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683화


1118화

황혼의 기사 이베인.

그는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익히지 않는 전통적인 수련 방법을 고집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해서 별칭 속 ‘황혼’에는 그에 대한 존경과 조롱이 동시에 담겼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기사라니.

전쟁으로 인해 다른 나라보다 시작이 늦긴 했지만, 카논에도 무공은 스며들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기사가 익혔고, 그런 그들도 검후에게서 더 많은 배움을 얻고자 한다.

이베인은 이런 흐름을 정면으로 거부한 이였다.

그는 제국과 자신의 가문이 여태껏 쌓아 올린 무도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공이 없던 시절에도 그레이트 소드 마스터는 존재했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대한 기록도 전설처럼이나마 남아 있었으니까.

과연 그는 또래 중 가장 먼저 소드 마스터에 도달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헛소리가 아님을 어느 정도 증명했다.

정말 엄청난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말뿐이 아니라 직접 결과를 보여 주었기에 세상은 그를 주목했고, 끊임없는 칭찬이 쏟아졌다.

다른 한편으론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 재능으로 무공을 익혔다면, 하고 말이다.

동시에 저와 같은 성장은 계속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머지않은 그 말은 진실이 되었다.

가장 먼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밟은 이베인은 이후 누구보다 발전이 더뎌졌다.

동기는 물론, 후배들도 하나둘 그를 앞서갔다.

그를 칭찬하던 입들은 어느새 낡은 전통은 버리고 무공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베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철의 낙원이라 이름 붙인 자신의 수련장에서 더욱 피땀 흘리며 수련에 힘썼다.

일견 고집과 아집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꾸준했다. 별명에 황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기사 수련을 하는 사람은 그가 마지막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지나 노년에 이르렀을 때, 이베인은 겨우 검강을 얻었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게 자취를 감췄던 그가 완전 새로운 모습으로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까운 인물이네요. 그런데,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피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라미아가 물었다.

“황혼의 기사가 말버릇처럼 내뱉던 단어가 바로 ‘낙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은 곳이라서인지 몰라도, 늘 강철의 낙원을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거기에 더해 색 빠진 금발에 단정한 머리 스타일과 제법 미끈한 얼굴까지,

황혼의 기사의 청춘 시절 모습을 재현한다면 딱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 같은 사람이라도 보기엔 너무 많이 변한 거 아닌가요? 그는 검강을 겨우 발현했다는데, 저자는 능숙하게 사용해요. 젊기까지 하고요. 무엇보다 그렇게 멀리하던 무공을 익히고 있잖아요?”

“저도 그게 좀 애매하긴 합니다.”

검의 경지야 계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장이 가능하다.

젊어진 모습도 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생의 고집을 꺾고 무공을 익힌 것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바뀌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일단 확인이나 해 보죠, 뭐. 혹시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요. 확인할 방법이라. 아,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온 정보 중에 쓸 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말과 함께 이베인을 바라보는 피터. 그런 그의 눈에는 왜인지 연민이 떠올랐다.

폭풍처럼 연무장을 휩쓸고 있는 위대한 기사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황혼의 기사의 여동생이 최근에 숨졌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도 않아 유일한 가족이었으니, 분명 반응이 있을 겁니다. 문제는 어떻게 저 속으로 들어가서 물어보냐는 거지요.”

콰르르릉!

피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십 미터짜리 폭염이 솟아올랐다. 강과 강이 충돌한 여파였다.

황혼의 기사는 그 속에서 환희하고 있었다.

그간 마음에 쌓였던 답답함을 모두 풀어내려는지, 우리에서 나온 야수처럼 날뛰는 중이었다.

감히 누가 저 아수라장에 들어가서 당신 여동생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라미아는 그게 무슨 걱정거리냐는 듯 여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우리 남편이 대신 해 줄 거니까요.”

“아하. 과연 두 분 사이에 대화를 나누실 방법이 있는 거로군요.’

또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듯 말하는 피터.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실은 좀 다르다.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으니까.

검을 뽑아 든 이드가 상대를 바로 베어 버리지 않고 어울려 주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당장 적을 해치우는 것보다 정보 하나라도 얻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누가 뭐래도 말할 수 있는 입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간이 아니겠는가.

거기에 중요도도 이쪽이 훨씬 높다.

곧 이드의 답을 들은 라미아가 피터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됐어요. 확인은 저쪽에 맡기고, 저희도 움직이도록 해요.. “

“어딜 말입니까?”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전투에서 눈을 떼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쉬워하는 피터에게 라미아가 반대쪽의 컴컴해 보이는 출입구를 가리켰다.

“당사자가 부정할 수 없도록 교차 검증해야죠. 아무렴 제자라면 스승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 않겠어요? 하다못해 별명이라도요.”

황혼의 기사와 함께 이 공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입. 바로 뱅커올슨 남작이었다.

“설마 저 연무장을 가로지르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아연실색한 피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강을 헤쳐 나갈 자신도 없지만, 설령 그런 시도를 한다 한들 황혼의 기사가 그 꼴을 그냥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다.

해서 피터는 절대 불가를 외칠 준비를 마쳤다.

하나 라미아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켜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당연히 아니죠. 남편의 싸움을 방해할 생각은 없거든요. 그게 아니라도 그렇게 티를 내고 접근하면 남작이 가만히 있겠어요? 우린 몰래 접근할 거예요. 이쪽으로.”

그런 라미아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에는 벽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또…….벽을 부수시겠다는 겁니까?”

“그야말로 제일 빠른 길이죠.”

과연 부창부수. 특히 과격한 부분이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하지만 밖으로 향하는 게 아닌 만큼 복잡하지 않겠습니까?”

“복잡할 것 없어요. 남작이 있는 곳까지 52개의 벽만 뚫으면 되니까요.”

추측이라기엔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그걸 어떻게……?”

“다 보이거든요. 이 공간에는 정령이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요?”

절레절레.

아무리 지부장으로 다양한 지식을 접하고 있다 한들, 그런 전문적인 부분까지 알 리가 없다.

“정령은 물질의 수호천사죠. 그런 정령이 없다면 마법 저항력이 약해져요. 물론 이 성은 마법으로 그 부분을 보충하고 있지만, 핵심이 되는 부분만 파악하고 나면 효과는 극대화되는 거죠.”

이렇게요, 라는 말과 함께 라미아가 벽을 향해 입을 뗐다.

“내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진흙처럼 무너지리라.”

주술에 가까운 언령이었다.

용언보다 한참 등급이 낮은 수법. 마법으로는 8클래스에 속하는 비의.

하지만 언령이고, 마법이고 아무렴 어떤가.

효과만 확실하면 되는 거다.

주르르륵.

두꺼운 바닥이, 또 그 뒤에 있는 벽이 축축한 진흙으로 잠시 쌓아 올렸던 것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환상적입니다!”

순식간에 뻥 뚫린 길에 피터가 진심을 다해 환호했다.

그가 아는 초인 중에 돌을 흙으로 바꿀 수 있는 자도 있었지만, 맹세코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대체 마법은 언제 해석하신 겁니까?”

감탄에 감탄을 더하는 피터의 물음에 라미아는 기분이 좋은 듯 순순히 답했다.

“이 성을 뒤덮고 있는 마법진의 핵심을 밖에서 보고 왔잖아요. 그런데 모를 수가 없죠.

라미아가 말하는 건 연무장과 콜로세움 벽에 가득하던 검은 마법진이 분명했다.

“그런 마법진은 분명 처음 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처음 봤죠. 하지만 봤으니 해석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게 그 결과죠.”

말과 함께 어느새 굳어진 진흙을 밟고 걸어 나가는 라미아였다.

피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짧은 시간에 그 복잡한 마법진을 해석해서 성의 약점을 파악했다니.

‘명예 후작도 대단하지만, 그 부인의 마법 실력도 엄청나구나. 그럼 다른 부인도?’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뭐 해요?”

“아, 죄송합니다. 가시죠!”

그런 두 사람 앞으로 벽이 또 무너졌다. 계속, 계속.


황혼의 기사라는 별명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남작의 검은 사나웠다.

피터가 말한 굳건한 고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한창때의 야수를 연상시키는 그런 검이다.

그렇다고 두서없다는 뜻은 아니다.

거친 야수의 목에는 목줄이 확실히 걸려 있었다.

야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닌, 야수를 부리는 검.

그것이 이베인의 검이었다.

정사의 구분이 없는 그레센에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정파라기보다는 사파에 가까운 검법.

그러면서도 잡스럽지 않았다. 사파의 것이면서도 고절한 수법들이 알알이 박혀 있는 무공이었다.

도대체 이베인에게 누가 이런 걸 가르쳤을까. 

‘누구긴 누구야. 존 워스, 혼돈의 파편이겠지.’ 

이드는 이베인을 상대하면 할수록 입맛이 썼다. 이베인의 무공은 거칠었고, 동시에 정밀했다.

무림의 이름 있는 절학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으면서, 그가 무공을 연구할 거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게 아니라도 무공이 세상에 퍼질 만큼 퍼졌으니 당연히 혼돈의 파편도 접했을 법한데 말이다.

혼돈의 파편 정도 되는 초월자들이라면 세상에 퍼진 기본만 가지고도 고절한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생각을 못 한 거지. 무공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것. 탄생부터 완벽에 가까운 혼돈의 파편이 무공을 익힐 이유가 없다고 여겼어.’ 

드래곤이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는 바와 같은 이유였다.

무공은 약자를 위한 것. 태어날 때부터 강자였던 이들에겐 굳이 필요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본인에게 필요하지 않아도 그걸 적절히 이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 있는 이베인인 것이다.

문득 카논의 기사들이 익힌 무공이 궁금해지는 이드였다.

과연 그들이 익힌 무공이 소드 팰러스의 것일까?

아니면, 이베인의 것과 같은 메이드 인 혼돈의 파편일까.

어쩐지 검후를 몰아내고 소드 팰러스의 주인 자리를 노리고 있을 삼검왕이 우습게 여겨졌다.

세상에선 검후의 뒤를 이은 절대 고수로 알려진 삼검왕.

하지만 이 시골 영지의 이름도 모를 공간에 숨어 있는 황혼의 기사라는 한물간 인물이 그들과 같은 경지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할까.

“거, 궁금하네요.”

“후우~ 뭐가 궁금하단 말이오?”

“당신이 모르는 바보들 이야기요.”

짧은 대화를 시작으로 이베인과 거리를 벌리는 이드였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