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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18화


1153화

상황을 보아하니 일만 잘 풀리면 힘들게 카논으로 다시 날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나저나 무도가 황제를 노린 이유는 뭘까. 또 그 무도를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한 존 워스의 목적은?

이드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들을 잠시 뒤로 밀어 놓고는 라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까 뱅커올슨과 이베인에 대해, 자작도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것이 떠올라서 말입니다.

그땐 갑자기 나타난 레오날도 후작 때문에 듣지 못했지만, 울펜에게서 무도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니 라울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에 라울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피했다.

“그랬지요. 분명 그랬습니다만, 명예 후작님께서 방금 밝혀내신 것에 비하면 민망할 정도로 가치가 없어서 말입니다. 좀 더 잘 꾸며서 다시 내어

오겠습니다.”

-요리도 아니고 뭘 다시 내옵니까. 나는 자작이 민망한 것보다 궁금증을 더 못 참겠으니, 가져온 정보 얼른 보여 주세요. 그리고, 왜 아까부터 속삭이는 겁니까? 오러텅 없어요?

“그런 거 없습니다. 무인도 아니고, 초인인 제가 배우지도 않은 오러텅을 어떻게 쓰겠습니까. 다만 시간을 주시면 다음에 그 두 사람의 정보를 다시 내어 올 때까지 배워 오도록 하지요. 그러니 부디 즐겁게 기다려 주십시오.”

설마 천하의 라울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는 기술 하나 없을까.

설령 진짜 없다고 해도 대체할 만한 아티팩트 한둘은 가지고 있을 터였다. 바벨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럼에도 되지도 않는 변명과 함께 미끈거리는 장어처럼 이드의 재촉에서 달아나 버리는 라울이다.

그런 그는 행여나 이드가 다시 붙잡을까 싶어 재빨리 시사이판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명예 후작님께서 수고해 주셨으니, 이제 저희 차례로군요.”

“잘 부탁하겠소.”

“시작하기에 앞서, 후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심문 대상을 트렌스 상태로 만드는 약과 라라 경입니다.”

“……그런 조건은 없었잖소.”

사전에 없던 내용에 레오날도 후작의 음성에 당장 불신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건 갑자기 이름이 불린 당사자 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 이미 한 번 실패 했습니다.”

이드가 명예 후작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상대가 바벨 출신이라는 걸 들었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호감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벨의 정식 회원이 아닐뿐더러, 그런 감정에 공과 사를 혼동할 정도로 미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녀의 의사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라울은 레오날도 후작만을 바라보았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라라 경. 다시 진행하게.”

“……”

생각 끝에 레오날도 후작의 입에서 명령이 흘러나왔다.

결국 라라와 약사는 말없이 움직였다.

이미 한 번 했던 일이기에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약을 먹여 신경을 교란하고, 뇌를 약에 취하게 해 정신을 흐트러뜨린다. 이후 라라가 울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라의 손 옆에 시사이판의 손이 함께 올라왔다. 

“함께 잘해 봅시다. 라라 경.”

느끼한 목소리와 눈빛은 덤이었다.

그에 라라가 부르르 몸을 떨 때, 라울이 시사이판이 맡은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분은 혹시 정신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의지?”

“의지도 정신력의 일종이지요. 답은 기억입니다. 굳센 의지나, 단단한 정신력은 모두 경험이라는 기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수련하고, 실전을 치렀던 기억을 잃게 된다면 제대로 싸우지 못합니다. 외부의 침입에 저항하는 정신 방벽도 마찬가집니다. 정신력으로 침입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면? 당연히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부터 시사이판이 할 일이 바로 그 기억을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끄덕끄덕.

가만히 설명을 듣던 이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울의 설명에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틀린 부분도 있다. 기사를 예로 든 부분이 그랬다.

몸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엔 싸우는 방법을 머릿속에만 담아 두지 않는다.

진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머리보다 먼저 몸에 박아 넣어야 한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체계적이진 않지만, 몸에 새겨진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된다.

거기에 외부의 침입에 대해 저항하는 건 생물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그건 누구에게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대륙의 역사를 뒤지면 아기의 몸을 빼앗으려다 실패한 악마나 마족에 대한 기록도 많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이 어디서 악마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배웠겠는가. 그저 본능에 따라 저항했을 뿐.

물론 배우고 익히면 이 본능적인 저항을 좀 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막말로 운이 좋아 정신 방벽을 치는 방법과 함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이유마저 잃게 된다면, 울펜의 정신에 손쉽게 침투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한데 라라 경의 초인기가 통하지 않은 이유가 울펜의 정신 방벽이 아니라 제삼의 요인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 부분만 따로 봉인해서 분리하면 더 손댈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런 설명은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던 라라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라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달리, 이 방법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뭔가요! 갑자기 숨을 쉬지 않아요!”

“크흠. 다시 갑니다.”

“앗, 이번엔 정신계가 파편화되었어요.”

…..

“꺅! 이번엔 정신 방벽이 반전해서 역류를!”

…..

“어머머. 정신 방벽이 약해지긴 했지만, 필요 없는 연애 시절의 기억이…………….”

시사이판은 울펜의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해서 초인기를 여기저기 쿡쿡 찔러보듯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너스레에도 시사이판의 노력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드가 황궁에 있음을 안 황제가 식사를 제의해 왔다.

그가 기사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서재였다. 서재의 중앙엔 화려한 요리가 넉넉히 차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일부러 서재에 저녁을 준비시킨 것 같았다.

그곳엔 황제뿐 아니라 황녀도 함께하고 있었다.

이드는 순간 황제가 혹시 엉뚱한 관계를 노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이어지는 대화 내내 그런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도 저택으로 가려 했으니, 괜찮으시다면 이대로 여기 머물렀다가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던 이드는 재깍 황제의 제의를 승낙했다.

자신이 황궁에 있는데, 굳이 오가기 위해 일리나를 귀찮게 할 필요가 없었다.

“고맙소. 그럼 제법 시간 여유도 생겼으니, 할마마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주시겠소?”

“검후…… 에 대해서라면 저보다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오래전 검후를 만난 후 재회한 건 저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오. 특히 할마마마께서 감금되어 있던 곳과, 구출되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구려.”

검후와 묵은 감정을 풀어내었기 때문일까.

이드는 황제의 목소리에서 단단한 심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혹 폐하께선 마스와의 전쟁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경우에 따라선 그렇소. 나의 죗값은 할마마마께서 결정하실 일이나, 제국의 어른이신 할마마마께 범한 벌은 제국의 황제인 내가 내려야 할 테니까.”

아무렴 바벨처럼 납작 엎드린 것도 아니고, 사사건건 반발하고 나서는 마스였다.

그런 만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넘길 수 없었다.

“아, 그리고 할마마마를 구출할 때 나타났다는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세요.”

다소 급작스럽게 황녀의 말이 더해졌다.

“그걸 설명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하지만 황녀께선 이미 들어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또 듣고 싶어요. 무엇보다 명예 후작께선 할마마마를 구하고, 혼돈의 파편과 싸운 본인이시잖아요.’

아무렴 제삼자가 이야기하는 것과 본인이 설명하는 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드는 두 부녀의 은근한 재촉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고는 당시의 일을 꺼내 풀어 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이야기꾼이 되어야 했지만, 덕분에 시간은 잘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달도 높이 떠올랐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자들의 힘이 역사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강하군.”

거기에 중간중간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황제에 친절히 답해 준 덕분에, 황제 역시 이제는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존재가 나타난 시점에 다시 명예 후작이 우리 제국을 찾아 왔다는 것이 마치 운명같이 느껴지는구려.”

운명.

이드는 그 말에 입안이 썼다.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것이 바로 그 빌어먹을 운명 때문이 아니던가.

“이제 슬슬 이동하실까요.”

“그럽시다.”

이드의 권유에 황제는 전날 그를 호위했던 근위 기사들을 불렀다.

“이제 가십시다.”

“잠시만…….”

황제의 제안에 이번에는 이드가 손을 들어 그 앞을 막았다. 그리고는 잠시 말없이 묘한 표정으로 황제와 그 일행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택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건 라미아가 설명할 겁니다.”

스팟.

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옆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마치 원래 있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라미아가 튀어나왔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라미아가 로브 자락을 살짝 들며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황제가 한 박자 늦게 놀랐다.

본래 공간 이동이란 굉장히 복잡하고 대단한 마법이다.

그런 만큼 화려한 마나광이 수반되는 것은 기본이고 마나의 움직임도 거칠어질 만한데, 라미아의 이동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하물며 차원진으로 공간 이동 자체가 어려운 이때에 공간 이동이 차단된 황궁 안으로 이렇게 정밀하게, 태연히 이동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명예 후작 부인. 혹시 그대의 공간 이동 마법을 제국에 제공할 생각이 없으시오? 대가는 섭섭지 않게 지불하겠소.”

그런 감정을 그대로 담아 나온 황제의 거래 제안에 라미아가 살포시 웃으며 황녀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정말 두 분께선 똑 닮으셨군요. 황녀께서도 똑같은 거래를 요청하셨더랬지요.” 

“그랬느냐?”

“제국에 꼭 필요한 마법일 것 같았습니다.”

“잘했다.”

“호호호.”

라미아는 황녀를 칭찬하는 황제에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앞으로 자주 이동해야 할 듯하니, 아예 황궁과 저택을 마법으로 이었으면 좋겠다고 검후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자, 어디에 마법진을 설치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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