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07화
1142화
일리나가 위험하다 느낀 건, 문득 시온 숲에 사는 콜로라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강인한 턱과 갈고리 같은 발톱을 가진 콜로라툼은 느린 속도와 종잇장처럼 얇은 가죽을 가진 놈으로, 일반적으로는 숲의 먹이사슬 최하층에 속해야 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용감하고 영리하게도 강력한 외피를 가진 흡혈 나무 몬스터를 몸에 두르는 것으로 약점을 보완, 중상위 포식자로 올라섰다. 그처럼 실눈 남자와 안개 거인의 손발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면?
기실 무시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저들도 그 사실을 인지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야 협공을 하고서도 밀리는 중에, 오히려 전력의 일부를 빼서 황제를 노리는 행동에 대해 납득이 되었다.
결국 저들에게 아무리 황제의 목숨이 중요하다 한들, 포스 쉴드를 깨는 사이 실눈 남자가 당해 버리면 모조리 망한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순 없죠.
촤르르륵.
일리나의 검이 여러 개의 원을 만들었다.
그러자 거기서 분출된 검영이 실눈 남자와 안개 거인의 손발 사이를 가로막았다.
실눈 남자가 혀를 찼다.
“이런, 젠장. 눈치도 참 빠르시지, 야박하게 그걸 쳐 내시나.”
그러나 말과 달리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에 일리나는 검막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허공에 어지러운 발그림자를 만들었다. 파파파팡!
그걸 곡도로 막아 낸 실눈 남자가 그 틈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거인의 손발과의 접촉면을 넓히려는 수작이었다.
일리나는 즉각 검막의 위치를 조정하고 실눈 남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티디디딩!
검과 곡도 사이에 불꽃이 튀기고.
다시 도망과 추적의 반복.
그동안 여든아홉 개의 초식이 오가고, 열한 개의 상처가 생겼다. 당연히 모두 실눈 남자의 몸에 생긴 것들이었다.
과연 안개 거인을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베린이 빠진 영향은 컸다.
실눈 남자가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여기까지 하죠.”
실눈 남자가 가진 수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
추와와와!
일리나는 한걸음에 공간을 좁힌 후, 빈손으로 태극을 그렸다.
이드와의 대련에서 익힌 것 중 하나.
그녀의 손끝에서 일어난 흡입력이 충돌을 이용해 거리를 벌리려는 실눈 남자를 옭아맸고, 그 순간 일리나의 팔꿈치가 명치에 박혔다.
“푸흡…….”
호흡이 끊어지는 동시에 대맥이 흔들렸다. 덕분에 실눈 남자의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그러자 일리나의 손바닥이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굽어진 적의 뒤통수 위로 떨어졌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연계.
그러나 일리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끝입니다.”
그야말로 최강의 부활 주문.
플래그 중의 플래그가 따로 없었다.
과연 그 순간. 쿠르르릉!
웅크린 실눈 남자의 가슴에서 하얀 번개가 솟구쳐 일리나의 손을 때렸다.
콰앙!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 아래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일리나는 손끝에서 올라오는 강한 통증을 느끼면서, 함께 밀려온 반탄력에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런 중에도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고, 시선 역시 실눈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깊게 갈라진 손바닥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일리나는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실눈 남자의 손은 어느새 하얀 털장갑을 낀 것처럼 변해 있었다.
안개 거인의 손발은 여전히 검막이 막고 있는데 어떻게?
의문이 생겼으나, 일리나는 거의 그와 동시에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내 단단한 검막에 가시가 솟았다.
퍼석.
반복해서 검막에 들이받던 안개 거인의 손발 중 하나가 속 빈 강정처럼 형편없이 찌그러져서 사라졌다.
“궁금하신가 보군요. 별거 아닙니다. 벽이 아무리 높아도 바람이 넘나드는 걸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안개가 옅어지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미세하게 나뉘어 옮겨 간 모양이었다. 굳건한 형태를 가진 데다 굉장한 힘을 발휘했기에 도리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런 요령은 제게 계속 숨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아쉽지만, 더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최소한 두 개까지는 장비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미 아신 이상, 후작 부인께서도 더 철저히 막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조금 더 힘을 쓰기로 했어요.’
쉬리리리릭-
과연 검의 움직임이 변하더니, 돌연 검막이 보자기처럼 펼쳐져 거인의 남은 발 두 쪽을 가두었다. 바람째로 공간을 나눠 버린 것이다. 마치 지금 황제를 보호하고 있는 포스 쉴드처럼.
“휘유~ 마인드 마스터의 오리지널 무공은 역시 굉장하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 손 하나를 얻었고, 후작 부인께선 왼손을 잃으셨습니다. 거기다 신경 쓸 것도 늘었고요. 이제 좀 할 만할 것 같군요.”
“왼손이라. 그게 무슨 말이죠?”
덤덤하게 말한 일리나는 곡도를 휙휙 돌리는 실눈 남자를 향해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뿌득. 뿌드드득.
그러나 그녀는 그냥 든 게 아니었다.
손이 위로 올라오는 동안, 강력한 내력에 어긋났던 뼈와 기혈이 강제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덕분에 어느새 온전히 움직이는 손가락이 인사라도 건네는 양 실눈 남자를 향해 지력을 뿜어냈다.
퓨퓨퓨!
따따땅!
일리나의 그런 박력 넘치는 태도를 본 실눈 남자는 불퉁한 얼굴을 하고서는 곡도로 지력을 쳐 냈다. 그리곤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도망치며 조금씩 빼내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우우웅~
일리나의 손끝에 수강이 솟아올랐다.
과연 안개 거인의 손이 더해지는 것으로 얼마나 바뀌었을까. 일단 이동 속도에는 큰 변화가 없는데 말이다.
떵! 떠떠엉!
“후웁.”
일리나는 손끝이 뻐근해지는 충격을 다급히 흘렸다.
손바닥에서 다시 출혈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변하지 않은 건 이동 속도뿐인 것 같았다.
“제법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강하다. 일리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 거인의 손을 얻고 힘은 2배, 도속은 1.5배 가량 늘었다.
전체적으로 대략 30% 정도 전력의 증강이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손 하나에 30%라.
나머지가 모두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베린의 안개 거인과 실눈 남자는 궁합이 좋았다.
“크하합!”
누르고 있던 본성을 드러내듯 거침없이 기합을 내지르는 실눈 남자의 무공은 선이 굵고 매우 직선적인 게, 지극히 남성적이었다.
안개 거인은 그런 그의 힘과 속도를 키웠으니, 만약 그의 무공이 섬세하고 변화가 많은 종류였다면 지금만큼의 효과는 보지 못했으리라.
예를 들어 손을 얻기 전의 그가 그레이트 소드 초입 정도였다면, 손을 얻은 지금은 중급. 삼검왕의 수준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것이 고수의 승부인 만큼 ‘조금’이라는 표현을 쉬이 쓰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삼검왕에 비교할 수 있다는 자체로 대단했다.
‘삼검왕은 이런 자들이 있다는 걸 과연 알고나 있을까.’
그녀는 모른다. 이드도 이베인을 두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부창부수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물론 그래봤자 겨우 팔 한 짝이다.
일리나는 겨우 그 정도로 비벼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요.”
충차처럼 묵직하게 치고 들어오는 곡도를 내려쳐 두 쪽으로 갈라 버린 뒤 내뱉은 일리나의 말.
실눈 남자는 도속을 더욱 끌어 올렸다.
공기 마찰로 곡도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달라지고 있지요.”
이 결과가 뻔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러고 보면 이 싸움은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콰지지지ᅳ
아까부터 들리던 소리.
일리나가 그에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실눈 남자는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곧 황제의 목이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후작 부인은 가지 못하시겠지요.”
쿠릉! 쿠르르르릉!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둥이 두 번 쳤다. 시간 간격을 두고서였다.
개중 첫 번째는 검막에 갇힌 안개 거인의 발에서부터 시작했다. 힘으로 밀기만 하던 것들이 갑자기 공간을 뒤트는 바람에 검막이 깨질 뻔했다. 내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겨우 검막을 유지했지만, 그 틈을 노려 두 번째 천둥이 이어졌다. 곡도를 든 손의 갑작스러운 급가속에 또다시 손에 상처가 생겨 버렸다.
갇혀 있음으로서 오히려 내공을 흔들다니.
그렇다고 풀어놓을 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한 시간차 공격이 가능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이래서야 정말 황제 쪽에 신경 쓰기는 어렵게 되었다.
과연 실눈 남자의 목을 벨 때까지 황제 일행이 버텨 줄 수 있을까.
포스 쉴드 말고도 방어 수단은 더 있다지만, 설마 그걸 모르고 베린이 저기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닐 터.
“거의 다 됐어! 조금만 더 잡고 있어!”
“일리나 님!”
때마침 들려온 베린과 황녀의 목소리.
일리나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조금・・……무리를 해야 할지도.’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무섭게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하십니까.”
그걸 알아본 실눈 남자도 한층 더 긴장했다. 나름 허세를 부리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일리나는 버티는 것도 버거운 강적이었다.
“실눈 씨, 이름이 뭐죠?”
“실눈・・・ 이갈입니다만?”
“네, 이갈, 당신. 말이 너무 많아요.”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 뒤, 일리나의 검이 이갈을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검과 검막 사이를 이어 주던 내공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럼에도 검막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촘촘한 상태에서 날이 섰다.
예기만으로 안개 거인의 두 발 여기저기가 쩍쩍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동시에 일리나의 검에도 검은색에 가까운 붉은색 검강이 음울하게 피어올랐다.
하나로 이어지는 극히 짧은 움직임.
하지만 그사이, 일리나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배어 나왔다. 그만큼 극심한 심력과 내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의미.
‘심중유검.’
단서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심검을 꺼내든 탓이었다.
완성되진 않았지만, 이미 완성된 검막을 유지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넘쳐흐르는 기세만으로도 이갈의 몸이 굳을 정도의 압박감을 만들어 냈으니까.
그렇게 마음의 검이 검막을 향하는 동안, 수중의 검은 빠르고 은밀하게 이갈의 허리춤을 휘감아 지나고 있었다.
푸확!
진득한 피가 흘렀다. 이갈이 겨우 몸을 움직여 반응했을 때는 이미 비혼화가 복부에서 옆구리까지 자상을 남긴 후였다. 그도 내장이 들어다 보이는 상처에는 허세를 부리지 못하겠던지, 쓰러질 듯 휘청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일리나가 선언하듯 말했다.
“당신이 졌습니다.”
“크흐…… 흐흐. 아니요. 제가 이겼습니다.”
빠가가가가가
조합이 맞지 않는 톱니바퀴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 바로 포스 쉴드가 내는 단말마였다.
직후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나같이 다급했다.
“열렸다!”
“황제! 황제부터 노려!”
“폐하, 뒤로 물러나시옵소서!”
“아바마마!”
하지만 그런 생생한 목소리에도 일리나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이면 같이 몸을 빼려던 이갈이 의아한 눈빛을 한 채 피가 흐르는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태연한 겁니까?”
“지원을 요청했다고 말했잖아요.’
“…..!”
“그래서 우리 남편이 지금 막 도착했거든요.”
“……누구요?”
남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