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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05화


1140화

‘어리석었다. 안티로스라고 방심해선 안 되는 것을.’

새삼 은밀히 황궁을 빠져나온게 후회되는 하퍼였다. 아무리 황제라도 잘못된 명령에 대해서는 조언을 올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 당장은 할 수 있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무엄하다! 감히 제국의 수도에서 이와 같은 일을 꾸미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사방을 돌아보며 외친 하퍼는 동시에 오러팅을 날렸다.

덱스터와 황녀로 하여금 삼각진을 만들어 황제 보호를 요청한 것이다.

이후엔 황제에게도 오러텅을 보냈다.

-폐하, 망극하게도 신이 무능하여 신의 힘만으로는 폐하를 지켜 드리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자네 탓이 아니니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라. 지금 이 상황에서 어찌하면 되겠는가.

-우선 지원을 부르시옵소서. 거기에,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공간 이동 아티팩트를 사용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지원은 불렀다. 아티팩트를 사용할 때는 내가 정하지.

-망극하..

막 황제의 말에 대답하던 하퍼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검을 들어야 했다.

어둠만 가득하던 전방에 갑자기 길을 막고 나타난 자들 때문이었다.

숫자는 넷, 그중에서도 큰 키에 깡마른 몸을 한 실눈의 남자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그는 비웃음 같은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하나 진짜 문제는 그 넷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스스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뒷길과 샛길, 그리고 사방 건물과 주변의 담벼락 위까지 올라섰다. 그 숫자는 전부 해서 마흔일곱.

가히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거기에 덱스터의 공간 이동을 차단한 거인의 손을 보면, 저들 개개인의 실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앞서 들렸던 매끈한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담벼락 위에 올라선 이들 중 하나인 듯했다.

“위협을 하려거든 좀 더 그럴듯하게 하지 그래? 얼마 전에 백작님 저택을 뒤집고 도망간 놈들도 아직 잘만 살아 있는데, 죽음이 두렵긴 개뿔. 그냥 만만하지.”

그와 함께 누군가가 안개로 된 거인의 손에 앉아 아래로 내려왔다. 민망할 정도로 몸에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엔 복면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양, 풍만한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고서 다리까지 꼬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빠득. 감히, 감히 제국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하나 제국의 힘이 두려워 얼굴까지 가리고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쭙잖게 허풍 떠는 꼴이 참으로 우습구나.”

“・・・ 너 말 잘하네. 그럼, 복면 벗으면 두렵지 않다는 말이 사실이 되는 거지?”

성격이 꽤 급한 편인지 여자는 당장이라도 벗겠다는 듯 복면에 손을 가져다 댔고, 그에 실눈을 한 남자가 말리고 나섰다.

“하아~ 바보야. 저런 간단한 말에 넘어가면 어쩌자는 거니?”

“아니, 저 새끼가 지금 나보고 겁쟁이라잖아!”

실눈의 남자는 발끈하는 여자를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가볍게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쓸데없는 잡소리가 끼어들어 죄송하군요. 존귀한 분께 인사드립니다.’

그리곤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꾸벅 숙이는 남자. 그런 그의 태도에 황제가 하퍼의 어깨를 밀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과연, 내가 누구인지 알고 벌인 일이었나.”

“물론이지요. 평생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참으로 운이 좋았습니다.”

실눈 남자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황제의 눈이 우묵해졌다.

짧은 문장 속에 들어 있는 단어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 말대로라면 갑자기 준비된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운이 좋아서 기분도 좋겠군.”

“아무렴요.”

“그럼 묻겠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대아나크렌 제국의 지엄한 주인을 노린 자가 누구냐.”

내공이 담긴 것도 아니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절제되어 있었다.

하나 그런데도 그 속에 든 위엄은 추상같고, 눈에선 불이 뿜어질 듯했다. 그야말로 만인지상의 위엄이랄까.

흠칫.

당장이라도 엎드려 명을 받들어야 할 것 같은 위세에 근위 기사들은 고개를 숙였고, 일부 적들까지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하…… 하하하. 이겁니다. 이거예요. 이런 모습이야말로 제국의 주인만이 보여 주실 수 있는 태도이지요.”

하지만 이런 기세도 뒤를 받치는 무력이 있을 때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

실눈 남자는 오히려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덕분에 황제의 노여움은 순식간에 재밌는 볼거리 정도로 급이 떨어져 버렸다.

“실로 뱀 같은 자로구나.”

“자주 듣는 소립니다.”

“목적이 무엇이냐.”

분위기를 헤픈 웃음으로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버린 남자에 황제는 경계심을 한층 세우며 물었다.

그러자 실눈 남자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황제와 황녀를 가리켰다.

“두 분 중 한 분, 혹은 두 분 모두의 목숨입니다. 이만한 준비를 했다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 뻔한 이야기다. 처음 황제를 노리고 날아왔던 공격부터 단순한 위협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려 아나크렌의 황제와 황녀다.

그 둘의 목숨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적의 입에서 직접 나오자 하퍼와 덱스터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황녀 또한 작게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황제가 유일했다.

그는 오히려 담담해진 모습으로 실눈의 남자를 보았다. 서로 선 위치는 같고 키는 오히려 실눈의 남자가 컸지만, 황제의 눈길은 분명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틀렸다. 제국 황제의 목을 원했다면 십만 대군을 끌고 왔어야 했다. 고작 네놈들로는 내 목은 물론이고, 황녀의 목 역시 어림도 없다.” 

그 순간이었다.

실눈 남자의 눈짓에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여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십만은 개뿔! 지원을 기다리는 거면 포기해! 미리 다 막았거든. 아무도 안 와!”

“야~!”

“왜? 이 정도는 말해 줘도 상관없잖아. 아, 하는 김에 하나 더. 혹시라도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토낄 생각은 하지 마. 우리가 원하는 건 목 없는 시체지, 실종이 아니거든. 이건 괜찮지?”

“어후~”

싱글거리는 여자에 실눈 남자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딱히 탓하지는 않았다. 지원은 몰라도, 공간 이동에 대한 이야기는 어차피 그녀가 아니라면 그가 했을 말이니까.

“이런…….”

그와 달리 하퍼는 낭패한 기색을 숨기기 힘들었다. 그래도 마지막 보루가 지원이었는데, 그 희망마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최악의 순간에 사용하려 한 아티팩트마저 쓸 수 없게 되었다.

적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진실이라면 아티팩트의 사용은 자살이나 마찬가지.

-이대로는 안 됩니다. 길을 뚫겠습니다.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오나…….

-앞서간 후작 부인이 조용하지 않으냐. 그녀가 어디 쉽게 당할 실력이더냐. 또한, 시간이 늦어진다면 검후께서도 이상하게 여기실 터. 그에 반해 놈들은 여태까지의 태도를 보아 검후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알았다면 절대 두 사람만을 노리지 않았을 터.

거기에 더해 검후에게 갈 때보다도 황궁으로 돌아갈 때를 노렸을 것이다.

황제의 말을 들은 하퍼가 실눈 남자의 어깨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 역시 이성과 본능의 동일한 외침을 듣고 있었다.

후작 부인만이 살길이라고. 바로 두 눈 앞에서 황궁을 빠져나온 그녀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은 더욱더 간절했다.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건,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건 부디 빠르게 진행해 주기를.

하지만 이런 하퍼의 간절한 바람에 실눈 남자는 흙을 뿌려 댔다.

“혹시 먼저 가던 여기사에게 뭔가 기대하고 있다면 포기해요. 이미 죽었을 테니까.”

“믿을 수 없다!”

“저승에서 만나면 믿게 될 겁니다.”

실눈 남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손짓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 황제와 황녀를 노리고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검과 도끼가 벼락처럼 떨어지고, 창과 망치가 찔러 들었다. 하나하나 내력이 깃든 공격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공격이 없었다.

막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설령 막아 내더라도 그 압력에 짜부라질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이었다.

“폐하! 공간 이동을!”

뻔한 결과를 알고도 망설임 없이 그 앞을 막아서는 하퍼였다. 그야말로 근위 기사의 표본.

하나 그 모습은 당랑거철,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짜부라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쿠구구구궁!

공간이 일그러지는 현상과 함께, 반투명한 벽에 의해 산사태처럼 밀어닥치던 공격들이 가로막혔다. 

“10분 정도는 유지될 것이다.”

그와 함께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 세 사람이 돌아본 황제의 손에는 반으로 두 동강 난 팔찌가 있었다. 

“포스 쉴드. 과연 황제 폐하. 어마어마한 물건을 가지고 계셨군요.”

제국의 황제 정도라면 스스로 몸을 지킬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탈출하는 방법이 막혔다는 게 문제지, 몸을 지킬 수단이 사라진 건 아닌데 말이다.

당연히 황제가 가진 포스 쉴드는 하나가 아닐 터였다.

게다가 황제가 가진 바를 모두 사용하더라도, 황녀가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시간을 끌 수 있다.’

차례차례 사용하면 제법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황녀와 두 근위 기사의 눈에 희망이 어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의아한 점을 떠올렸다.

과연 황제의 은밀한 외출을 알아낼 정도로 빠삭한 자들이, 호신 도구 같은 간단한 정보를 몰랐을까? 게다가 당장 실눈 남자의 얼굴에 일체의 당황도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거 기뻐하는 중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일해라. 베린.’

“안다고.”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자 여태 쫑알쫑알 참견하던 여자, 베린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떠받치고 있던 거인의 손이 포스 쉴드 위로 이동하더니, 쉴드를 긁어 내기 시작했다.

카카카카칵!

거인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쉴드는 곡괭이가 지나간 밭처럼 고랑이 깊게 파였다.

쉴드와 함께 마력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거기에 더 기가 막힌 건, 하나뿐이던 거인의 손이 어디선가 또 하나 생겨나 포스 쉴드를 더 빨리 무너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10분은커녕 1분도 유지될 수 없었다.

“폐하께선 두 번째 쉴드를 준비해 주십시오. 저희가 적의 수를 줄이겠습니다.”

잠시 패닉에 빠져 있던 하퍼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떠올린 후, 덱스터와 함께 쉴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에 두 사람을 향해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등 뒤에 포스 쉴드라는 벽이 있었다.

“오라! 내가 바로 아나크렌 제국의 근위 기사다!”

단단한 각오를 담은 외침과 함께 하퍼의 검이 가장 앞서 달려드는 적의 가슴을 가를 때였다.

팔랑.

갑자기 사방으로 하얀 꽃잎이 쏟아지고.

짜자작.

흔들리던 꽃잎이 하나로 이어지며 원형의 고리를 만들더니, 그대로 거인의 두 손을 베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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