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99화
1134화
두 사람이 다가가자 마법사가 말없이 자리를 내어 줬다.
그에 간단한 눈인사를 건넨 이드가 이내 백작의 시신을 살폈다.
“일단 눈에 띄는 외상은 없네요.”
맞은편에 선 라미아가 말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 은은한 땀 냄새는 수련 중이라던 집사의 말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그 외 상처나 핏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드는 예비 백작 쪽을 곁눈질했다. 타살을 확신하고 사인을 밝혀 달라 부탁해 놓고는 아무런 말도 없는 그들. 아마도 이건 일종의 시험일 것이다. 검후라는 배경은 신분을 증명할 뿐, 실력까지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즉, 얼마나 빨리 타살의 흔적을 찾는지를 통해서 이드가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 보겠다는 거다.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에게 이러는 건 괘씸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경우는 또 아니었다.
해서 이드는 빠르게 답을 내놓기로 마음먹고 백작의 배를 눌렀다.
꿀렁.
살짝 부풀어 올라 있던 배가 돌연 쑤욱 꺼졌다.
소드 마스터에 올라 꾸준한 수련을 이어 가는 백작이라면 당연히 배 역시 근육으로 단단해야 했다. 한데 정작 지금은 물 채운 가죽 부대처럼 맥없이 출렁였다.
“외상은 없네. 하지만 속은 멀쩡한 게 없을 정도로 엉망이야. 이러면 타살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
세상에는 별별 죽음이 다 있다. 하나 이 정도로 모든 장기가 곤죽이 되는 죽음은 타살 말고는 달리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그 주화입마도 이 정도로 온 내장이 다 망가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드의 추리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예비 백작과 백작가의 인물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과 백작 영지 위를 조용히 부유하는 구름.
그 구름 위에는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사람의 크기가 모래알보다도 작게 보여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멀리 떨어져 있건만, 구름처럼 하얀 로브를 걸친 인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만을 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참 공교롭군. 내가 막 일을 끝낸 차에 차원의 인의 주인이 방문하다니.”
할짝.
빨간 혀가 입술을 적셨다.
“하긴, 저자와 우린 우연을 넘어 운명과도 같은 사이이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겠지.’
그가 상당히 감성적인 말을 쏟아 내는 순간이었다.
휘이이이~
갑자기 강해진 바람에 구름이 백작 영지 위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한 번 더 연무장을 내려다보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 이상 가까워지는 것은 위험하니 오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내지. 대신 다음에는 서로 가까이 얼굴을 보자고. 우리의 죽음 씨.”
스스스스,
다음 순간, 그는 지워지듯 구름 위에서 사라졌다.
한편, 이드와 라미아는 이런 구름 위의 작별 인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백작을 살펴보기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내장뿐 아니라 심장, 폐는 물론 전신 근육까지 곤죽이 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뇌까지 엉망이네요.”
빛나는 손으로 백작의 머리를 살핀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물었다.
“뭘 거 같아? 마법?”
“가능이야 하죠. 그런데, 굳이 마법으로 이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자연사로 위장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티를 내는데.”
라미아의 말로 일리가 있는 것이, 원래 외부를 멀쩡히 둔 채 내부만 파괴하는 일은 두 배 이상의 수고가 드는 법이다.
“전 무공의 내가중수법이 아닐까 싶은걸요. 소드 마스터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잖아요.”
“가능하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일반적인 수법으로는 이렇게 전신을 녹일 순 없어. 이게 가능하려면 일반적인 그레이트 소드로는 힘들어. 최소 삼검왕 수준은 되어야지. 아니면..
“아니면요?”
“이베인 정도면 가능하겠지.”
그런 대답과 함께 이드가 백작의 손과 검을 살피더니, 이내 연무장까지 둘러보았다.
높은 벽과 바닥에 가득한 검흔들. 그 속에서 침입자의 흔적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냥 봐서는 어느 게 백작이 만든 것인지 알 수 없겠지만, 이드의 눈에는 그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표가 붙은 듯 분명했다.
동시에 당사자의 경지에 대해서까지.
“백작에게 반항의 흔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침입하거나 싸운 자국도 없어. 일단 여기까지 봤을 때, 마법이나 무공, 초인기를 떠나서 범인이 엄청난 고수라는 건 확실한데.”
말을 마친 이드는 팔목을 슬슬 쓰다듬었다.
비어 보이는 그 손목 속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라미아였기에 눈이 가늘어져 물었다.
“혹시?”
“혼돈의 파편은 아냐. 그랬으면 벌써 달려갔지.”
“증폭기를 써 보면 어때요?”
“아깝잖아. 설마 혼돈의 파편 급이 암살이나 하고 다니겠어? 혹여 진짜 그렇다고 해도 하필 우리가 마주친 사건에 마침 셋 중 하나가 범인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이런 말이 있죠. 아끼다 똥 된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요? 잔말 말고 빨리 해 봐요. 예비 백작이 이상하게 보잖아요. 그사이 전 백작을 좀 더 살펴볼게요.”
분명 라미아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결국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이드는 주변의 눈을 피해 증폭기를 팔목 위에 올렸다.
라미아의 손을 거친 증폭기의 모습은 보기엔 큰 차이가 없었다. 사용 방법도 간단했다.
어차피 기능이 하나뿐이었기에 차원의 인이 있는 팔목 위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발동되었다. 그러나 증폭기는 팔목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일정 방향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이걸로 찾았으면 대박인 건데.”
이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증폭기를 거둬들여야 했다.
그사이.
라미아는 백작의 정수리에서 사인의 단서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이드, 여기요.”
“구멍이네?”
이드는 라미아의 부름에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살폈다. 그곳엔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구멍이 있었다. 내가중수법에 이런 구멍은 필요치 않다. 흔적이 남는다면 차라리 피부에 멍처럼 남는 것이 일반적.
“이걸 보면 무공은 아닌 것 같고, 마법과 초인기, 그리고 약품 정도인가?”
“마법이에요.”
라미아가 그렇게 확정 짓는 순간.
예비 백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던지 성큼성큼 다가섰다.
“마법이요? 아버님을 이리 만든 것이 마법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마법 중에 내부만 이렇게 망가트리는 마법은 없지 않습니까?”
마법에 대해 잘 아는 듯한 태도였다. 하나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 옆에 붙어 선 하버 마법사의 지식이리라.
그에 라미아가 마법의 정체를 공개했다.
“디케이의 저주입니다.”
“흑마법사의 저주 말입니까? 하지만, 아버님께선 항상 성물을 품고 계셨는데 어떻게 저주가…….”
저주는 암살자보다 더 은밀하다. 언제 어떻게 스며들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대신 대부분은 그 힘이 약해서 단숨에 사람을 죽일 수 없으며, 신성력에도 매우 취약하다.
간단한 성물만 지니고 있어도 거의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고위 귀족들의 화려한 장신구 속에는 성물이 하나 이상씩 자리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문에 라미아보다 하버 마법사가 먼저 나섰다. 그는 온몸으로 말도 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보이며 말했다.
“디케이의 저주? 제가 제대로 들은 겁니까? 고작 청소에나 사용하는 마법에 백작님께서 당하셨다고요?”
“청소? 저주 마법을 청소에 쓴다고? 도대체 무슨 말이오?”
예비 백작은 물론, 마법을 잘 모르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담겼다. 그에 하버 마법사가 간단히 설명했다.
디케이의 저주는 그 단어와 달리 진짜 저주가 아니라 대상을 빠르게 부패시키는 마법인데, 마법사들은 이 마법으로 음식물과 연구에 사용된 사체 등 불에 타지 않는 쓰레기를 처리했다.
거기다 2 클래스라는 쉬운 난도 덕에 초보자들이 익혀 사용하기도 딱 좋았다.
“그럴 수가. 2 클래스 마법이라면 더더욱 소드 마스터이신 아버님께 통할 리가 없잖소.”
하버 마법사의 말에 예비 백작까지 불신을 보이자 라미아가 다시 백작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죠. 하지만 작은 바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1 클래스 마법도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이번 백작님의 사인에는 이 구멍이 가장 치명적인 상처가 됩니다. 바늘처럼 가늘게 변형된 디케이의 저주가 화살처럼 머리를 뚫고 들어갔거든요.”
“이것이 그 흔적이라는 증거는 있는 겁니까?”
“가능합니다. 대신 백작님의 두개골 일부를 도려내어 잘라야 합니다만,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사인을 알기 위함이라 하나, 무려 백작의 머리뼈를 잘라내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도련님.”
예비 백작은 자신의 손을 잡는 집사의 손에 힘들게 승낙의 말을 꺼냈다.
“검후님을 봐서 믿도록 하지요. 허락하겠습니다.”
“안……!”
그에 반사적으로 ‘불가’를 외치려던 하버 마법사는 뒤늦게 머리를 두드리는 검후라는 말에 급히 입을 막았다.
검후라니. 아무리 마법사라도 검후를 모를까.
의심뿐이던 얼굴에 문득 회의감이 떠올랐다. 아름답긴 하지만 정체 모를 마법사의 말은 신뢰할 수 없어도, 검후의 마법사라면 신뢰할 수 있었다. 혹시 자신의 지식이 모자랐던 건 아닐까.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이드가 나서서 슥슥 가르자 머리뼈를 들어내고 구멍을 반으로 나누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자 일부 녹아내린 뼈와 함께, 마법이 뼈를 뚫고 지나가며 저주를 새겨 넣은 흔적이 보였다.
“으으음. 이럴 수가. 디케이의 저주를 이렇게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눈앞에 들이민 증거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냥 알았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백작을 죽인 수법은 알았지만, 마법사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을 마법이었기에 범인을 특정하기는 오히려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백작에 대한 일차적인 조사는 끝났다.
이드 일행은 우선 고민에 빠진 예비 백작을 두고, 집사를 따라 접객실이 아닌 손님방으로 안내되었다.
“백작 성의 손님 방 중 가장 좋은 곳입니다. 하인이 항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백작의 사인을 밝혀 주었기 때문일까.
이드 일행에 대한 집사의 태도에는 감사에서 비롯된 깍듯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넓은 방에 세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피터가 큰 숨을 내쉬었다.
“후우~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검후님도 있지만, 피터 씨 뒤에는 바벨이 있지 않습니까. 엄살이 심하네요.”
“엄살이 아닙니다.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무려 엘라임 백작, 카논의 황족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단순한 귀족이 아니에요. 모르긴 몰라도, 수도가 두 번은 뒤집어질 대사건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그 질문은 제가 피터 씨에게 드려야죠. 정보를 좀 모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필 우리가 찾아온 당일 이런 일이 일어나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네요.”
“문제없습니다. 마침 여기에도 바벨의 지부가 있으니,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겸사겸사 엘라임 백작의 죽음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말이다.
이어 이드의 눈이 라미아를 향했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검후님께도 백작의 죽음은 알려야겠지?”
“그래야죠. 통신은 내가 열 테니, 말은 이드가 해요.”
“잠깐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그게 싫으면 이드가 통신을 열든가요.”
“…….”
그러자면 마법을 새로 익혀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반박 불가의 상태에 빠진 이드의 눈이 먹이를 찾아 돌아가려는 순간.
“그럼 저는 지부에 다녀오겠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피터가 번개처럼 일어나 방을 나갔다.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