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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01화


1136화

같은 날.

아나크렌의 황궁 대전에서는 검왕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 마스의 일을 검왕에게 맡기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러하다.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하도록 하고.” 황제가 답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들은 의중을 알 수 없는 화두에 황제의 심기를 살피고자 애썼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검왕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는 황제가 그를 먼저 거론할 줄이야.

“이런 다들 말이 없군. 후작의 생각은 어떤가?”

이런 대신들의 반응에 황제가 레오날도 후작을 찾았다.

“폐하의 말씀이 참으로 반짝이는 보옥과 같습니다. 검왕이야말로 마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해법임을, 말씀을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쯧, 그런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빼고 말하게.”

“현재 문제가 되는 모함이나 오해들은 모두 국가 간의 불신이 그 근본에 있습니다. 하지만 검왕은 제국인이면서 동시에 소드 팰러스의 인물. 마스도 대륙 모든 기사가 보는 가운데 검왕을 정쟁의 제물로 삼지는 못할 것입니다.”

척척 오가는 문답에 대신들은 내심 또 미리 차고 치는 거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귀를 기울였고, 들을수록 옳은 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소드 팰러스와 삼검왕을 옹호하는 기사 파나 그렇지 않은 반대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존 워스가 만든 추문을 하루빨리 덮어 버리고 싶은 기사 파의 입장에서도 검왕이 주목받는 일은 반길 만했다.

사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고 있는 마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고 말이다.

그에 대신들이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냈다.

“바다처럼 깊은 폐하의 지혜에 탄복하옵니다.”

그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대신들은 각자 필요한 준비를 하거나 소드 팰러스에 황제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대전을 나섰다. 순식간에 넓은 대전에 황제와 레오날도 후작만이 남았다.

레오날도 후작이 황제 곁으로 다가섰다.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갑자기 검왕을 여기 가져다 붙이시다니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않으시고요.”

“그래서, 아까 자네 대답은 거짓이었나?”

“아닙니다. 이제 제가 필요 없는 것 같아 섭섭한 겁니다.”

그러면서 울상을 해 보이는 레오날도 후작. 그에 황제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한쪽 팔에 턱을 괴었다.

“황녀였네.”

“예?”

“어젯밤 황녀가 찾아와 그러더군. 검왕을 마스로 보내라고.”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설마 황녀가 황제를 두고 이런 명령조를 했겠는가. 그저 군더더기를 빼도 너무 빼 버린 내용 전달이랄까.

그럼에도 황제의 오른팔답게 레오날도 후작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뽑아냈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황녀 전하의 답이 아닐 수 있겠군요.”

이런 과감한 해법은 기존에 알고 있던 황녀의 성향과 달랐다. 사람이 한 길로만 다니지는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특이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황제와 황녀처럼 생활하는 공간이나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평소와 다르다고 해 보아야 좋아하지 않던 요리에 도전한다는 정도지, 국정에 관련된 부분에서 이토록 과감한 수를 두는 일은 거의 없다.

정말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와 달리,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 ‘특별한 계기’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는 레오날도 후작과 황제였다.

다만 쉽게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해서 레오날도 후작이 눈치만 보고 있자, 황제가 그를 배려하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검후시겠지. 그분이 황녀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한 거야.”

“으음.”

레오날도 후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드에게서 나와 검후와 황녀를 통해 전달된 것이었지만, 이드가 내놓은 의견을 검후가 다시 전달한 셈이니 꼭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왜 이러시는 것 같나?”

실로 다양한 뜻을 담은 질문이었다.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답에 황제는 쓰게 웃었다. 우문현답이랄까.

“이제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그런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쉽지 않아.”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께서 두려울 게 무엇입니까.”

“후후후. 두렵지. 그분은 내게 할머님이 아니신가. 그런 분은 외면한 나 자신이 가장 두려운 것이야.”

황제는 질끈 눈을 감았다.

소드 팰러스와 검후에게 기우는 민심. 검왕의 야심. 검후에 대한 믿음과 경계. 그 복잡한 관계들이 만들어 낸 결과가 지금이었다.

“할머님들은 손자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관대하시지요. 혼나는 것이 두려워 엉엉 울고 있으면, 꼬옥 안아 용서해 주시곤 했습니다.”

“지금 나보고 검후님 치맛자락을 잡고 울기라도 하란 말인가?”

황제가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부릅뜨자 레오날도 후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어때서 그러십니까. 전 지금도 가끔 슬픈 글을 보면 어머니 손을 잡고 웁니다.”

“……이런 엉뚱한 인간 같으니.”

황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 장난 같은 말 속에 든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지금은 제국의 내부를 단단히 해야 할 때였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나, 그와 함께 기록으로 남아 있던 혼돈의 파편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 미완의 마탑까지 나타나 마스와 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마음을 정한 황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레오날도 후작을 살폈다.

“그런데, 황녀가 어떻게 검후님을 만났을까?”

“헛, 아닙니다! 저는 결단코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돕는 이가 없고서야 어떻게 궁에만 있는 황녀가 밖에 있는 검후님과 연락을 하나?”

그런 면에서 레오날도 후작이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황족을 제외하고 궁 안을 가장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아무튼, 결단코 전 아닙니다. 차라리 검후님께서 궁의 담을 넘으셨다고 보시는 편이…….”

“아니야. 그게 아니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레오날도 후작에 손가락을 내젓는 황제.

그에 말을 멈춘 레오날도 후작은 곧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황궁. 황녀든 검후든,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어야 하는 엄중한 장소였다. 한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황궁의 방어 태세를 다시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오날도 후작의 계획표에 중요 업무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날 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일리나의 도움을 받아 검후의 저택을 방문한 황녀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황궁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아뇨. 반대로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유감스러운 거랍니다.”

일리나는 그 말에 어제와 별다를 것 없던 황궁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게 아닌가?

그에 황녀가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 레오날도 후작님의 주도로 궁의 경비가 강화되었거든요. 아마도 저 때문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강화된 경비로도 일리나 님을 전혀 멈춰 서게 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결국 헛고생을 하신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다녀간 사실은 알 수 없을 텐데요.”

“그건 그래요. 대신 제가 알게 해 드리겠죠.”

일부러 괴롭히려는 건 아니지만요.

당장 오늘, 검후를 만나고 돌아가게 된다면 황제를 통해 레오날도 후작도 진실을 알게 되리라.

경비 강화를 위해 온종일 궁을 뛰어다닌 후작이었다. 아마도 굉장히 허탈해하지 않을까.

그런 후작 생각에 염려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황녀와 반대로, 그녀를 반기며 문을 열고 나온 검후는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뺀질이 후작에겐 좋은 경험이 되겠어요. 황실도 마찬가지고, 황녀도 돌아가거든 경비 체계를 바꾸는 일에 힘을 실어 주도록 하세요. 당장 고생은 하겠지만, 이 과정을 통해 오래도록 쓸 만한 경비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드는 차치하더라도, 일리나 정도의 실력자를 막을 경비 체계를 완성할 수 있다면 이후 적이 황궁에 숨어드는 일은 없게 되리라.

물론 이를 위해 이드와 일리나 부부의 적극적인 협력은 필수.

“조금만 고생해 주세요. 이에 대한 대가는 제가 확실히 받아 드릴 테니까요.”

“라미아가 좋아하겠네요.”

“이런 괜찮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당했다는 듯한 뉘앙스와 달리 검후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어차피 그 ‘대가’도 황궁에서 나가는 것이니, 그녀가 아까워할 이유는 없었다. 덕분에 옆에 있는 황녀만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세 사람은 곧 저택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어떤 일인가요?”

“어제 말씀해 주신 검왕 일은 아바마마께 말씀드려 오늘 대전에 안건으로 올랐습니다.”

“그 건은 잘 처리되었지 않나요?”

“네. 오늘 방문한 이유는, 그 후 절 찾아오신 아바마마 때문입니다.”

황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인가.

눈치를 보는 황녀에 검후가 인자한 미소로 답했다. 그러자 곧 다음 말이 이어졌다.

“아바마마께서…………… 할마마마께 뵙고 싶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날 만나고 싶다고……”

바로 답하지 않은 검후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 모습에 황녀는 물론, 어느새 들어와 있던 쉴라와 스폴까지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세 사람의 마음 역시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반에, 원망이 또 반이랄까. 무엇보다 만나겠다는 황제의 의도가 정말 순수한지도 의심해야 했다.

그런 심각한 고민에서 벗어나 있는 건 오로지 일리나 뿐이었다.

호로로록.

일리나가 느긋하게 찻물을 넘겼다.

침묵을 깨는 소리에 검후의 눈이 그녀를 향했고, 두 눈이 마주친 순간 검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분명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긴 하지. 다른 일은 제쳐 두더라도, 혼돈의 파편의 문제가 있으니. 무엇보다 우리 황녀를 위해서라도 황제를 만나 봐야겠지요.”

그와 함께 장난처럼 웃어 보이는 검후에 황녀가 팔을 벌리고는 안겨 들었다.

“할마마마, 감사해요!”

“호호호.”

검후는 오랜만에 맘껏 애교를 부리는 황녀에 매우 흡족해했다.

일단 만나기로 한 이상, 꾸물거릴 이유가 없었다. 장소와 시간 등도 즉석에서 정해졌다. 만남의 주도권이 검후에게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외적으로야 황제가 제국의 주인이니만큼 검후도 황제의 말을 따라야 하겠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 역시 코를 훌쩍이며 검후의 손을 잡고 다녔던 손자일 뿐이었다.

황녀는 고마운 마음에 조금 더 재롱을 피운 후 일리나의 품에 안겨 황궁으로 돌아갔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모습을 배동하던 쉴라가 검후를 보며 들었다.

“괜찮지 않으면”

“걷후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일이라면 저희도 원하지 않습니다.”

“어쩌겠니. 황계도 내 핏줄인 것

쉴라는 자상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검후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검후가 숨기고 있는 마음을 살피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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