행하고 감춰 버리면 하부의 사람들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드는 앞으로 쿵쿵 걸어 나가는 피터를 빠르게 멈춰 세웠다.
“피터 씨, 잠깐 멈춰 보세요. 이 복도의 용도는 대략 확인이 된 것 같은데, 굳이 더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앞도 제물 준비 과정을 따른다면 확실히 좋은 꼴은 못 보죠. 두려움, 공포, 절망, 붕괴 순으로 제물의 영혼을 유도하는 장치들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요.”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동시에 암울함을 가져다주는 예견이다.
“듣기만 해도 하나같이 재미없을 것 같네.”
단순히 재미만 없으면 다행이지, 이건 괜찮은 기분도 바닥에 처박는 수준이었다.
“더더욱 볼 필요 없겠어. 그러니 우린 지름길로 가도록 하죠.’
말과 함께 벽으로 향하는 이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성 밖이 아니라 성안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그 너머엔 당연히 이 성의 심부가 있을 터였다.
‘・・・・・・・ 있기야 하겠지만, 저래도 되는 건가?’
무언가 금기를 범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피터였다.
길이 위험해서 벽을 부순다?
그리 쉽게 부서지게 만들지도 않았을뿐더러, 이 성의 주인이 그런 간단한 시도에 대비도 하지 않았을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벽을 부수면 뭔가 함정 같은 것이………….”
그런 불안이 피터를 조급하게 만들었지만, 이드가 검을 뽑는 걸 막지는 못했다.
“함정이 나오면…….”
팅.
“베어 버리면 됩니다. 간단하죠?”
칼끝이 미세하게 벽에 박힌 다음 순간.
촤자자자작!
거미줄 모양의 금이 생기는가 싶더니, 한쪽 벽면이 통째로 무너졌다.
넓이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높이는 일 층부터 사 층 일부까지.
휘이이-
그렇게 무너진 벽 너머로 신선한 바람과 함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숨겨진 함정 같은 건 없었다.
이 끔찍한 복도를 감싸고 있는 건 단단한 돌덩이일 뿐이었다.
그 두께가 어지간한 사람 키만 하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스~ 흡. 이제 좀 살겠군요.”
복도 끝으로 걸어간 이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 층은 그래도 견딜 만했지만, 몬스터들이 가득한 이 층은 정말 숨쉬기도 힘들 만큼 고약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맑은 공기를 집어넣은 후에야 보이는 것들.
“이걸 뭐라고 하냐, 공간 낭비의 극한이라고 해야 해?”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벽 너머라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디넓은 연무장과 그걸 두르고 있는 성벽뿐이었다.
밖에서 봤던 그 커다란 성이 사실은 속 빈 강정이었던 거다.
생긴 건 딱 콜로세움인데, 관람석도 없다.
하긴 이런 공간에 누가 찾아온다고 관람석을 만들까.
오히려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공간 그 자체를 먼저 본 이드와 달리 그 안의 것을 먼저 살핀 라미아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공간 낭비라고는 할 수 없죠. 이런 초대형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사방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치 눈에 보이는 마법진을 통째로 머릿속에 새기기라도 할 기세다.
“저쪽이 안 보여! 저 먼저 내려갈게요.”
뭐가 그리 급한지 말과 동시에 뛰어내리는 라미아다.
“저희도 내려가죠.”
이드와 피터도 그 뒤를 따랐다.
안쪽에서 바라본 콜로세움의 규모는 한층 대단했다.
그렇게 살피던 이드는 이윽고 웬 제단을 발견했다.
단순히 연무장으로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매끄러운 돌을 깔아 놓은 한쪽, 단순하지만 겹겹이 쌓여 삼 층을 이룬 제단은 확실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같은 것을 눈에 담은 듯, 라미아가 곁으로 다가왔다.
“제물을 바치는 곳이에요. 저 위에 구멍이 뚫려 있죠?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가면 결국 저 구멍으로 도착하게 되는 구조예요. 그리고 스스로 제단에 몸을 던지는 거죠. 저기 도착할 때쯤엔 정신이 붕괴된 상태일 테니까요.
그러면서 잠시 말을 끊은 라미아는 콜로세움을 가득 채운 마법진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도대체 누구에게 바치는 제물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심지어 이 마법진도 처음 보는 거고요.”
과연 열심히 살펴본 이유가 있었구나.
내심 고개를 끄덕인 이드는 천천히 연무장의 반대쪽을 향해 말했다.
“이렇다고 하는데, 어떻게, 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