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84화
1119화
멈춰 선 두 사람을 중심으로 그 주변은 엉망이었다.
매끈하던 바닥은 파이고 깨져서 부서진 돌덩이가 굴러다녔고, 연무장을 둘러싼 벽에도 깊숙이 베인 자국이 생겼다.
다만 그런 중에도 신기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법진이었다.
사방에 가득 새겨진 마법진은 바닥이 깨지고 벽이 갈라지는 와중에도 멀쩡했다.
애초에 땅에 그려진 게 아니라는 듯, 깊게 파인 바닥 위를 검은 마법진의 선명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드는 벽을 부수며 전진하고 있을 라미아에게 이런 사실을 전하고는 다시 이베인을 살폈다.
내부의 열기를 배출하는 건지 그는 호흡과 함께 허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스으으으ᅳ
그러다 이드의 시선을 느꼈는지 거칠던 숨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검강지경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신체 조절 능력이었다.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게 호흡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저만한 경지에 이르면 그 또한 뜻대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 볼까 궁리하던 이드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더워 보이는군요.”
“지금처럼 근육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를 느끼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실제로 그는 뭔가 개운한 얼굴을 하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만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없이 뽀송뽀송했다.
바람을 찢어발기는 속도에 땀이 흐를 새도 없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놀랍게도 그사이 잠시 그의 손을 떠난 검은 쓰러지지 않았다. 바닥에 박힌 것도, 허공섭물의 공력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검을 제 몸처럼 완벽히 다룰 수 있기에 보여 줄 수 있는, 묘기에 가까운 재주였다.
‘강철의 낙원에 인생을 갈아 넣었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네..’
그렇게 피터가 했던 말을 떠올린 이드가 이베인의 눈과 마주쳤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모양입니다. 제자로는 부족했을 것이고?”
쉼 없이 달려들 틈을 노리던 이베인의 눈이 잠시 멈췄다.
“기특한 녀석이지만, 부족한 제자니 어쩌겠소.”
“당신을 보기 전까지 이쪽에선 남작이 존 워스의 제자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착각이오. 그분께 배우기엔 아직 많이 모자라오’
“남작을 가르치고 있다면 귀하도 카논의 분이겠습니다?”
“그건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존 워스를 언급할 때도 아무렇지 않던 이베인에게서 처음으로 거부의 신호가 강하게 나왔고, 그에 이드는 바로 말을 이었다.
“황혼의 기사! 그렇게 불린 기사의 입버릇이 낙원이란 단어를 달고 사는 거였습니다. 특이하지요. 보통 일 년에 한 번도 쓸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걸 말하지 뭡니까?”
“……”
“혹시 당신이 황혼의 기사입니까?”
반응하기도 전에 치고 들어가는 질문.
하지만 거부의 몸짓을 보인 직후부터 이베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도 진짜를 위한 미끼일 뿐.
‘뭐, 당연한 거지.’
피터의 이야기 속에 나온 황혼의 기사는 고집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보였다.
검강을 보인 후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그의 마지막 외침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이 틀리지 않았노라 하는.
아무튼 그런 인물이 거부하던 무공을 익힌 건 둘째 치고, 던전의 가디언 같은 것이 되어 있다.
그것도 초인을 제물로 바치는 이상한 공간의.
당사자라면 절대 세상에 알려지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기사라고 불리는 건 고사하고, 세상이 혐오하는 악당이 될 테니까.
그건 한때 세상의 인정을 받고, 조롱이 담겼더라도 황혼의 기사라는 호칭까지 받았던 이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리라.
무엇보다 그 자신의 행위가 밝혀짐에 따라 아끼는 여동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죽으면 죽었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만하시오. 헛소리에 기분 좋던 열기가 식어 가고…….”
말과 함께 세워 둔 검을 잡아챈 이베인.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이드의 입을 막으려는 것 같다.
이드는 그 태도에 확신 하나를 더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황혼의 기사의 여동생 말입니다.”
“……”
이베인의 말이 멈췄다.
이드는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피터의 말은 정확했다. 여동생을 언급하는 순간 자신의 말이 잘린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베인이 대응을 멈췄다. 어처구니없다거나 하는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온몸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있음이 보였다.
마지막 남은 가족, 그리고 그 이전에 여동생 자체를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
여기까지 봤다면 답은 얻은 바나 다름이 없다.
이베인도 그걸 깨달은 모양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가 말했다.
“그 아이에 대해 더 말해 주겠소?”
“……최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드는 씁쓸하게 사실을 전한다.
누군가에게 가족의 죽음을 전한다는 일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상대가 비록 추악한 공간을 지키는 혐오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이베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비보에 충격을 받은 듯 이베인이 잠시 땅을 바라보았다.
“・・・・・・올해로 쉰여덟이었을 거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지. 혹시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죽었소?”
이드는 즉시 라미아를 통해 피터의 답을 듣고 전했다.
“병사로 알려졌습니다.”
“다행이오. 그리고 고맙소. 그 아이의 일을 알려 주어서. 덕분에 미리 꽃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소.”
과연 인사를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부정하는 바보짓은 않겠소. 내가 황혼의 기사 본인이오. 대답이 되었소?”
진짜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다.
조금 맥이 풀린 것 같은 이베인의 모습이, 어쩐지 지금 물으면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 공간의 주인이 존 워스입니까?”
“맞소. 그분이 날 이곳에 데려오셨지.’
“그럼 당신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람도 동일합니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 그러니까 라이칸스로프 같은 건 없었냐는 뜻입니다.”
“없었소. 나를 가르치신 분은 오로지 한 분뿐이오.”
“그럼 이 공간은 언제부터…………….”
“그만합시다. 그 아이의 소식을 가져온 것에 대한 보답은 여기까지. 더 이상은 답하지 않겠소.”
술술 나오는 대답에 이때다 싶어 질문을 던지는 이드였지만, 이베인의 협조적인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답을 들은 것만도 이득이었다.
애초에 그의 신분만 확인할 생각이지 않았던가.
“어쩔 수 없지. 나머지 이야기는 힘으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바라던 바요. 그렇지 않아도 열기가 모두 식어 버려 기분이 나빠지려던 차니까. 다시 달궈 봅시다. 아, 그전에 당신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 있소.”
“뭐가 틀렸단 말이지요?”
서로를 향해 검극을 겨눈 상태에서 오가는 마지막 말.
“내가 그분께 배운 것은 무공이 아니오. 카논을, 그리고 우리를 이끌어 줄 새로운 무도(武道)요!”
고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이베인의 검이 검형을 이룬다.
처음의 폭풍 같은 기세를 내부로 갈무리한 그것은 맹렬히 포효하는 그리핀의 모습이 되어 허공을 박찼다.
급강하로 먹이를 낚아채는 맹렬한 기세.
특히 발톱을 형상화한 검에서 뿜어진 검강은 먹이를 잡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 버릴 목적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는 이드다.
“구라도 적당히 해야지. 저게 어딜 봐서 무공이 아니야?”
보법을 근간으로 한 보신경. 내공과 함께 하는 검결. 마지막으로 검기상인의 기세를 뿜어내는 외기 검형까지.
검을 사용하는 모든 행위가 무공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저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무공이 확실했다. 이 공간에 대한 비밀도 비밀이지만, 그 전에 저 인간하고는 확실히 해 둬야 할 게 있어 보인다.
어디 가져갈 게 없어서 무공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려고 하다니.
그런 노기의 영향 때문일까.
쿠후웅!
허공을 가르고 남은 붉은 검로 속에 튀어나온 적색 검강이 유독 칙칙한 것이, 피처럼 진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난화십이식의 뇌정화답지 않은 모습이랄까. 다만, 색과 달리 위력은 확실했다.
퍽 퍽.
하늘에서 홰치던 그리핀의 날개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뇌정화의 쾌속함은 이베인이 반응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베인에게 불행한 건, 그 한 번으로 이드의 노기가 다 가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공이 아닌 무도에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방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휘릭 옷을 펄럭이며 풍운보로 바람의 결을 밟은 이드가 날개를 다친 그리핀을 허공에 묶어 둔다.
애초에 가장 강력한 수를 꺼내며 날아오른 것이 이베인의 실수가 아닐 수 없다.
“고수를 상대할 땐 절대 몸을 땅에서 띄워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도 없는 듯하고요.”
그사이 풍운보로 만든 바람의 새장이 그리핀을 완전히 가두자,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듯 검이 움직였다.
새장을 벗어나려는 그리핀의 발목을 비혼이 끊어 내고, 맹렬히 저항하는 부리를 혈화로 막아 냈으며, 낙화로 잘라 냈다.
발톱과 부리를 잃은 그리핀이 요동을 쳤다.
그러나 어김없이 바람의 새장에 막힌 채, 철창을 타고 오른 풍화에 몸뚱이까지 찢겨 나갔다.
그러자 이윽고 그 속에서 이베인이 나타났다.
그는 이미 전신에 새겨진 자상 때문에 혈인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그는 몸의 고통 이상으로 심히 허탈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새로운 무도를 얻어 그레이트소드라는 위대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말하듯 순식간에 무력화되어 버렸지 않은가. 더구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는 조금 전까지 대등하게 검을 나누던 자였다.
그 강함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등허리에 식은땀이 솟았지만, 그의 상상 속에 지금처럼 압도적인 패배는 들어 있지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게 경악 중인 이베인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이드의 손속이 조금 더 과감했다면 아니, 처음부터 이베인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날개를 펼치기는커녕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목이 잘렸으리라는 사실 말이다.
이드는 그런 이베인을 가만히 바라보다 풍운보로 조율하고 있던 바람을 풀어냈다.
털썩.
“크헉.”
그러자 이베인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낙법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난화십이식은 아름다우나 빈틈없이 날카롭다.
단순히 그의 피부를 벤 것으로 끝이 아니라, 주요혈맥을 끊어 놓았다. 즉, 지금 그의 몸은 다치다 못해 힘없는 몸뚱이일 뿐이었다.
“스승님!”
그 모습을 본 것인지 출입구 너머로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드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이베인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어떻게, 라. 간단하지요. 이게 당신의 무도와 내 무공의 차이니까요.”
말과 함께 개운하게 웃어 보이는 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