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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12화


1147화

“황제면 황제답게 상대를 똑바로, 당당히 보세요.”

가르침을 내리는 엄한 목소리.

황제는 머릿속을 간질이는 추억 속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려다, 무언가를 떠올리곤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할마마마께서 저런 투로 말씀을 꺼내시면 분명 그 뒤에는

“황제의 그런 태도는 좋지 못하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습니까. 이번 일만 해도 그래요. 황제라면 응당 그만한 독심과 결단은 내릴 수 있어야지요. 그러나 황가의 일에…”

제발 아니길 바랐지만, 예상대로였다.

어린 시절 검후를 화나게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던 그때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황제. 듣고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할마마마.”

그나마 이 방에 있는 이가 자신과 검후, 둘 뿐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어허!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말라니까요!”

“잘못했습니다. 할마마마’

다른 건 몰라도 황녀에게만은 죽어도 이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황제의 머리에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세상에, 야단맞는 황제라니.’

이드는 민망함에 내심 어쩔 줄 몰라 했다.

황제에겐 불행하게도 이드가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었다.

따로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고, 검후가 음성을 차단하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던 것뿐인데…… 설마 그 후에 이런 민망한 대화가 이어질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지만 민망한 한편으로는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할머니 앞에선 여전히 철없는 손주일 뿐이었다.

‘잘못했습니다 하는 소리가 아주 자동이네, 자동이야.’

검후가 무어라 말만 하면 황제는 연신 잘못을 빌어 댔다.

그에 이드가 키득거리고 있자 라미아와 일리나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고, 이드는 기꺼이 두 사람에게도 자신이 듣고 있는 대화를 중계했다. 이런 재미를 혼자 즐기는 건 부부간의 의리에 어긋났다. 당연히 나눠서 함께 즐겨야지.

그리고 그 결과.

“뭐 하시는 거지?”

한데 모여 얼굴을 붉힌 채 어깨를 들썩거리는 세 사람의 모습은 스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때마침 황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께서 나눌 이야기가 많으신가 봐요.’

“전하께서 검후님을 다시 뵈었을 때처럼, 두 분께서도 풀어야 할 오해가 많으실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그런 황녀를 위로하는 쉴라의 목소리에.

바르르르,

머리를 한데 모은 세 남녀는 터지는 웃음을 꾹 참느리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정말 왜 저래?”

스폴의 의문이 더 깊어진 건 덤이고 말이다.

그렇게 누구는 걱정을, 누구는 폭소를 끌어안은 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철컥.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문이 열리고, 검후와 황제가 내려왔다.

밑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검후가 잔소리를 1절로 끝낸 덕분이다.

그래서인지 검후의 표정은 시원섭섭했다.

반대로 황제는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이다.

그 잠깐 사이 몇 년은 늙어 버린 것 같다고 할까.

위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 갔는지 알고 있는 이드에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금방 눈가가 촉촉해진 황녀가 왈칵 달려들어 검후와 황제를 동시에 안았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두 분이 화해하셔서 너무나 기뻐요!”

그리고 이 모습에 이드는 다시 한번 폭소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사실 황녀의 말도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황제는 용서를 빌었고, 검후는 그를 용서했으니까.

다만 아무렴 아버지로서, 또 황제로서 체면이 있지. 검후에게 야단맞은 일을 어찌 솔직하게 밝힐 수 있을까.

“걱정시켜 미안하구나.”

그저 점잖은 표정을 하고는 황녀의 등을 토닥이는 황제였다. 그 모습이 꽤 감동스러웠는지 쉴라와 스폴은 물론, 근위 기사들의 눈가도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며 이드는 내심 한 가지 장담했다.

이 순간만큼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현장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몇 명을 예외로 둔 감동의 순간이 지나고, 이드 일가와 검후, 그리고 황제와 황녀가 함께 둘러앉았다.

기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한발 물러나 그들 뒤에 시립해 있었다. 아무렴 황제가 앉은 자리에 아무나 함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드였다.

“두 분 사이에 쌓인 오해가 풀어진 것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진정 제국의 복입니다.”

“고맙소.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이번 일에 명예 후작과 두 분 부인의 도움이 컸음을 잊지 않겠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속을 보면 사실 황녀님의 공이 가장 지대합니다.”

겸손을 담은 이드의 말에 모두의 눈이 황녀를 향했다. 오늘 이 만남에 그녀의 역할이 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네 말에 한층 더 신경 써서 귀를 기울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황제의 발언에 황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간단한 약속이지만, 무려 황제가 한 말이었기에 그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황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는 그만큼 황녀의 발언권이 강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건 그대로 그녀의 권력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장녀로서 적잖은 발언권을 가진 황녀의 권력이 더 강해진 셈이었다. 어쩌면 이후 결혼 상대를 고르는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황제와 황녀 간의 일.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황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할마마마께서도 이제 공식적으로 복귀하심이 어떨지요?”

”・・・・・ 복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소드 팰러스와 저들 삼검왕을 언제까지 저대로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삼검왕이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검후에 대한 견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가 사라진 후, 제국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려는 듯한 삼검왕의 행보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는 아나크렌 제국의 황제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드 팰러스의 가치도 가치지만, 소드 팰러스의 시작이 어디이며, 그 주인은 또 누구인가.

대륙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간단한 진리를 부정하려는 삼검왕의 야망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었다.

지금까지는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 없어 명분이 부족했지만, 검후가 돌아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삼검왕은 더러운 배신자가 된다. 소드 팰러스라는 신성한 이름에 잠시 흠집이야 생기겠지만, 검후가 있다면 명성을 되찾는 건 금방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검후가 고개를 저었다.

“때가 아니라니요? 할마마마를 가로막을 게 무엇이 있다고요.”

“많지요. 황제의 실수가 드러날 수도 있어요.”

“그에 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검후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었지만, 화해를 통해 그마저도 사라진 셈이었다.

“황제. 세상에 그리 쉽게 확신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요. 게다가 바벨 등의 다른 문제도 있고요.”

“바벨? 그들이라면 삼검왕과 같이 죄를 물어야 할 자들이 아닙니까.”

“아바마마. 할마마마께서는 바벨에 대해서도 용서할 생각을 하고 계세요.”

검후를 대신해 말을 꺼낸 황녀는 검후와 이드, 그리고 라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만약 삼검왕에게 할마마마에 대한 죄를 묻게 되면, 바벨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황녀의 말대로입니다. 지금 그들과 함께하는 일이 몇 있기에, 더욱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검후의 말에 황제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제국에 대한 역심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하긴, 제국의 황제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사건이리라.

검후는 이드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곤 황제와 그 옆에 있는 황녀를 상대로 여태까지의 상황을 오해가 없을 정도로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초인과 별, 그리고 바벨을 이용해서 찾고 있는 혼돈의 파편의 관계. 마탑의 초인 마법과 바이트 타블렛에 대해서까지.

자연히 뒤에 선 기사들의 귀에도 들어가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전날 죽을 뻔한 위험을 넘긴 황제가 데려온 기사들이다.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인지는 이미 증명된 셈이었다.

쉴라와 스폴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 믿기 힘들군요. 혼돈의 파편이 그렇게나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데다, 카논에도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니요.”

“황제. 그들이 대륙전쟁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것이 고작 백 년 전입니다.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에요. 게다가 당시에도 그들을 물리쳐서 전쟁을 막은 게 아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들이 이제 와서 다시 움직인다니………… 허허.”

“말씀 중에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와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해 왔습니다. 그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이드는 황제의 말에 잘못된 점을 고쳐 주었다.

“명예 후작의 말은 알겠소. 하지만 말이오. 삼검왕의 일인인 존 워스가 사실은 혼돈의 파편이라니, 기가 막혀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가 혼돈의 파편이라고 가정하면 존 워스의 갑작스러운 행동들에 대해서도 모두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는 거요. 혹시나 해서 묻겠소만. 그럼 존 워스를 제외한 삼검왕의 야심이나, 그에 대한 내 반응도 설마 혼돈의 파편이 계획한 거요?”

이드는 그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슬쩍 돌아본 검후도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말 몇 마디에 역심을 품을 정도로 줏대 없는 자들이라면 지금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겠죠. 그게 아니라도 혼돈의 파편 입장에선 소드 팰러스가 다른 곳에 힘을 빼기보다는 초인들을 견제해 주는 것이 더 득이었을 테고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황제에 검후가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충격적일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만간 드래곤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허허, 백 년 전 사라진 전설들이 몽땅 되살아나는군요. 이러다 마인드 마스터 본인도 다시 나오겠습니다.” 

황제는 놀라기도 지친 듯,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음…….”

헌데 그에 대한 검후의 반응이 의미심장하다. 이드가 턱을 긁적이고, 쉴라는 먼 곳을 향해 눈을 돌린다.

별거 아닌 행동들이지만, 그것이 모이자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할마마마?”

“크흠. 뭐, 이번 기회에 알아 두는 것도 좋겠지요. 황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여기 이드 명예 후작은 과거 우리 황실을 구원하고, 혼돈의 파편으로부터 세상을 한번 구했으며, 나의 스승으로 대륙에 무공이 알려지도록 한 그분. 마인드 마스터 본인입니다.”

“……”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나 보다.

황제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심지어는 그옆에 황녀와 뒤에 있는 근위기사들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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