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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16화


1151화

레오날도 후작이 마차에서 내리고, 이를 본 이드와 라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날도 후작이라니, 대단한 분이 직접 행차하셨군요.”

“역시 자작의 손님이잖소.”

“그 확신은 지난밤에 황제께서 방문하셨던 것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정확하다. 용건이 있다면 굳이 후작을 보낼 필요 없이, 오늘 밤 방문할 황제가 직접 이야기하면 될 일이니까.

그나저나 라울의 방금 발언. 자신들이 저택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이 태도는 뭘까.

자신감의 표현일까, 아니면 숨기는 것이 없다는 표시일까.

“알면 가 보시오. 굳이 사람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으니까.”

둘 중 아무래도 좋았다.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이드는 라울에게 축객령을 날렸다.

이곳은 안티로스의 핫 플레이스 중 하나다.

황궁에서 직접 관리하며 출입자를 가리는 건 물론이요, 주변 상점도 모두 고급이라 이용객의 대부분이 부자나 귀족이었다.

그런 만큼 제국 주요 귀족들의 얼굴 정도는 꿰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터였다. 그런 이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오날도 후작의 얼굴을 몰라볼까?

아니나 다를까.

레오날도 후작이 산책로에 나타난 순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둘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레오날도 후작이 저렇게 이목을 끈 채 여기까지 오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던 이드는 다시 한번 라울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라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명예 후작님이 오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냥 갈 리가 없지요.”

생각해 보니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레오날도 후작을 마차에서 끌어낸 건 분명 자신이었으니까.

‘그래도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이 레오날도 후작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아무리 이드라도 모든 사람의 기감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좀 더 집중했다면야 누군지 알아내는 것쯤이야 문제 없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이드는 그제야 좀 더 자세히 살필걸 내심 후회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그가 손을 치웠을 때, 이드의 얼굴은 어느새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눈썹과 그 아래 눈매, 코의 높이. 입술과 턱의 두께 등.

따로따로 보면 크게 변한 것이 없지만, 전체적인 조형이 바뀐 만큼 느껴지는 변화의 폭은 매우 컸다.

“호오~ 얼굴을 변화시키는 무공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초인들에겐 이 정도는 쉬운 일일 텐데?”

관심을 보이는 라울에 대충 답한 이드는 일리나의 얼굴도 살살 매만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깃든 내공이 근육을 당기고 조여 고정하자 빛나던 일리나의 인상도 어느새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이런 변화에 잠시 후 도착한 레오날도 후작이 미간을 모았지만, 곧 상황을 이해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우선 양해도 없이 이리 불쑥 찾아뵙게 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제국의 후작님께서 가지 못할 곳이 이 안티로스에 어디 있겠습니까.”

라울의 능청에 레오날도 후작은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곧 이드와 일리나에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단순한 사과 이상으로 매우 정중한 태도였다.

그리고 이드 역시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에게 내 정체에 대해서 들었구나.’

검후가 비밀을 당부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오른팔인 레오날도 후작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돌아가면 검후에게 이 사실에 대해 말해 둬야 할 것 같다.

레오날도 후작에게 밝힐 거라면 검후가 비밀로 하라고 할 때 미리 언질이라도 해 놓았어야 했다.

이후에 또 지금처럼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이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이드였다. 

“그런데, 폐하를 보좌하기에도 바쁘실 분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급한 용무가 있어 이리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레오날도 후작의 시선이 ‘내 목적은 너’라는 듯 라울을 향했다.

그에 이드는 일리나의 손을 잡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저희 이야기는 끝났으니, 두 분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골 아픈 일이 많은데, 여기서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빠른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드와 달리, 애써 마음먹고 나선 레오날도 후작은 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괜찮으시다면, 명예 후작께서도 함께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속삭이듯 조용히 이어지는 목소리.

“이틀 전, 명예 후작님의 도움으로 해결한 사건. 그리고 그와 관련한 배신자에 대한 일입니다.”

“……끄응. 뭡니까.”

무려 황제에 대한 습격에 관련한 사건이란다. 이런 큰 사건에 관해서라면 단번에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일어나다 말고 다시 털썩 주저앉은 이드가 작은 한숨과 함께 레오날도 후작에게 자리를 권할 때였다.

……!

호기심 가득한 눈빛은 물론, 자연스럽게 들리던 모든 소음마저 뚝 끊어지면서 갑작스럽게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레오날도 후작 앞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들어 좋을 것 없는 이야기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우선 한 잔 드시죠. 맛이 제법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섭섭하네요. 먼저 온 제겐 권하지도 않으시고.”

이드는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라울을 째려보고는 한마디 쏘아 주려다 곧 마음을 바꿨다.

‘자고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랬지.’

그렇다고 차를 내주기엔 잔이 모자란다.

슬쩍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즐겨 마시는 탄산음료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물론 저 능글맞은 작자에 그냥 줄 생각은 없다.

붕 부우웅~

캔이 탁자 위로 올라가는 동안, 이드의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진동했다.

“잔이 없으니, 자작에겐 차 대신 새로운 걸 드리지요. 여행을 갔다가 먼 곳에서 가져온 음료입니다.”

“오오~ 신기하게 생겼군요. 금속 표면에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까요.”

“거기 꼭지 같은 걸 당기면 열립니다. 아, 조금 있다가 여세요. 지금 열면 거품이 뿜어져 나옵니다.”

이드는 캔을 들고 요리조리 돌려 보는 라울에 가볍게 경고했다. 그러나 잠깐 기다리는 것으로 꺼질 거품은 절대 아니었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옆에 있던 일리나가 옆구리를 콕콕 찔렀지만, 이드는 애써 무시했다.

“거품이라니. 맥주 같은 거로군요. 그럼 새 음료의 맛은 레오날도 후작님의 용건을 들은 후에 볼까요.”

라울이 캔을 내려놓고는 레오날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이드와 일리나도 조용히 레오날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목적을 꺼내 보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결국 레오날도 후작은 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라울을 찾은 목적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라울 자작은 이틀 전에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소?”

“황제 폐하께서 습격을 받은 일 말입니까?”

“……과연 바벨, 역시 알고 있었구려. 그건 당분간 비밀로 해 주길 바라오.”

마치 옆집 부부 싸움에 대해 말하듯 가벼운 말투에 레오날도 후작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바벨의 정보는 오직 초인들을 위해 쓰일 뿐입니다. 저희가 무슨 정보 길드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 용건도 그 관련입니까?”

“……그렇소, 참담한 일이나, 습격과 관련하여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소.”

레오날도 후작은 천천히, 그러나 오해가 없도록 차분히 말을 이었다.

황제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문을 한 일. 그중에 배신자를 색출한 일. 배신자에게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심문을 했지만, 실패한 일까지.

“알겠습니다. 절 찾으신 이유는 저희 바벨에 협력을 바라서겠군요.”

“그렇소. 도움을 줄 수 있는 초인이 있겠소?”

타인의 정신에 침투하는 초인기라.

쓰기에 따라 활용도가 높고 동시에 매우 위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드도 궁금증을 가지고 라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라울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레오날도 후작님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곳 안티로스에 저와 함께 있으니,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지요.”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소.

“역시. 계산이 분명하신 분이십니다.”

마치 고객을 대하는 점원처럼 싹싹한 웃음을 보이는 라울이다.

이드는 상황을 지켜보다 말했다.

“그런데, 이 일에 제 도움도 필요한 겁니까?”

“아, 말씀드리는 걸 잊었군요. 아무래도 배신자의 몸에 못 보던 무공이 있는 듯해서 그렇습니다.’

“못 보던 무공이요?”

“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자는 어떤 고문에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신력 또한 무척이나 강합니다.”

“그 이유를 무공이라고 여기시는군요.”

이드를 팔짱을 꼈다.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방법이라면 살수들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감각을 가다듬어 더욱 섬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까.

하지만 그런 중에도 몇몇 목적으로 고통을 차단하는 방법들이 있기는 했다. 점혈도 그 대표적인 수단 중 하나였다. 마법과 신성력의 도움을 받아 급격하게 발전하는 중인 대륙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그런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다. 과연 어떤 방법을 쓴 걸까. 호기심이 생겼다.

“같이 가도록 하지요.”

레오날도 후작에 그렇게 답한 이드는 곧 나란히 앉은 일리나에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다 못한 데이트는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네요. 일리나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엘프의 눈은 심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문도 했다잖아요. 일리나에게 그런 흉한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나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장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일으킨다.

“알았어요. 먼저 그럼 돌아가 있을게요.”

그런 이드의 마음을 느낀 일리나가 순순히 물러났다.

“좋군요. 그럼 이것만 마시고 바로 일어나시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라울이 드디어 캔의 뚜껑을 땄다.

푸쉬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뚜껑에서 뿜어진 검은색 음료수가 라울의 얼굴로 치솟아 올랐다.

머리를 시작으로, 그의 상의까지 젖어 버린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저런~ 거품이 아직 꺼지지 않았던 모양인데, 좀 더 조심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혀를 차는 것과 달리 상쾌한 이드의 음성이다.

그 모습에 파르르 입술을 떨던 라울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들썩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음료 몇 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라울은 본능적으로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음・・・・・・ 거품을 뒤집어쓴 건 찝찝하지만, 확실히 독특하고 맛있는 음료긴 하군요.”

그리고는 캔에 남은 음료를 단숨에 들이켜는 라울이었다.

“캬아~ 좋군요. 명예 후작님, 이거 제가 사겠습니다!”

“……..”

역시 사람의 입맛이란 차원을 넘어서도 똑같은 것일까. 입맛을 다시는 라울과 반대로 묘하게 입안이 쓴 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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