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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86화


1121화

남작을 잡았다.

어리숙한 모습으로 방심을 유도해 도망치려던 놈을 붙든 거다.

다만 수를 꾸민 당사자는 해결했는데, 그에 휩쓸린 이베인을 놓치고 말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놓쳤다기보다는 빼앗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법진의 변화에 대한 파악도 빨랐고, 그에 대한 대응도 신속했다.

그레이드론의 지식도 있지만, 라미아와 붙어 지낸 지가 얼마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오히려 마법과 공간을 자르는 부분에는 자신 있는 이드다. 문제는 이베인이었다.

“쿠울럭.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요.”

그건 마법진과 접촉한 직후 시작되었다. 한차례 몸을 떤 이베인의 몸이 일그러지더니,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마법진으로 딸려 간 것이다. 이드가 마법진을 베고 밀어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한번 시작되면 막을 수 없는 화학 반응처럼, 이베인의 변화는 멈추지 않았다.

한 가지, 이 현상에 대해 이베인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흐어어어어억!”

그의 말도 말이었거니와 찢어질 듯 부릅뜬 두 눈, 거기에 비명도 없이 쩍 벌어진 입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사건은 정말 짧은 순간에 벌어졌다.

그렇게 빼앗긴 이베인이 어느새 거인처럼 일어난 마법진의 중앙에 자리했고,

쿠우-쿠쿠쿵!

뒤따라 연무장 한쪽에 박혀 있던 제단도 뽑혀 올라갔다. 이베인은 바로 그 제단 위에 섰다.

뚝.

그러자 순간 소름 끼치던 비명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대신 더 끔찍한 것이 쏟아졌다.

츄르르르르르-

그건 꿈틀대는 살덩이였다. 붉고 진득한 핏물을 질질 흘리는 그것이 텅 빈 내부를 채우자, 중간에 기둥 하나 세운 천막 같던 마법진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성인 키만큼 큰 눈에 허연 이빨, 목덜미의 갈기까지.

“메르시오.. 는 아니고, 사자?”

“몸은 인간인가. 반인반수네.”

그사이 빠르게 다가온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평을 더했다. 그의 말처럼 딱 반인반수, 사자판 라이칸스로프였다.

“중간중간 사자의 몸이 아닌 곳도 있는데요? 척추를 따라 솟아 있는 깃털 같은 것도 그렇고.”

피터가 말을 더하지만, 그건 무시했다.

어차피 디테일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런 외형에 집중하기엔 그물 같은 검은 마법진 사이로 비치는 살덩이가 너무 혐오스럽다.

동시에 상상하기 싫은 가정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저 살덩이가, 몇 명의 초인이 몸을 던졌는지 모를 제단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여보, 혹시 저것의 정체가 뭔지 알겠어?”

“짐작하기 어려워요. 제물과 제단이 쓰였다는 점에서 마계와 관련된 것 같지만, 마기는 없어요. 그렇다고 언데드나 플레시 골렘도 아니에요. 그보다는 좀 더 고차원의 마법 생물 같은데.”

“그렇단 말이지. 그럼 소환자에게 직접 물어보자.”

콰악!

이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작의 목을 낚아챘다.

“켁……”

“켁∙∙∙∙∙∙ 케켁∙∙∙∙.. 수… 숨을……”

기도가 막힌 남작은 반항은커녕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기침을 토해 냈다.

“질문에 대한 답부터 부탁하죠, 남작. 숨은 그 뒤에 쉬어도 늦지 않습니다.”

“모・・・・・・ 모른. ・다…….”

당연히 질문이 무언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캑캑거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중에도 남작은 연신 떨리는 눈으로 괴물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쭛!”

이드는 혀를 찼다.

느긋하게 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는 그의 손끝에 시퍼런 지력이 묻어났다.

뜨드드득.

그 앞에서 기도는 바늘구멍처럼 좁아졌고, 근육과 목뼈는 갈려 나갔다.

바르르르.

그와 함께 목에서 발끝까지 흘러가는 저릿한 감각.

그걸 느낀 남자의 얼굴이 터질 듯한 붉은색에서 시퍼런 색으로 바뀌었다.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이게 뭔진 몰라도 매우 불길하다는 사실을. 자칫 전신 마비가 되어 처참한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겨우 마스터의 경지를 손에 넣은 남작에게는 죽음 이상의 공포였다.

‘말하겠소. 다 말하겠단 말이오!’

남작은 납작 엎드려 항복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발언이 목을 통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급히 눈짓을 해 보지만, 이드는 일부러 그걸 무시했다.

상황이 급하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딴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극한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문제는 이 순간에도 괴물의 형상이 점점 완성되고 있다는 점이지만.

“프로미넌스 레이!”

꽈과광!

그걸 생각하기 무섭게, 라미아의 손끝에서 발해진 백색 광선이 괴물을 두드렸다.

“일단 내가 맡아 볼게요. 우리 여보야는 하던 거 계속해요.”

말과 함께 한 발 앞으로 나서는 라미아.

어쩌면 정말 그녀 선에서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화력만 놓고 보면 사실 마법이 무공 이상이니까.

“신의 표식이 땅에 강림하니, 생령의 심상에서 피어나라. 스타라이트 심볼!”

무엇보다 라미아가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방금 사용한 건 초거대 마법진을 만들어 주문을 대체하는 마법. 라미아 주변으로 휘황찬란한 마법진이 빛의 물결처럼 파도치며 나타났다.

“가라!”

직후 두 팔을 펼친 라미아에게서 마법들이 폭풍처럼 뿜어졌다. 하나하나가 최소 6클래스 이상의 마법들.

번개가 회오리치고, 땅이 흔들리고, 공간을 비틀었으며, 죽음의 저주가 강림했다.

도저히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마법의 폭풍. 마치 제국 마탑의 마법사들이 총출동한 것 같은 규모다.

그 여파에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뼛속 골수가 진동한다.

그걸 느낀 남작의 속은 타들어 갔다.

그분의 말씀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하나 눈앞의 인물들이 벌이는 광경을 보아하니 당장이라도 괴물을 불태우고, 콜로세움까지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말하고 싶었다. 다시는 모른다는 소릴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맹세하는 순간, 숨통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남작의 입이 열렸다.

“크헉, 헉, 며, 명령받은 대로 준비하고, 실행했습니다. 강력한 적의 침입에 대비한 매뉴얼입니다. 그렇게 하면 스승님이 적과 함께 모든 흔적을 사라지게 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게 스승님의 임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사이 오페링을 뽑아 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아! 헉헉헉..”

역시 남작의 용도가 단순 보급 창고만은 아니었다.

“오페링이 뭐지?”

“공간의 정수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영양가 없는 정보에 눈치를 보며 벌벌 떠는 남작.

하나 이드는 다시 그의 목을 조를 생각이 없었다. 대신 오페링의 위치와 회수 방법을 묻고, 대답을 들었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부탁하죠.”

그리고 피터가 콜로세움 안으로 달려 들어갔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ᅳ

가슴을 울리는 듯한 묵직한 진동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다.

하나이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지진이 아니야. 흔들리는 건 공간이다.”

곧이어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하늘의 일부가 땅이 갈라지듯 쩌억 벌어졌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한없이 깊은 어둠.

“저것도 매뉴얼에 있는 건가?”

이드의 물음에 남작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잔뜩 놀란 모습이다.

답은 마법을 멈추고 뒤로 물러난 라미아에게서 나왔다.

“칫, 교묘한 수를 써 놨어요. 저 괴수의 마법진과 공간이 연동돼서, 괴수에게 가해진 공격이 다른 공간으로 전이되고 있어요. 이래서는 완성되기 전에 죽여 버리긴 어렵겠는데요?”

“그럼 저기 하늘이 쪼개진 것도……”

“제 마법 때문이죠. 뭐, 그렇다고 이 공간이 당장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둘만 있었다면 혀를 쏘옥 빼물었을 것 같은 말투로 변명 아닌 변명을 더하는 라미아였다.

“무너져도 상관없어. 그나저나 역시 현실에선 변신 중의 대처도 확실하네.”

“애니가 아니니까요.”

변화 도중 손대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역시 애니메이션에서나 통하는 일.

실제로는 적의 빈틈을 노리는 건 기본이고, 그에 대한 대응법을 두는 것까지도 당연한 일인 거다.

“그럼 공간이 무너지기 전까지 저놈은 불사신이란 말이야?”

“그렇지는 않아요. 어차피 완전히 완성되면 마법진과 공간이 분리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덩치만 크지, 너무 느릴 테니까요.”

전투에 있어서 느리다는 건 치명적이다. 거기에 덩치까지 크다? 그럼 움직이는 표적지 이상의 가치가 없다.

“그럼 본격적인 싸움은 잠시 후부터겠네. 남작, 저것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맹세코 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 저런 형태인 줄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럼 당신이 더 이상 필요할 일이 없잖아?”

“아니, 그렇지만・・・・・・ 그래도…….”

필요가 없다는 건 곧 처분해도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게 이해한 남자의 눈이 필사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정말 아는 것이 없는지, 그에게서 의미 있는 단어는 더 나오지 않았다.

이드는 더 볼 것 없다는 결론에 그의 혼혈을 짚으며, 내공까지 봉인해 버렸다. 무공이 아니라 무도라고 주장하는 스승에게 배운 남작의 기혈은 너무 쉽게 제압되었다.

“여기서 처리하지 않아요?”

“피터 씨나 바벨 쪽에 넘기려고. 그쪽에선 볼일이 많을 테니까. 혹시 쓸 만한 정보가 티끌만큼이라도 튀어나올지 모르고.”

물론 실제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전신 마비에 죽음을 앞에 둔 상태에서도 더 나오는 게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보급 창고 겸, 중요 물자 회수의 용도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이 정도의 인간을 이런 일에 쓰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는 사이, 괴수는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텅 비었던 내부는 진득한 피와 살덩이로 가득 찼고, 투명한 마법진 사이로는 악어의 것 같은 가죽이 올라와 채워졌으며, 목덜미의 털과 척추를 따라 솟은 깃털에는 윤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그르르・・……・그르르르륵.”

괴수의 입에서 숨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가래 끓는 소리가 섞이긴 했지만, 숨쉬기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였다.

“완성된 직후 공간과 마법진의 연결도 분리될 거예요.’

이미 모든 마법진은 가죽에 둘러싸여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드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슬슬 탄생 축하 선물을 준비해 볼까? 될 수 있으면 화려한 게 좋겠지?”

충격의 전이는 지금 공격할 수 없다는 의미지, 준비까지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니 말이다.

“그럼 일단 자리부터 옮겨요. 그런데 피터 씨는요?”

“시작하기 전엔 나오겠지. 재주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은 남작을 끌고 성벽 위로 자리를 옮겼다.

구르륵.

눈꺼풀이 없는 시뻘건 괴수의 눈알이 두 사람을 쫓는다. 탄생도 전에 이미 이쪽으로 적으로 인식한 모습이다.

하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어서 와라. 탄생을.”1

라미아의 손끝을 따라 마법진이 꽃피고.

“축하한다?”

이드의 양손 위에 강환이 찬란한 금빛을 발하며 덩치를 키워간다.

“그르르르.

그 모습을 본 괴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무언가 갈등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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