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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15화


1150화

징징거리는 검후를 떼어 낸 이드는 일리나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쉴라와 비올라의 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검후에 대해 생각했다.

쉴라를 딸처럼 아끼는 그녀라면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할 거라 여겼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올라가 뛰어난 마법사이긴 하지만, 쉴라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 것은 분명했다. 또 크고 작은 단점도 많았다.

그런 만큼 아무래도 쉴라가 아까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비올라를 쉴라 경의 짝으로 괜찮게 보고 있다는 건가?”

막상 말을 꺼낸 이드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아무래도 ‘반짝이는 두피’와 ‘일등 신랑감’이라는 단어는 나란히 쓰이기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다르다지만 저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꽤 흥미진진한 전개가 펼쳐지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했다.

잠시 후, 라미아와 함께 있는 일리나를 찾아낸 이드는 곧장 데이트를 신청했다.

“좋아요.”

그리고 일리나는 빼는 것 없이 이드의 손을 잡았다.

“어디부터 갈까요? 오늘은 일리나가 가자는 곳으로 갈게요.”

“라미아는요?”

“전 카논에 같이 갔다 왔잖아요. 둘이서 다녀와요.”

한 손으로 턱을 괸 라미아가 다른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러자 이드는 그런 그녀가 지루하지 않도록 흥밋거리를 던져 줬다.

“검후가 그러는데, 쉴라 경이 음식을 가지고 지하실로 내려갔다는데. 지하실에 비올라만 있는 거 맞지?”

“그렇다면・・・・・・ 갑자기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새로운 실험 주제가 떠올라서 지하실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데이트 잘 다녀와요~”

두 눈을 반짝인 라미아는 누가 붙잡을세라휭하니 지하실을 향해 사라졌다.

모르긴 몰라도, 저 황급한 걸음이 연구실 문 앞에서는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변할 터였다.

“재밌는 거 보면 꼭 이야기해 줘야 해!”

그런 라미아의 등에 대고 크게 소리친 이드는 곧 일리나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창문에 붙어 앉아 그 모습을 본 검후가 부러움에 비가 내리길 기도했다던가?

아무튼.

손을 잡고 나선 이드와 일리나 부부는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를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이후엔 일리나의 안내에 따라 작은 숲을 끼고 만들어진 산책로로 향했다.

그녀가 황녀를 호위하고 황궁과 저택을 오가며 보아 둔 곳이라고 했다.

“이드와 라미아가 돌아오면 같이 가려고 했던 곳이에요.”

도대체 어떻기에?

내심 고개를 갸웃하던 이드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일리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던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산책로 입구에 병사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리나에 의하면 이 숲과 산책로 일대가 황궁 소관으로, 이미 안티로스에선 그 경치가 유명하다고 했다.

장사 허가도 관리가 엄격해서 선택된 가게들만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산책로 주변의 건물은 하나같이 그린 듯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드는 일리나가 충분히 숲과 교감할 수 있도록 천천히 산책로를 거닐었다.

그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후, 둘은 근처의 한 찻집에 들어갔다. 여러 가게 중 유일하게 산책로 안쪽 숲에 테이블을 놓은 곳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시온 숲에 돌아온 것 같아요.”

꽃차가 담긴 찻잔을 든 채 나무에 나란히 기대앉은 일리나의 말이었다.

하긴, 숲에 있을 땐 자주 지금처럼 느긋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드는 조만간 일리나와 함께 시온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이번 토벌만 끝나면 잠깐 숲에 들를래요?”

“그렇지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요. 마침 라미아가 안정적인 공간 이동 방법도 찾았으니까, 오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이드는 그 말을 시작으로, 전날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 카논에서의 재밌었던 경험에 관해서였다.

아무래도 오늘 데이트는 이 찻집에서 끝나게 될 것 같았다.


・・・・・・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섣부른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이곳까지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게 잘못이랄까.

“명예 후작님의 표정이 좋지 못한데,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라울이었다.

이드는 갑자기 들이닥친 이 인간의 뻔뻔한 소리에 콧방귀를 날렸다.

“누구 덕분에 부부의 오붓한 데이트가 망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와하하하! 이것 참 민망하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후작 부인.”

말과는 달리 전혀 민망해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형식만은 정중한 사과에 일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자신보다 일리나에게 먼저 사과하는 라울의 눈치에 작게 한숨을 쉬고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자작이 갑자기 무슨 일이오? 용무가 있다면 저택에서 보면 될 텐데.”

“아무래도 검후님을 뵙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리고 명예 후작님이 돌아오셨다니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부담스럽다니. 검후가 들었다면 시원하게 비웃었을 말이다. 부담스러운 사람을 일 년이나 감금해 둔단 말인가.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고 바로 달려왔다는 겁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카논에 있어야 하실 분이 느닷없이 안티로스에 나타났으니까요. 오죽하면 가짜가 아닌가 싶어서 카논에 확인까지 했지 않겠습니까.”

“바벨이 내가 온 걸 이제야 알았다, 라.”

그 뻔뻔한 작태에 이드는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택을 24시간 지켜보고 있을 바벨이었다. 한데 자신의 복귀를 이제 알았다니. 어디 개도 물어가지 않을 헛소리를 저리 정성껏 하는지 모르겠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자신과 라미아가 카논을 언제 어떻게 떠났는지, 안티로스에 나타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방법으로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넘어왔는지.

그걸 알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으리라. 그러고도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직접 찾아온 것이겠지.

“괜히 남의 데이트 방해하면서 헛소리하려거든 그만 돌아가시오.

“왜 그리 말씀을 섭섭하게 하십니까.”

“내 기억으로 우리가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된 적은 없던 것으로 아는데. 솔직히 원하는 것이 있으니 달려온 것 아니오? 난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오.”

또 헛소리를 했다간 그대로 자리를 뜰 것처럼 차가운 기세. 그에 라울의 입이 즉각 열렸다.

“차원진을 해결한 후작 부인의 마법을 원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라미아의 공간 이동에 대한 건이다.

아무렴 규모가 큰 세력일수록 안전하고 빠른 공간 이동 마법이 더욱 필요할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런 반응을 볼 때, 바벨 역시 대규모 이동에는 마법을 사용해 온 것이 분명했다.

혹여 대규모 이동이 가능한 초인이 존재해도 거기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리라.

아무렴 ‘마법진’이라는 도구와 ‘초인기’라는 개인적 능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드가 바로 대답이 없자 라울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때마침 저희에게 넘겨주신 뱅커올슨과 이베인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설마 그걸 들고 라미아의 마법과 바꿔 가겠다는 건?”

“하하하. 아무렴 제가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저 원활한 대화를 위한 기름칠 용도지요.”

라울은 부정하지만, 이드가 보기에 그는 영락없는 사기꾼이었다.

애초에 그들에 대한 초기 정보를 넘긴 것은 이드였으며, 이후 그들에 대한 조사와 대응은 이드와 바벨이 공동으로 진행해야 했다. 즉, 당연히 내줘야 할 조사 결과라는 의미였다.

그런 걸 가지고 자칫 불편할 수도 있는 대화를 끌어가기 위한 소재 운운하는 자체가 이미 이드의 눈에는 반쯤 사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그의 신경을 긁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기다리는 분은 자작의 동행이오?”

“……명예 후작님의 허락도 없이 동행을 데려오진 않았습니다만?”

흠칫하는 모습이나 눈빛을 보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이드는 그에게 산책로 입구를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는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이렇다 할 만한 문장도 없는 평범한.

하지만 라울의 눈에는 다른 점이 있었나 보다.

날이 서렸던 눈빛에 이내 호기심이 들어찼다.

“황궁의 것입니다. 누굴 찾아온 걸까요.’

“당연히 자작이겠지.”

“글쎄요. 짐작 가는 일은 없습니다만.”

“그거야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니오.”

아무래도 이래저래 오늘 데이트는 완전히 망한 것 같다.

자포자기한 이드는 마차 안에서 이쪽을 보고 있을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까딱까딱.

볼일이 있으면 숨지 말고 당당히 나와라.


“으으음. 하필 저자가 만나는 사람이………….”

두 손을 얼굴을 감싸고 있던 레오날도 후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투명해진 문 너머로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레오날도 후작의 시선은 특히 이드와 일리나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못했다.

라울을 만나기 위해 나왔거늘, 어째서 저 두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일까.

심문에 실패한 레오날도 후작은 순간의 아이디어에 황제를 찾았다. 그의 목적은 더 강한 초인력에, 더 강한 초인기를 가진 초인을 확보하는 것. 그러나 황궁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정신계 초인은 심문에 실패한 라라였다.

당연히 심문에 필요한 초인을 외부에서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마침 라울이 안타로스에 있지 않던가.

그런 초인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바벨의 인간 말이다.

바벨에 건넬 협조 요청 허가를 받은 레오날도 후작은 즉시 라울을 찾아 나섰고, 그렇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라울이 설마 이드를 만나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명예 후작은 아직 어려운데.”

전날 황제를 통해 명예 후작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 레오날도 후작이었다.

명예 후작이 사실은 진짜 마인드 마스터라니.

그간 파악했던 이미지가 한순간 산산조각 나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에 오늘 밤 동행을 권하는 황제도 부담스럽다면서 거절했던 것인데, 설마 그렇게 피하려 했던 인물을 라울을 찾아와서 보게 될 줄이야. 

“이대로 돌아갈까.”

조금 늦긴 하겠지만, 협조 요청이야 다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소답지 않게 변명을 만들고 있던 레오날도 후작은 문을 사이에 둔 채 이드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도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먼 데서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이드의 손이 너무나 잘 보였기 때문이다.

“이 거리에서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고?”

혹시 다른 사람을 향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자신을 가리켜 보인 레오날도 후작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에 새삼 오싹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정말 날 보고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마차는 투명화까지 되어 있었다.

레오날도 후작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려 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지간한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방비가 되어 있거늘, 그걸 뚫어 보다니.

새삼 기록으로 남은 마인드 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가 떠올랐다.

그대로 잠시 망설이던 레오날도 후작은 큰 숨을 쉬고는 결국 마차의 문을 열고 나섰다.

괜히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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