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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06화


1141화

백색 검강에 손가락이 숭덩 잘려 나갔다. 서걱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꺄악! 어떤 년이야!”

비명을 지른 베린이 양손을 모아 쥐며 물러섰다.

거대한 손 하나로 포스 쉴드를 깎아 내고, 공간 이동까지 취소시켰다.

해서 방심했던 것일까. 조금 전까지의 기세에 비하면 너무도 무력한 모습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하얀 검강은 주변의 적을 모두 베어 버리려는 듯 그 크기를 키우며 사방으로 퍼져 갔다.

그에 실눈 남자가 초승달처럼 날이 휜 곡도를 들었다.

“비밀 호위라니. 잘도 날 속였군요, 황제.”

듣는 황제로선 기가 막힐 소리다.

작정하고 속인 것도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언정 내로남불도 정도가 있지. 죽이러 온 놈이 속았다고 화를 내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곧 번뜩이는 곡도에 유리구슬처럼 반들거리는 도강이 솟아오르고, 도가 움직였다.

콰콱! 콰콰콱!

마치 찍어 누르는 것 같은 독특한 궤적.

그 압력에 땅이 파이더니, 밧줄 같은 시퍼런 도강이 뿜어져 나가 하얀 검강을 때렸다. 그리고,

쩡!

하얀 검강은 땅에 떨어진 유리처럼 힘없이 산산조각 났다.

너무 힘없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어억…….”

덱스터의 입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실망은 섣불렀다. 언뜻 힘에서 밀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추진력을 얻기 위한 일보후퇴였으니. 촤르르르르-

피이잉-

수백 개로 조각난 검강 조각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도강의 충격을 흡수했다. 그리곤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아 사방을 향해 쏘아졌다. 사량발천근에 이은 이화접목의 극치.

그야말로 상상도 하지 못할 무리를 담은 반격이었다. 그에 실눈 남자와 적들은 물론, 근위 기사들마저 무방비로 검강 조각 앞에 노출되었다. 

“체엣!”

급히 검을 들긴 하지만, 이대로는 몸에 구멍 한둘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각오한 순간.

포스 쉴드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하퍼와 덱스터의 뒷덜미를 잡아채고는 안으로 끌어당겼다.

“힘 빼요!”

하나 그런 급작스러운 상황에도 두 사람은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가 다름 아닌 황녀의 것이었으니까.

뚜두두두둥!

직후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검강 조각이 포스 쉴드를 두드렸다.

정말이지 간발의 차.

코앞에서 검강 조각이 터져 나가는 모습을 본 하퍼와 덱스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이런 두 사람과 달리 황녀의 도움도, 몸을 피할 곳도 없는 적들은 맨몸으로 검강을 맞아야 했다. 

퍼퍼퍼퍽!

“크흡!”

“…..억…..”

차창!

단말마와 금속음이 겹치며 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그런 소리가 그친 직후.

풀썩.

쿵.

쿵.

빛살처럼 뿜어지는 검강의 분출을 막아내지 못한 자들은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숫자가 총 스물여섯. 한 초식에서 변형된 연계기에 그만한 목숨을 거둔 것이다. 무려 이곳에 등장한 적의 절반이 넘는 수였다.

그 외 죽진 않았으나 상처를 입은 듯 보이는 자도 여덟이나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실눈 남자도 놀랐는지 그 작은 눈을 크게 떴다.

“하. 하하하! 이거 대단하군요. 이쯤 되니 비밀 호위가 어떤 분이신지 너무너무 궁금해지는데요.”

“바보야, 지금이 웃을 때냐? 이렇게 된 거, 절반은 네 탓이잖아!”

베린은 바락 소리치고는 바쁘게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위로는 어느새 안개로 된 거인의 머리가 형상을 갖추고 드러나 있었다.

과연 거인의 눈이 보는 세상은 무언가 다른 걸까. 그녀는 곧 어느 담벼락을 노려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나와, 이년아!”

부웅!

그와 함께 절단되었던 거인의 손이 멀쩡하게 나타나서는 돌로 된 담을 푸딩처럼 으깨 버렸다.

“거기냐!”

실눈 남자도 가만있지 않았다. 뱅글뱅글 회전하는 곡도에서 발출된 도강의 회오리가 거인의 손을 뒤따르더니, 담과 그 안 저택 일부를 가루로 만들며 공간을 휩쓴 것이다.

점이 아닌 공간에 대한 압박을 가해 오자, 은신해 있던 일리나도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콰과과!

도강의 회오리를 반으로 찢어발기며 뛰쳐나온 일리나가 포스 쉴드 앞을 막아서며 나타났다.

“일리나 님!”

“후작 부인.”

황녀와 근위 기사들이 반색하며 반기는 모습에 실눈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후작 부인?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어?”

“죽이면 다 똑같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성질 좀 죽이고 있어 봐라. 후작 부인이라잖아.”

실눈 남자는 발끈해서 거인의 주먹을 다시 불러내려는 베린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고는 파란 눈동자를 번뜩였다.

“내가 알기로 제국의 후작 부인 중에 이런 실력자는 없었단 말이야. 최소한 명예 후작에게 작위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후작 부인?”

그의 목소리에서는 황제를 향한 것 이상의 흥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마주한 일리나의 표정은 무심했다. 그녀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이드 중심. 갑자기 나타난 적의 생각 따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원을 요청했으니, 이대로 물러나세요.”

“이 일대의 통신은 막혔습니다만?”

“제가 가진 통신기가 특별해서요. 당신들의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 그 말이 사실이란 가정하에, 15분 안에 일을 끝내야겠네요. 뭐, 충분합니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후작 부인께선 당연히 이드 명예 후작의 부인이시겠지요? 무공을 익혔고, 토벌에서 활약하셨다는 그분.”

“그게 중요한가요?”

히죽.

대답은 없었다. 대신 실눈 남자의 입가가 길게 찢어지더니, 곡도가 그의 팔을 타고 뱅글뱅글 회전했다. 그리곤 어느 순간, 갑자기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타앙!

일리나가 곡도를 튕겨 내는 것과 동시에 포스 쉴드 안팎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실눈 남자와 베린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포스 쉴드로 달려들었다.

실눈 남자가 말한 15분 안에 쉴드를 파괴하고 그 안에 숨은 황제와 황녀의 목을 자르고 말겠다는 듯. 그들의 공격은 과감하고 강력했다.

그에 맞서 근위 기사들과 황제, 황녀는 포스 쉴드의 방어력에 기대 다가오는 적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대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전투에 비하면 자잘한 장난 같은 수준일 뿐이었다.

붉은 꽃잎과 푸른 강기, 그리고 안개 거인이 날뛰는 공간은 이미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세 번의 공방이 교차했다. 그 사이 저택 하나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이 셋 중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하게도 일리나였다.

그녀는 두 명의 적을 상대로도 밀리기는커녕 압도적인 화력으로 오히려 적을 밀어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검에서 펼쳐지는 난화십이식은 실눈 남자와 베린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검후의 난화십이식이라니. 과연 이게 원조란 말입니까!”

물론 실눈 남자의 반응만 봐서는 정신이 없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말이다.

“야, 이 미친놈아! 언제까지 아가리만 나불거릴 건데!”

그런 그를 향해 베린이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고는 훌쩍 물러서서 일리나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알아서 피하든가 말든가! 미치광이 춤!”

불쑥!

부울쑥!

다음 순간 허공에 안개로 이루어진 커다란 발 두 개가 나타났다.

양손에 더해 양발까지 더해진 것이다.

그 모습에 일리나의 눈이 가늘어지려는 찰나. 안개가 발을 굴렀다.

쿠르르릉!

그러자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출렁거리며 흔들렸다. 도저히 제대로 서 있기 힘든 진동.

그에 일리나가 박차오르자, 이번엔 다른 발이 움직여 허공을 두드렸다. 그러자 공기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일리나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그에 일리나가 멈춰 선 사이, 그 틈을 노리고 두 손이 달려들었다. 하나 곧 검강에 부딪혀 튕겨 나간다. 그러면 또 그 찰나에 일리나가 점한 공간을 발이 헤집고 들어온다.

이런 흐름은 공격이 이어질수록 규칙성이 사라지고 어긋났기에 일리나로서도 대응하기 어려웠다.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날뛴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할까. 하지만 정말 이뿐이라면 차라리 상대하기 어렵지 않다.

손톱이 제법 날카롭고, 공간을 흔드는 것이 신기하긴 하지만 어차피 강기에 파훼가 가능한 수준이니까.

하나 정말 까다로운 건 안개 손발이 만드는 불협화음의 빈자리를 메꿔 주는 실눈 남자의 곡도였다.

그는 가는 실눈을 크게 뜬 채 일리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새겨 넣고 있었다.

“과연! 이게 난화십이식! 이게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이군요!”

콰콰콱!

그러는 중에도 그의 곡도는 공간을 찢을 듯한 기세로 거칠게 움직이며 일리나의 맥을 끊어 나갔다. 하나 그런 패도적인 기세에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일리나는 공방을 나눌수록 점점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만큼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저렇게나 난화십이식에 집중하고 흥분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실눈 남자의 도법은 뛰어났다. 조금만 더 발전한다면 난화십이식에 전혀 밀릴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일리나가 숲을 나와 접한 이 대륙의 무공 중 가장 뛰어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누가 저와 같은 무공을 만들었는지 이쪽이 궁금해해야 할 판인데, 저리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그런 기분이 쏙 들어가고 만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포스 쉴드를 두드리던 자 중 하나의 외침 때문이었다.

“베린 님! 도와주십시오! 7분 남았습니다.”

실눈 남자가 말한 시간에서 벌써 절반이 지났다.

그에 베린이 고개를 홱 돌려 실눈 남자를 노려보았다.

“겨우 7분 남았다잖아! 어쩔 거야!”

“어쩌긴. 네가 고생 좀 해야지.”

일리나의 검을 피해 뒤로 훌쩍 몸을 피한 남자가 히죽 웃자, 베린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시벌~ 기분은 지가 내고, 고생은 내 몫이지.”

투덜투덜 욕설을 날린 베린은 갑자기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더니, 실눈 남자의 양 볼에 그것을 그어 내렸다.

“왼쪽 팔은 내가 쓸 테니까, 빨리 끝내. 넌 죽었어.”

부하들을 향해 돌아서다 말고, 자신을 보며 저주의 말을 날리는 베린.

그에 일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결코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다. 종족을 모욕하는 발언도 아니고, 고작 인간들이 주고받는 욕을 듣고 화낼 엘프는 없다.

그보다는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다.

갑자기 전장을 이탈하는 베린. 그리고 그녀가 빠져나감에도 네 개의 손발 중 고작 왼손만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나머지 세 개의 손발은 실눈 남자를 향해 모여든다.

머릿속에서 베린이 했던 말과 실눈 남자의 뺨에 남긴 표식이 하나로 겹치는 순간.

파파팍!

일리나가 다시금 허공을 향해 박차 올랐다.

‘이건…… 위험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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