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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82화


1117화

이드가 시선을 준 곳에는 색이 빠져 칙칙하긴 하지만 단정한 모양새의 금발을 소유한 사십 대 남자가 있었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 비율이 좋았다.

어깨와 가슴은 떡 벌어져 있었고, 곳곳에 단련된 근육의 모습도 선명했다.

뭐랄까. 잘 가꾼 중년?

파티에 참석하면 귀부인들에게 인기 절정일 듯하다.

하지만 여긴 파티장이 아니었다. 전투가 예상되는 전장에선 오로지 능력만이 중요할 뿐.

당연히 눈을 가늘게 뜬 이드가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의 신묘한 힘 때문이었다.

남자는 콜로세움의 벽을 따라 세워진 작은 기둥의 그림자를 빠져나왔다.

크기는 두 뼘 정도에, 반사된 빛에 셰이드도 꼽사리 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상태가 좋지 않은 그림자였다.

일반인이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재주를 보면 누구나 초인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그림자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피터와도 동류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하나 이드는 그가 절대 초인이 아님을 알았다.

애초에 저 남자는 그림자에 숨은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운 것이었다.

그 사실에 이드는 내심 크게 감탄 중이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기살이다. 경지에 이르렀어.’

그야말로 최고의 칭찬이었다.

라미아가 놀라며 물었다.

“헤에~ 이드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대단한 거예요?’

‘어. 그레센뿐 아니라 중원까지 통틀어서 내가 본 것 중 최고야. 그쪽으로 특화된 기술을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정도라니, 그야말로 재능이네. 익힌 무공도 가볍지 않아 보이고.’

‘재능까지? 어휴, 칭찬이 너무 과하네. 누가 보면 친척인 줄 알겠어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난 그냥 보이는 그대로 말할 뿐이거든!’

이드는 혈연, 지연, 학연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게 무공 실력을 높여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상대의 예사롭지 않은 무공 수준이었다.

그건 상대의 무게 중심, 보신경의 형태, 손과 눈의 흐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운과 기세를 살피며 자연히 드러나게 되곤 했다.

갸웃.

그렇게 상대를 관찰하는 이드의 눈에 거슬리는 잡티처럼 자연스럽게 피터가 들어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어째 긴가민가한 모습이다.

당연히 그 대상은 새롭게 나타난 남자일 테고.

‘친척이냐는 질문은 내가 아니라 피터 씨에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게요. 상대 반응도 볼 겸 진짜 아냐고 물어볼까요?’

‘어. 내가 보고 있을게.’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미아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림자를 나선 남자 역시 같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답이라. 그런 걸 요구…….”

“미안하지만 거기 이름 모를 분? 이쪽이 먼저 해결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

“고마워요.”

이런 경우는 처음인 듯, 눈만 껌뻑거리는 남자에 감사를 표한 라미아가 피터를 돌려세웠다.

“방금 보니까 저 사람에 대해서 뭔가 떠오른 것 같은데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관련된 정보가 있다든가.”

“하하. 이거 곤란하군요.”

이런 질답은 보통 은밀하게 주고받지 않던가.

신선하다기보단 낯선 경험에 피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금방 웃음을 멈춘 그는 라미아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했다.

“그게 참, 난감합니다. 분명 저는 저 사람을 본 기억도 없고, 일치하는 정보도 없습니다. 한데 묘하게 낮은 익어요. 신기한 일이지요. 제가 누군가를 직접 만나거나 자료로 접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피터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이드는 가만히 남자를 살폈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밝힐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최대한 확실한 정보를 얻고 시작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나름 의미 있는 반응을 얻었다.

경지에 오른 무공과 달리 부동심을 함께 얻지는 못했는지, ‘기억’과 ‘정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걸 토대로 해석해 보면 세간에 얼굴이 알려질 일이 있었고, 동시에 그에 관한 정보가 퍼질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얘긴데. 

‘어째서 피터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얼굴이 바뀌었나 싶지만, 역용을 하거나 일루전 마법을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다른 방법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단서나마 얻었으니 이득이었다.

지금부터는 직접 부딪혀 볼 차례다.

피터를 뒤로 물린 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내 동료의 기억력이 부족한 듯하니, 이참에 우리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어려울 것 없지. 난 블랙이오.”

블랙은 개뿔.

뻔뻔하게 묘한 이름을 입에 담는 블랙에 이드의 미간에 절로 주름이 갔다.

“어떻게 최근엔 제대로 된 이름을 하나도 들을 수가 없는 건지. 뭐, 좋소. 난 블루요.

“블루?”

“내 아내가 좋아하는 색이오.”

“나보다 낫군. 뒤에 있는 레이디가 부인이오? 아주 당당하고 재미있는 분이던데. 따분한 보통 마법사들과는 다른 분이었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좋은 인상을 받은 듯 말하는 블랙이다.

그에 라미아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피터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블랙의 상대를 완전히 이드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그걸 아는지 블랙도 이드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내가 주인 된 입장이니 먼저 묻겠소. 원하는 것이 뭐요? 이곳에 어떻게 들어온 거요?”

“원하는 건 우리가 가진 의문에 대한 답이오. 뭘 궁금해하는지는 아까 들었을 것이고. 그리고 어떻게 들어왔느냐. 그건 우리보다 저 안에 있는 남작님께 직접 물어보는 편이 더 빠르지 않겠소?”

“뭐, 예상했던 일이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군.”

“그러지 말고 남작님께서도 밝은 곳으로 나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서로 얼굴은 한번 봐야지요.’ 말과 함께 블랙의 어깨 너머에 있는 출입구를 바라보는 이드.

“……윽.”

그에 돌연 작은 신음이 출입구 밖으로 흘러나왔다. 조심조심 밖을 살피던 남작이 이드의 안광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쯧쯧. 바보 제자 놈.”

블랙은 그런 대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강하게 혀를 찼다.

추적당한 것이야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고작 눈빛에 제압당해 신음을 흘린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자라서일까.

슬쩍 자세를 바꿔 이드의 눈빛을 가린 블랙이 말했다.

“우리 선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다시 묻지. 원하는 것이 뭐요?”

“……이 공간, 이 성의 용도, 해골 더미의 사연. 존 워스의 목적과 남작, 그리고 당신의 관계와 진짜 이름이 알고 싶소.”

“추가로 마법진의 용도도요. 중요한 거라고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가된 라미아의 요구사항.

“그렇다는구려, 어떻게, 이 중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있겠소?”

그리고는 블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드.

그러자 블랙은 갑자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엇이 웃긴 걸까.

그렇게 기운이 빠질 정도로 시원하게 웃어 젖힌 블랙이 눈가에 찔끔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좋군. 아주 좋아. 이거야 어디, 도저히 발을 뺄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질문이었소. 나오지 않길 바라는 모든 질문이 나오고, ‘그분’의 이름까지 나오다니. 이래서야 그대들을 도저히 그냥 보낼 수 없지 않소.”

일순간이었다.

미끈한 미중년 같던 블랙의 기세가 갑자기 돌변했다.

그건 마치 인간이 야수로 변한 듯한 느낌이었다.

차분히 갈무리된 살기가 뜨거운 열기에 날뛰는 것 같달까.

저만큼 내력과 살기를 갈무리한 고수가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다니, 특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강력한 기세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기세에서 시작된 기파가 요동쳤다.

“큽.”

가장 먼저, 또 유일하게 충격받은 인물은 피터였다.

마스터의 경지를 넘은 고수의 기파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의념 마법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 자체로 피터에겐 검기와 다르지 않았다.

기파에 부딪힌 그림자가 흔들리며 약해지고, 피터가 휘청거렸다.

늦지 않게 라미아의 포스 실드가 그들을 감쌌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피터의 초인기가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확인한 라미아가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린 뒤로 좀 물러나 있죠.”

파앗.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이드가 무너트린 벽 안쪽 2층 복도에 있었다.

연무장이 워낙 넓어 어지간해서는 전투의 충격에 전해지지 않을 위치였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마주 선 블랙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는 검집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있었다. 끝을 보기 전엔 검을 회수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릴 보내 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군.”

“정확하오.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허락 없이는 누구도 나갈 수 없소. 나조차 말이오.”

이드는 어쩐지 그의 마지막 말이 서글피 들린다 싶었다.

어떤 이유인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과연 그렇다면 심화가 쌓이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폐관수련하기 좋은 공간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 우리가 당신을 나갈 수 있게 해 준다면 어떻소? 거래가 가능하겠소?”

“흐흐,”

순간 블랙의 입가가 순진하게 벌어지며 웃음이 샌다. 그리고 그 모습이 희미해지기 전.

슈콰콰콰

폭퐁과 같은 바람을 휘감은 블랙의 신형이 오른쪽에 나타나며 빗살 같은 검을 휘둘렀다.

기살도 그렇지만, 완벽한 이형환위의 수법,

이런 빠르기에 이런 위력이라니. 약간만 방심한다면 저 삼검왕조차 쉽게 다진 고깃덩이로 만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드는 삼검왕 따위가 아니다.

휘휘휘휘ᅳ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격을 향해 이드의 팔이 올라갔다.

오행대천공 풍령장의 공능이 실린 움직임을 따라 바람의 결이 바뀌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수백의 바람의 결이 쌓여 벽을 만들더니, 부드럽게 이드를 밀어냈다.

그와 함께 이드는 볼 수 있었다.

분명 전력을 다한 공격을 날리면서도 녹여 먹으려던 사탕을 깨 먹은 아이처럼 아까워하던 블랙이었다.

한데 자신이 공격을 피하자 그 얼굴이 안도와 기쁨으로 일그러졌다.

“하필 이런 골치 아픈 인간을 만나나.”

순수하기까지 한 투쟁욕이었다.

그 모습에 이드는 진절머리를 냈다.

저런 인간이라면 어떤 말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혹은 둘 중 하나가 끝장이 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스르르릉.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오십 미터를 미끄러져 간 이드가 검을 뽑았다.

“좋군! 좋아! 낙원을 향해 달려 보자!”

그 모습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는 블랙. 그리고 그건 단서였다.

“낙원? 설마 황혼? 황혼의 기사가 대체 왜 여기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피터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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