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713화


1148화

파르르 떨리는 열두 개의 눈이 자신을 향했다.

이드는 내심 곤란함을 느끼며 검후를 힘껏 쏘아보았다.

‘아니, 이렇게 뜬금없이 까 버리면 어쩌라고!’

물론 조만간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정체를 밝혀 협조를 받을 생각이긴 했다.

혼돈의 파편이 카논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알릴 생각은 아니었다. 

“코홈.”

그의 눈길에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검후.

‘이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냐!’

하지만 이드가 뭘 더하기도 전,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황제가 먼저 참았던 숨을 토했다.

“하아~ 환장하겠네.”

그 입에서 나온 것은 황제의 품위를 저기 어디 시장통에 내던진 양 거침없는 푸념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

검후의 옷깃을 잡은 황녀가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말했다.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 알려 주셨어요?”

“많이 놀랐습니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느껴지시나요?”

황녀는 검후의 손을 제 가슴에 대고는 새삼 이드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제가 지금까지 마인드 마스터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아요.”

검후는 그런 황녀의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밀로 한 이유는 간단하답니다. 지금 황녀가 놀라는 것처럼, 이드 님의 존재가 가져오는 충격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주변으로 모여들어 이드 님의 일을 방해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밝힌 것이지요.”

이는 또한 황제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기도 했다.

황제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지는 것을 본 이드는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정이 있었다 하나, 그간 폐하를 속여 왔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용서하오. 용서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오.”

다행히도 황제는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불만은 딱히 없어 보였다.

다만, 그럼에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했던 모양이다.

“할마마마.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방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당연히 아시고 있겠지만, 이 일은 함구하셔야 합니다.”

“허허. 당연하지요. 설령 말한다 한들 쉽게 믿기나 하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황제가 돌아갔다.

귀환하는 길 내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황녀만이 눈이 부시다는 듯, 또 영광이라는 듯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이드를 훔쳐볼 뿐이었다. 그렇게 곤혹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이드는 아직 거실에 있는 검후를 잡고 따졌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터트려 버리면 어떻게 해!”

“죄송해요. 마침 적당한 타이밍이다 싶었거든요. 어차피 조만간 밝히려고 했던 일이기도 하고.”

“그건 어디까지나 조만간이지, 오늘은 아니었다고.”

“어차피 할 거, 한꺼번에 하면 좋잖아요. 굳이 번거롭게 또 황제를 찾을 필요도 없고, 앞으로 이드 님이 할 일에도 황제가 거들면 얼마나 편한 게 많겠어요.”

“……그건 그렇겠지.”

다른 이도 아니고, 대륙 최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크렌 제국의 황제였다.

그런 인물이 뒤를 든든히 받쳐 준다면 확실히 토벌부터 카논의 일까지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다고 상의도 없이 너 혼자 결정한 건 분명히 잘못이야.”

“그건 죄송해요.”

검후가 애교를 부리며 배시시 웃었다.

이드는 그런 검후의 얼굴을 밀어내고는 스폴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제 일행과 마찬가지로 오늘에야 이드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상당히 놀라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웬걸.

놀라긴커녕 도리어 개운한 얼굴로 과자를 씹고 있다.

“스폴은.. 별로 놀란 것 같지가 않네요?”

“자기는 그럴 줄 알았대요.”

라미아의 말에 스폴이 씹고 있던 과자를 꿀떡 넘겼다.

“제가 기사단 안에서도 한 눈치 하거든요. 그런데 이드 님과 검후님. 두 분을 다 모셔 본 입장에서 미묘하게 어색한 모습이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모르는 두 분 사이의 어떤 비밀이 있구나 했죠.”

거기에 검후의 평소 말투나 행동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어서 더 티가 났다는 말을 덧붙이는 스폴이었다.

그에 이드 역시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숨기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검후와 스폴처럼 서로를 잘 알고,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던 상대라면 더욱더 그렇다.

“어머나.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티가 났단 말이니?”

나름대로 철저하게 감추고 있다고 자신했던 검후는 실망하기보단 신기해했다.

일반적으로 연기자는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검후는 달랐다. 미세한 근육을 조절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기감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제삼의 시점에서 관찰하는 것조차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드를 대함에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스폴은 그 속에서도 이상한 부분을 알았단다. 신기할 만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오로지 저만 알 수 있는 미묘한 차이. 바로 검후님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 낸 기적을 통해 알아차린 거죠!”

“…..그렇다 치고, 쉴라가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니?”

“사실 그건 몰랐어요. 어떻게 된 게 전혀 티가 나지 않았거든요. 정말이지, 이런 일에까지 철저하다니. 아무리 우리 단장이라지만 질린다니까요.” 

쉴라는 혀를 내두르는 스폴을 무시하고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듯 검후를 보며 말했다.

“제게 마인드 마스터님이나 명예 후작님 모두 존경하고 감사해야 할 분이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입니다. 철저하기 위해서 뭔가를 숨기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한결같은 진심이 스폴의 눈치도 피해 가도록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오로지 정도를 걷는 대답.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듣기에는 조금 숨 막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오오~ 역시 우리 단장님. 더더욱 재수 없는 말씀만 하셔.”

그래서인지 스폴은 혀를 쏙 내밀고는 실로 두렵다는 듯 몸을 과장되게 바르르 떨었다. 진심을 가득 담은 장난이랄까.

“저러다 또 한 대 맞지.”

그에 대해 이드가 혀를 차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스폴의 머리 위로 쉴라의 주먹이 떨어지고 있었다.

빠악!

유난히 감정이 실린 듯 소리부터 아프기 그지없었다.


일리나가 황녀궁에 나타났을 때처럼 이드 역시 홀연히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 어딘가를 말없이 바라보던 황제는 곧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허허, 마인드 마스터라니,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구나.”

“저도요.”

“정말 몰랐느냐? 왜 일찍 알려 주지 않으셨느냐고 네가 할마마마께 했던 말은 사실 내가 더 하고 싶었다.”

하나 오늘에야 겨우 검후와 화해한 황제로선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의혹을 품은 황제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황녀가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할마마마에 대한 말을 아바마마께 더 빨리 꺼냈을 겁니다.”

단순히 황제와 검후의 관계라면 황제가 검후를 버릴 것을 걱정해야겠지만, 검후 옆에 마인드 마스터가 있다면 반대로 검후가 황제를 버릴 경우를 염려해야 할 테니 말이다.

“고얀 녀석. 대놓고 아비에게 압력을 넣으려 했단 말이 아니냐.”

“잘한 일이라 하셨잖아요.

“그랬지. 휴우~”

부녀간의 가벼운 실랑이를 끝낸 황제는 곧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가 그런 황제의 손을 잡았다.

“걱정이 크시군요.”

“그래. 마인드 마스터라니. 멀게만 느껴지던 혼돈의 파편의 위험이 새삼 실감이 난다. 세상의 멸망이라…… 망할 놈들. 역사 속 기록으로나 남아 있을 것이지.”

“걱정 마세요. 아바마마 곁에 제국이 있고, 검후님도 계시잖아요. 마인드 마스터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혼돈의 파편을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후후. 네가 원래 이리 긍정적이었느냐.”

“오늘부터 그러려고요.”

황제는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는 황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계속 그랬으면 좋겠구나. 들어가서 자거라.”

“편히 쉬세요. 아바마마.”

황녀를 들여보낸 황제는 근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늘의 외출을 위해 사람들을 물린 황제의 침소는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곳곳에 몸을 숨긴 기사들로 인해 어느 때보다 삼엄하기도 했다.

“그대들도 오늘 수고가 많았다. 가서 쉬도록 하라.”

침소 앞에 도착한 황제가 그를 호위했던 근위 기사들의 수고를 치하했다.

오늘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비밀로 하라는 말도 따로 하지 않았다. 비밀 유지는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근위 기사에게 있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편히 잠드소서, 폐하.”

그렇게 근위 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선 황제가 문을 닫았을 때,

오래전부터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오날도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셨던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글쎄. 잘 끝났는지 모르겠소. 지겨운 잔소리만 실컷 들었으니까.”

지금도 귓구멍이 아프다는 듯 황제가 귀를 문질렀다.

레오날도 후작은 그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가까이서 그를 모셔 온 후작은 저것이 검후에 대한 황제의 애정 표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폐하께 그런 잔소리를 해 주실 분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좋은 일입니다.”

“할마마마께 당하고 오면 그대는 항상 그런 소리만 하지. 술이나 한 잔 주게.”

“곧 주무실 텐데, 차가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술이 좋겠네. 울펜에게서는 좀 나온 것이 있나?”

레오날도 후작이 따라 주는 술을 한 모금 마신 황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엔 숨기지 못할 살기가 돌았다.

울펜 베리히 남작.

본래는 침소를 관리하는 자 중 하나로, 황제가 습격을 받고 돌아와 외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조사해 찾아낸 배신자다.

지금은 지하 감옥에서 철저히 감시받고 있는 처지로, 레오날도 후작이 그에 대한 취조와 고문 등 모든 처리를 맡았다.

무슨 죄인 취조에 후작이 나서나 싶지만, 무려 황제 시해 사건이다. 후작이 아니라 황제가 직접 채찍을 들고 나서도 이상할 바 없는 큰일인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아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배신을 한 건 아니라는 건가.”

분명 사로잡혔을 때를 대비한 훈련을 받았을 터였다.

“해서 내일부터는 약물과 초인기를 같이 이용해 보려 합니다.”

“정신계 마법은 쓰지 않는 건가?”

“아무래도 그건 마지막 수단이니까요. 아껴 두겠습니다.”

정신계 마법의 경우 그 시도 한 번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백치가 될 수도 있었으니.

게다가 신전에서도 싫어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쓰긴 무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정말이지 다른 방법이 없는 최후에나 사용해야 했다.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하고, 대신들과 귀족들의 반응도 살폈겠지?”

“다행스럽게도 수상한 행동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습격 사건에 제국의 귀족들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자네만은 날 대신해서 확인된 사실도 두 번, 세 번 의심해야 해.

“……혹 검후님을 뵙고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평소와는 다른 황제의 반응에 레오날도 후작이 관심을 보였다.

“알고 싶은가?”

황제는 그런 레오날도 후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이드의 정체를 밝히기 직전 검후가 짓던 표정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과연 황제 본인은 알고 있을까?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