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04화
1139화
한 무리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두운 밤.
일단의 무리가 황궁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황녀 궁에서 나온 그들은 성을 빠져나가는 것이 목적인지 곧장 성벽을 향해 움직였다.
곳곳에 황궁을 지키는 기사들과 순찰하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오날도 후작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면 그 반응이 재밌겠구나. 그렇지 않으냐?”
“….”
무리의 후미에 속한 세 사람 중 가운데서 움직이던 황제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감히 황제의 말을 씹은 것이다. 그것도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근위 기사들이 말이다.
그럼에도 황제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너무 그러지 마라. 크게 실망치는 않았으니까.”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오히려 위로를 담은 말에 오른쪽에 선 기사가 입술을 질끈 물고서 울 듯이 말했다.
근위 기사의 임무는 오로지 하나다. 황제를 지키는 것.
그리고 황궁은 황제가 머무르는 장소다.
즉, 황궁 곳곳에 배치된 기사들과 병사들도 근위기사단 소속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지나친 자들이 동료고, 부하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궁을 몰래 벗어나는 자신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건 내부에서 빠져나가서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변명이 통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런 꼴을, 다른 이도 아닌 황제가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에 딱 죽고만 싶은 심정인 두 기사였다.
기실 황제가 이들에게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또 한 번 지나치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눈을 뗀 황제는 저 앞에서 황녀를 안고 가는 일리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3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검후께서 몰래 장난을 치기 위해 성벽을 넘으셨지만, 그분께서 스스로 모습을 보이시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지.”
“원래 그렇다. 일반 상식을 가지고선, 상식 밖의 인간을 상대할 수 없지.”
“…..저희의 사명은 세상 모든 요소로부터 폐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면 딱 좋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이 오가는 사이, 앞서가던 일리나가 속도를 줄여 황제와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부터는 엄폐물이 없으니 경비들의 사각으로 이동하겠어요. 제 신호에 따라 움직여 주세요.”
“저 많은 기사들의 눈을 피할 사각이 있단 말씀이오?”
곧게 뻗은 대리석이 깔린 길목을 따라, 지붕까지 올라서서 감시하는 기사와 병사의 숫자가 대충 세도 서른이 넘는다.
말이 쉽지, 엄폐물에 가리거나 감시자의 등 뒤를 지나는 것도 아닌데 저 정도 숫자의 인원이 사방으로 눈을 번뜩이고 있다면.
사각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네.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엔 자주 다녀 익숙해진 만큼 더 쉽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아, 어차피 폐하께서 함께하시니 들켜도 별문제는 없겠네요.”
“…..”
그렇죠? 하고 산책 나온 것처럼 쉽게 말하는 일리나였다. 그에 황제와 근위 기사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일리나에게 안긴 황녀만이 소리 죽여 킥킥댈 뿐이었다.
이윽고 일리나는 이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지붕 위에 올라 있는 자들의 시선을 살피더니, 거침없이 걸음을 움직였다.
생각지 못한 곳에 서고, 뻔히 기사의 시야가 향하는 곳으로 진입하는 등 발견되어도 몇 번은 발견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나 마치 일부러 무시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사와 병사 중 누구도 일리나와 황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유유히 무제 구간을 통과하는 모습에 황제도 믿기 힘든지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는군. 마법이나 초인기도 아니고, 특별히 모습을 감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우리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눈뜬장님이라도 되는 건가? 두 사람은 이해가 되나?”
“기본 원리는 간단합니다. 후작 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각을 이용한 이동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냔 말이다.”
“어찌어찌 잠시간 흉내 낼 수 있겠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때, 문제 구간을 다 지난 일리나가 반대쪽에 멈춰 서 수신호를 보냈다.
재밌는 것은 그러는 중에도 살짝씩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꾸욱!
그에 따라 두 명의 근위 기사가 황제를 모시고 움직였다.
손을 펴면 멈추고, 손을 쥐면 움직이고, 손가락을 따라 방향을 바꾸는 등 그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이면서도, 세 사람은 신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기사의 얼굴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을 보지 못한 듯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건 단순히 사각을 찾아 움직인다는 말로는 설명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폐하.
“그래. 그런 듯해. 듣기는 했지만, 명예 후작만큼이나 그 부인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임을 알겠어.”
이후에도 그와 같은 경험은 두, 세 번 더 반복되었다.
“원래는 한 번이었는데, 후작님이 손대신 후 배로 늘었어요.”
짧게 추가되는 황녀의 설명과 함께 다섯의 일행은 무사히, 하지만 황제와 근위 기사들의 입장에선 씁쓸하고 수치스럽게 성벽을 넘었다. 황궁을 벗어나자 딱히 조심할 것도 없었다.
안티로스의 밤거리로 접어드는 순간 일리나에 안겨 있던 황녀도 제 두 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
검후를 기점으로 황족이라면 무공 수련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었다. 특히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내공 수련은 필수.
그에 따라 황제 역시 내공만은 소드 마스터 끝자락에 닿아 있는 상태였다.
물론 순수한 수련보다는 마법과 영약 등의 외적인 요소로 인한 영향이 매우 컸다. 하지만 수련으로 쌓은 내공이건, 영약으로 쌓은 내공이건 그 능력치는 동일했다.
“오랜만에 안티로스 밤거리를 달려 보니, 젊은 시절 생각이 나는구나.”
푸학!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땅이 파여 날리고, 황제의 신형이 쭉쭉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 옆으로 살그머니 황녀가 다가서자 근위 기사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옛날에 밤거리를 달린 일이 있으셨어요?”
황제는 살짝 콧소리를 섞은 딸의 애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앞서가고 있는 일리나에 대해 말했다.
“네 외출에 후작 부인이 관련되어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연락을 주고받거나,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끼어 있을 거라 여겼거늘.”
“아무래도 은밀하게 움직이기에는 쉴라 단장님보다 후작 부인의 실력이 좋아서요.”
“……내 말뜻은 그게 아니란 걸 알면서. 이제 말해 보아라. 언제부터냐?”
정확히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인지 주어가 빠졌지만, 황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명예 후작님께 작위를 내린 후에요.”
“감쪽같이 숨겼구나.”
“죄송해요. 하지만 그땐 너무 애타는 마음에………….”
“잘했다.”
“네?”
굳은 아비의 얼굴에 고개를 숙이던 황녀는 곧장 이어지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여전히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가 황녀의 손을 잡았다.
“잘했다. 네가 그렇게 나선 덕분에 흔들리던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은 차라리 마음이 편하구나.”
황녀는 황제가 살짝 드러내 보인 속마음에 마음 한편 남았던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이 깔끔히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편하세요? 손이 축축한데요?”
“크흐음.”
배시시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황녀에 황제가 슬그머니 손을 거뒀다.
손에 땀이 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긴장으로 인한 식은땀이었다.
마음이 편하다는 말에 거짓은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은 또 달랐다. 어떻게 다르냐고 하면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금 황제의 마음은 일단 그랬다.
이것도 오래전에 기억에 있는 감각이다. 심한 장난을 친 후 어머니께 야단맞을 직감했을 때의 기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마마마뿐 아니라 검후께도 야단맞은 적이 있었지.’
오늘 온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검후에 대한 기억. 그 희미한 조각 하나가 다시 떠오르려는 참이었다.
“폐하!”
생각에 빠져 자연히 느려진 황제의 속도에 맞추고 있던 근위 기사.
그런 그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허공에 은빛 검막을 만들었다.
팅! 티티티팅!
곧이어 시퍼런 불꽃이 일어나며 검막이 무언가와 부딪혔다.
그러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체는 없었다. 무언가 쏘아져 왔다가 되돌아간 것이다.
불꽃 사이로 나타났던 물체는 분명 단검이나 화살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물체의 정체 따위가 아니었다. 무려 황제가 습격받았다는 사실. 오로지 그 하나였다.
무조건 0순위는 황제의 안전, 물체나 습격자의 정체, 비밀리에 나온 황제의 동선을 어떻게 알았는지 등에 대한 것은 그 후다.
심지어 황녀도 황제보다 우선할 순 없다.
“덱스터 경!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게!”
검을 빼든 하퍼 근위 기사단장은 명령과 함께 황녀 앞으로 움직였다.
황제가 안전하게 빠져나가면 황녀만 자신이 지키면 된다.
“아라야!”
덱스터가 가까이 다가서자 황제가 황녀를 찾았다.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어릴 때 부르던 애칭을 외쳤다. 그러자 황녀가 어느새 뽑아 든 검을 들어 보였다.
“피하세요. 제 실력도 이제 보통이 아니랍니다.”
“폐하, 모시겠습니다.”
그와 함께 황제의 몸을 잡은 덱스터가 본인의 초인기인 공간 넘기를 발동했다.
황궁을 나왔음에도 호위로 단 두 명만 대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덱스터의 이 초인기 덕분이었다.
마법사의 마법보다 빠르고, 아티팩트보다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초인기는 안전하게 몸을 피함에 있어 최고였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모습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흐릿해지는 순간이었다.
“흥, 이미 거인의 손바닥 위에 있는데 어딜 가시나.”
매끈한 음성과 함께 안개로 만든 것 같은 뿌연 손이 그 크기를 자랑하며 나타나더니, 허공에 손짓을 했다.
찌지직.
직후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중에 피가 뿜어졌다. 그리곤 사라진 줄 알았던 황제와 덱스터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특히 덱스터의 경우 한쪽 팔이 어느새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부상에도 그는 쓰러지면서 황제의 몸을 먼저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아바마마!”
이런 상황에 당황한 황녀는 급히 황제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그런 한편, 하퍼는 안색을 굳혔다.
분명 공간 너머로 두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안개로 된 거대한 손짓 한 번에 그것이 취소되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안전은?
“덱스터 경!”
퓨퓻! 퍼퍽!
하퍼의 외침과 동시에 이번엔 혼자서 사라진 덱스터였지만, 결과는 앞서와 똑같았다.
그나마 부상이 조금 더 심해졌을 뿐, 그 외 새로운 상처는 생기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일까.
“저로선 적의 초인기를 뚫고 폐하를 안전히 모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위험하다.’
까득.
설마 안티로스에서 황제가 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할 줄이야.
하퍼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