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85화
1120화
그런데 너무 티를 냈나 보다.
겨우 일어나 앉던 이베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설마 날 이리 농락한 이유가 그거였소? 무도라는 것?”
“터놓고 말하니 좋네요. 우리 그 부분부터 해결하고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무공과 무도의 차이. 당신 손끝부터 발끝까지 비교 분석해 주지!”
“허억!”
대등해 보이던 게 꿈이었다고 생각될 만큼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그 후 이베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몸을 떨어 댔다.
“스, 스승님!”
그림자 아래서 그 장면을 지켜본 뱅커올슨 남작이 안타까움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강인한 스승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건 제자로서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안타까우면 당신이 직접 돌봐드리지 그래?”
그런 그에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뒤이어 벽이 물먹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캄캄하던 공간에 빛과 함께 라미아가 들어섰다.
“히이익!”
상상도 하지 못한, 말 그대로 마법 같은 등장이었다.
거기에 갑작스레 어두운 주변이 밝아졌기 때문이었을까. 겁쟁이 특유의 비명과 함께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는 남작이었다.
아무리 눈이 부셔도 마스터 정도가 되면 상황 대처 능력 자체가 달라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혼의 기사가 괜히 모자란 제자라고 그러는 게 아니었네.’
라미아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급히 몸을 빼던 남작은 곧 발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기우뚱하며 쓰러질 뻔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리가 왜 안 움직여!”
“왜긴 왜요. 내가 잡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라미아를 따라 벽을 넘어 들어온 피터가 답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나 표정에 한 꺼풀 얼음이 덮인 듯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벽을 무너트리며 이곳으로 오는 중간에 초인들을 괴롭힌 많은 흔적을 발견한 탓이다.
속한 조직과 국가에 따라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경우도 많지만, 이번처럼 초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사건에는 일치단결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또 초인이었다.
“마침 섀도우 워퍼가 활약하기 좋게 어둠이 넉넉한 곳에 있어 줘서 참 고마워.”
스르륵 스르륵.
그 말과 함께 남작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그림자가 조금씩 몸을 타고 오르며 더욱 강하게 그를 조여 댔다.
“끄허억! 조, 조금 전까지 반대쪽에 있던 당신들이 어떻게 여기에……………?!”
압박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뱀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듯한 감각에 남작이 질겁하며 외쳤다.
그러는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지만, 차마 휘두르지는 못했다. 허리까지 타고 오른 그림자가 단번에 그의 팔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날카로운 검기라도 휘두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법.
“모자란 걸 그렇게 티 내고 싶은 건가? 남작, 여기 무너진 벽을 보고도 몰라?”
불쑥 얼굴을 들이민 피터의 말이었다.
그제야 눈이 빛에 익숙해졌는지 남작이 피터와 라미아, 그리고 무너지는 벽을 번갈아 보고는 부르르 떨었다.
“스승님을 상대한 저 남자만이 아니라, 당신들도 평범하지 않은 능력자들이라는 건가.”
“정확히 말해서 나 빼고 두 분이 확실히 그렇다고 할 만하지. 그보다 남작, 당신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아.”
피터가 말과 함께 이마를 찍어 누르자 남작이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투에 아무런 품위가 없는 것이 평민으로 보이는데, 지금 이 무례한 행동은 뭐지?”
“멍청한 데다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모양이야. 아주 멋지군! 이봐, 남작. 지금 상황에 그런 말을 하고 싶어? 막말로 당신이 지금 죽어도 누가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오히려 여기서 일어난 일이 알려지면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할 사람이 수백만은 달려올걸?”
“・・・・・・ 네놈, 초인이구나.”
순간 남작의 눈매가 바뀌었다.
마치 부모의 원수를 만난 듯 증오스러운 눈빛이 피터를 향해 쏘아졌다.
“노력이란 걸 모르는 게으름뱅이. 재능으로 시작해 재능으로 끝나는 놈들!”
그리고 이어진 말에 피터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소드 팰러스에서 배우고, 삼검왕이 직접 가르쳐도 가망성이 없는 무능한 놈들이 주로 빠지는 길이지. 초인 혐오자.”
“퉤!”
남작이 뱉어 내는 침을 피하며 슬쩍 물러나는 피터에 라미아가 물었다.
“초인 혐오자요?”
“그게 뭔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고. 이자도 그런 부류인 모양입니다. 재능 없는 놈들이 질투에 눈이 멀면 주로 저쪽으로 빠지죠. 아무래도 저놈 입을 여는 일에 저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초인 혐오자라니. 그런데 남작 영지에도 초인은 있지 않았던가요?”
아무리 시골 영지라지만, 아니, 사람이 없는 시골 영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람을 골라 받을 수 없다.
그런 곳에서 초인을 차별했다가는 제국 전역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끝장이 나도 벌써 끝장이 났을 거다.
“저런 놈들 특징이 평소에는 크게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죠. 알겠네요. 여기서부턴 제가 맡죠.”
간단하게 이해한 라미아가 앞으로 나섰다.
피터가 굽히는 모습을 본 탓일까. 증오스러운 눈빛을 내세우던 남작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누구고, 목적은 뭐요. 뭘 원해서 날 쫓아온 거요?”
“어머나, 추적당한 건 깨달았나 보네?”
고개를 끄덕이는 라미아의 말에 남작이 질끈 눈을 감았다. 이베인의 말이 있긴 했지만, 설마 정말 자신이 달고 온 꼬리였다니.
그래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었다면 반성할 일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로 인해 이베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자신도 사로잡혔다.
이래서야 뉘우칠 기회도 얻을 수 없는 최악의 결과가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본 라미아가 방글방글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실망하지 마. 원래 살다 보면 실수 한두 번은 하는 거니까. 나중에 반성하면 돼.”
“…..”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 달래는 건 여기까지 하고, 지금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부터 좀 공유해 볼까? 협조 부탁해도 되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없소.”
“하아~ 이러면 서로 피곤해지기만 할 텐데. 알잖아?”
“알고, 말고 이전에 정말 내가 아는 바가 없소. 이곳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는 알지만, 당신들도 그걸 알고 싶은 건 아니잖소..
“그럼 아는 것도 없는 당신이 굳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뭐지?”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일 때문이오.”
“그게 어떤 일이지? 참고로, 교차 검증할 거야.”
라미아는 말과 함께 연무장 쪽을 눈짓해 보였다.
그곳에선 아직도 무공과 무도의 경계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그에 비해 피터에게 증오의 반응을 보이던 남작의 대답은 머뭇거림이 없다.
물론 아는 게 없다는 부분은 한 번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그건 날 스승님 곁으로 데려가면 말해 주겠소.”
“쭛・・・・・・ 그렇지.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라미아의 어깨가 툭 하고 떨어졌다. 뒤에 있던 피터도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만 보면 고단수 같기도 하다. 묻는 말마다 순순히 답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의미 있는 단어는 하나도 나온 것이 없다.
아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고, 그나마도 스승 옆으로 보내 주면 말하겠단다. 그걸 보면 스승에 대한 사랑 하나는 지극하다고 할까?
“어려울 것 없잖소. 교차 검증도 한다고 했고, 난 그저 죽기 전에 스승님을 한 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것뿐이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린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
일단 이드와 자신은 말이다.
“당신은 몰라도 저 뒤에 있는 초인 놈들은 생각이 다를 거요. 장담하지. 후훗.”
메마른 웃음을 보이는 남작이다.
그 모습을 보니,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하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자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알려질 경우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최소한 한 번쯤은 예상해 봤으리라.
“원래는 그렇지. 하지만, 여기 두 분께서 살리기로 하시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다.”
“개도 안 들을 헛소리.”
피터가 말을 맞추기 위해 애써 능청을 떨어 보지만, 남작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초인에 대한 혐오와는 별개로, 그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음. 좋아요.”
잠시 고민하던 라미아는 이드와 이야기한 후, 남작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말투도 바뀌었다.
어려운 일도 아닌 데다가, 어차피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피터의 섀도우 워퍼의 힘이 좀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그가 아니라도 남작을 제압할 방법은 많았다.
혹시라도 남작이 자리를 이동하므로써 어떤 구사일생의 기회를 노린다면 헛된 희망이라는 것이다.
“헛심 쓰지 않는 게 좋아요. 패럴라이즈, 바인딩 씰.”
라미아는 곧바로 마법으로 남작을 묶고, 마비시킨 후 허공으로 살짝 띄우고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빛을 차단하다니. 뭐 이런 거에다 신경을 썼나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이력 감소 현상이에요. 호론석을 쓴 거죠.”
문을 넘는 것과 동시에 완벽히 바뀌는 밝기에 피터가 놀랐다. 그에 라미아가 간단히 설명을 마치고, 이후 남작까지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
끄아아아아!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이 한꺼번에 지르는 외침. 그것도 극한의 공포와 고통이 버무려진 지독한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묵직한 진동과 함께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루루루룩.
“마법진이 움직여? 라미아!”
사방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마법진, 제물이 없이는 기동하지 않을 듯하던 그것이 마치 살아 있는 양 움직였다.
모습은 마치 그물 모양의 불가사리를 연상시켰지만, 그 움직임은 그보다 더 혐오스럽고 기괴했다.
특히 서서히 일어나는 동시에 그 주변으로 요동치는 마나의 양은 장난으로라도 웃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조용하던 상황에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베인이나 남작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리를 이동하는 것뿐.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라미아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당신, 이걸 노리고!”
“흐흐흐.”
그녀의 감은 정확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남작은 이미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덕분에 스승님께 마지막 작별 인사는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오.”
남작의 말이 끝나자 발아래서 꿈틀거리던 마법진이 솟아올랐다. 마치 남작을 빼가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
거기에 이미 위기를 벗어났다 확신하는 남자의 얼굴이라니. 어쩌면 처음의 놀라던 모습까지 모두 연기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짜 그렇다고 해도,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무려 라미아의 통수를 때렸다는 것이다.
“흥. 어딜 빠져나가려고? 어림도 없지. 아케인 디맨션!”
쩡.
그러자 남작을 가리키는 라미아의 손끝을 따라 그 주변으로 임의의 공간이 발생해 마법진을 밀어내더니.
“어?”
“디맨션 록!”
뒤이어진 공간 봉인으로 남작과 마법진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라미아는 그 상태로 남작을 끌어왔다. 당연히 그런 상황을 굳은 상태로 지켜보는 남작의 안색은 시퍼래져 갔다.
“어! 어!”
그건 단순히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러게 통수도 상대를 봐 가며 때려야지.
라미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