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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92화


1127화

“빌어먹을 놈들. 고작 슬립 마법에 자빠져서는 언제까지 자는 거야.”

벌써 네 번째다.

피터는 뻔히 잠들어 있는 이유를 알면서도 쓸데없이 부하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투덜거렸다.

사실 이건 그 나름대로 초조함을 숨기기 위한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는 라미아를 힐끔거리는 한편, 주변을 살피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진 지 한참이다.

들판 곳곳에 일과를 위해 일을 나온 농부들도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쪽에 관심을 가지거나, 접근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라미아 특제의 인식 저해 마법 덕분이다.

그게 없었으면 난리가 나도 벌써 몇 번은 났으리라.

들판 가운데 쓰러진 부하들도 그렇지만, 당장만 해도 마법진이 라미아 주변을 떠다니며 연출하는 황홀한 장면은 농부들이 평생 볼 일 없는 광경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피터에겐 그 황홀한 모습이 심히 불길하기만 했다.

‘이거 답답해서 미치겠구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만에 하나라도 명예 후작이 여기서 잘 못되기라도 하면…………….’

문득 감시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바벨의 특급 주요 인사임을 명심하라는 라울의 말이 함께 떠올라 식은땀이 흐르는 피터다.

어쩌면 자신의 지부장 자리도 오늘로 끝날지 모른다.

피터는 애꿎은 가슴을 쿵쿵 두드리고는 다시 라미아 가까이로 다가갔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더 이상은 답답해서 못 참겠다.’

라미아의 도움으로 부하들과 함께 탈출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지나온 문이 사라져 버렸다. 유일한 출입구의 소멸에 피터는 기겁했지만, 그런 반응이 민망할 정도로 여유로운 라미아의 모습에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라미아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거기에 척 보기에도 매우 범상치 않아 보이는 마법진을 여럿 불러내기까지 하자 다시 이드의 복귀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벌써 한참 전이었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건 아닙니까?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게 라울 님께 직통으로 연락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슬그머니 감추고 있던 사실까지 밝히는 피터였다.

하지만 눈을 감은 라미아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다.

들리지 않는 건지, 듣고도 무시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습.

“크흠, 후작 부인. 제 말이………….”

피터는 한층 목소리를 높여 다시 말문을 뗐다.

그러나, 갑자기 시작된 변화에 급히 다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 처음은 마법진이었다.

슈슈슉

파파파팟!

라미아를 중심으로 제 맘대로 움직이던 마법진들이 갑자기 한데 모여 서로 이어지고 겹쳐지더니, 원형의 구가 되었다. 마법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볼 때 비어 있을 그 안에서 무엇이 나타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 하지만 마법진이 만든 구는 금방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층 긴장이 높아진 상태로 얼마나 흘렀을까. 피터의 애간장이 까맣게 타들어 가기 직전이 되었을 때다. “돌아와요!”

라미아의 외침과 함께 마법진의 구가 꽃봉오리처럼 벌어졌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직사각형 형태를 한 순흑의 벽이었다.

곧이어 사방으로 벌어졌던 마법진이 검은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와 교환하듯 이드가 순흑의 벽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퍽!

직후 이드가 걸아 나온 벽은 쪼그라들 듯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휴우~ 다행이다. 이번엔 진짜 아슬아슬했다고요.”

그와 함께 라미아가 무릎을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드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반가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피터에게 이베인을 안겨 주고는 라미아를 일으켜 안아 주었다.

“고생시켜서 미안. 그리고 고마워. 이번에도 덕분에 살았어.”

“알면 조심 좀 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이해하지만, 세레니아가 보낸 건 잘 챙겼죠?”

어깨를 툭 치며 조용히 속삭이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살포시 쥐고 있던 주먹을 펴 보였다.

그 안에는 호두알 정도 크기의 녹색 보석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보석 안에 들은 붉은 액체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이드가 그 보석을 건네주자 라미아의 얼굴에 경악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이건 드래곤 하트예요. 심지어 일부도 아니고, 그 자체.”

“음. 색깔로 보면 그린 드래곤의 것인 거 같네.”

이드는 짧게 말을 줄였다.

둘 다 직접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눈앞의 보석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드래곤 중에 죽은 존재가 있다는 것.

“그런데, 이 안에 든 게 대체 무엇이기에 이 귀중한 드래곤 하트를 겨우 보관용으로 사용했을까요? 단순히 차원의 벽을 넘기 위한 용도만은 아닐 것 같은데.”

“그건 조용할 때 알아봐야지. 그리고 이거 말고도 얻은 게 더 있으니까, 그것도 그때 같이 말해 줄게. 지금은 사람부터 살리자”

이드의 말에 라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시도 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거늘, 그런 그녀도 모르게 얻은 게 있다니.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가 드래곤 하트를 조심조심 품에 갈무리하고는 돌아섰다. 그러자 그제야 피터가 이베인을 앞에 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포션을 사용했지만, 이베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무렴 내외부의 상처는 둘째 치더라도, 그만한 피를 쏟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베인에 대한 처방으로 라미아는 무려 두 번의 리커버리를 처방했다.

사실 상처를 치유할 용도라면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모자란 혈액까지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한 번으로는 모자랐던 탓이다. 어쨌든 이베인의 목숨은 그렇게 이어졌다.

물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피터의 모습을 봐서는 과연 그것이 이베인에게 있어 다행한 일인가 싶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께서 이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피터가 이베인과 남작에 대한 처리에 대해 물어 왔다. 그도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차마 바벨의 권리를 주장하긴 어려웠으리라. 이드는 그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딱히 고민한 적이 없군요. 원한다면 바벨에 두 사람의 신병을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무고한 초인들을 해를 가한 자들인 만큼, 저희 손으로 어떻게든 그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정보는…..”

“당연히 최대한 깔끔히 정리해서 보내 드릴 것입니다.”

그 정도면 만족이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베인은 몰라도, 남작은 한 영지의 주인인데, 괜찮은 겁니까?”

“흐흐.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우리가 납치한 것도 아니고, 남작은 스스로 영주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조사해도 나올 것이 없지요.”

피터가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한편, 라미아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 이동시키며 물었다.

“그럼 이 영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남작에게 자식도 없는 것 같던데.”

“먼 핏줄이 있겠지만, 굳이 이 시골구석의 영지를 탐내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 팔아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능한 한 저희 쪽에서 가져올 수 있도록 중간에서 작업할 생각입니다. 이 영지에 대해선 좀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니까요.”

말과 함께 뒤를 돌아보는 피터.

아무래도 이제는 사라진 공간 안에서 제법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작업이 지부장 선에서 결정이 되는 일이던가?

이드가 물었다.

“돈이 많이 들 텐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돈이라면 영주 성 지하에 호론석이 쌓였지 않습니까. 아마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해 그걸 먼저 빼서 사용한다든가, 영지를 먹은 후 처분해도 된다는 거다.

양이 양인만큼, 또 영주가 갑자기 실종된 상태인 만큼.

호론석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이라도 쉽게 그걸 빼돌리지는 못할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말이었다.

“그 호론석에는 저희 지분도 있다는 거 아시죠?”

“무・・・・・・ 물론입니다. 하하하하! 당연히 두 분의 지분이 가장 크지요. 크흠.”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피터의 얼굴이 심히 어색하다.

아무래도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그 지분을 계산 중인 것 같다.

이드는 그런 피터를 위해 곧장 말을 이었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지만, 굳이 저런 찝찝한 목적의 물건까지 챙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 구하기 어려운 물건도 아니고 말이다.

“저희도 당장 챙겨 갈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피터 씨와 바벨에 정식으로 의뢰를 하나 하죠. 혹시 카논에 이베인, 그처럼 무도라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또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이드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피터는 그 말의 의도를 단번에 이해했다.

“그런 의뢰라면 당연히 환영입니다. 그런데, 카논 전체를 대상으로 하려면 아무래도 호론석 처분만으로는 자금이……”

“추가 요금은 라울에게 청구하세요. 바벨에도 필요한 자료일 테니까요.”

“그, 그건 그렇지요. 크흠, 나머지는 라울 님과 상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피터가 입을 닫고 쭈그러졌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뱅커올슨 영주성은 조용한 가운데 어수선해 보였다.

성에 사는 평범한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었지만, 밤사이 남작이 실종되었음을 아는 기사들은 그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이드와 두 사람은 그런 기사들의 눈을 피해 유유히 안가로 복귀했다.

안가로 복귀한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잠든 초인들을 깨우는 일이었다.

버서커 상태에 빠졌던 만큼, 그 후의 변화도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깨어난 초인들의 정신은 모두 멀쩡했다.

다만, 자신들이 버서커로 변해 라미아와 피터를 공격하려 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은 보호 마법 안에서 사방을 경계하며, 이드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어느 시점에서 끊긴 것이다.

피터의 말로는 버서커 상태에서 빠져나온 초인들의 전형적인 후유증이라고 했다.

라미아는 이들에게서 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즉, 해당 현상은 그 공간 안에서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이야기하면, 저들은 특정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원하는 대로 초인들을 버서커로 만들어 같은 초인이나 기사들을 공격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피터가 다른 내용을 뒤로하고 해당 건에 대해서만 별개로 긴급 보고를 했을 정도다.

당연히 보고를 받은 바벨도 뒤집어졌다.

겨우 버서커의 원인에 대해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나 싶었는데, 느닷없이 그 변형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피터의 말로는 대대적인 조사 인력이 파견할 거라고 했단다.

‘진작 좀 그렇게 할 것이지.’

그랬다면 지금은 사라진 공간을 살펴볼 시간도 더 벌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아, 그리고 후작 부인이라고 했었죠?”

“네. 네?”

“이제 모르는 척은 그만하는 게 어때요, 서로?”

“……죄송합니다.”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피터는 내심 부하들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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