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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21화


1156화

야옹.

“그래그래. 너도 좋지?”

가르릉 가르릉.

무릎에 올라앉은 녀석의 머리를 긁어 주자 기분이 좋은지 골골송을 부른다. 그 사랑스러운 진동에 입가가 살살 풀린다.

거기에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까지 더해지니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역시 사람은 규칙적으로 해를 봐야 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가르릉.

이더비히는 결계에 부딪혀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햇살에 온몸을 내맡겼다.

오랜만의 일광욕이 너무나 좋았다.

영혼의 관 부관주인 그녀는 바쁘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마법의 연구는 물론이고, 부관주로서 처리해야 할 일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 중에도 빼먹지 않는 일과가 있었으니, 바로 일광욕이었다. 이를 위해 영혼의 관과 결계 사이에 작은 정원도 만들었다.

그녀는 답답한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면 사람이 우울해지고 음침해진다고 생각했기에, 종종 주변 마법사들에게도 햇볕을 쬐라고 권하고는 했다.

하지만 정작 이더비히 본인은 최근 일광욕을 즐길 수 없었다.

미완의 마탑이 갑자기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좋은 일도 아니고, ‘토벌’이라는 화끈한 사건과 함께.

덕분에 생명의 관과 정신의 관이 무너지며 그곳에 있던 마법사들이 넘어왔고, 그만큼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도 몇 배나 늘어 버렸다.

부관주인 그녀가 직접 움직일 일은 거의 없긴 하지만, 대신 검토하고 처리해야 할 서류가 하루에만 수십 개가 된다.

마법사들과 함께 돌아온 탑주가 전면에 나선다면 그녀의 부담이 덜어지겠지만, 탑의 운영은 뒷전으로 하고 미친 듯 연구에만 몰두해 버린 그로 인해 그런 기대도 접어야 했다.

그렇게 일에 치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였고, 이대로는 힘들다 싶은 그녀가 작정하고 시간을 만들어 일광욕을 나온 것이다. 야옹~

그때, 무릎에 올라와 있던 고양이가 작게 울며 몸을 뒤집었다.

이더비히는 고양이의 배를 살살 쓰다듬다 옆에 있는 작은 탁자로 눈을 향했다.

자신이 앉은 하얀 의자와 어울리는 귀여운 탁자에는 홍차 옆으로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골치 아픈 결재 서류가 아닌, 달콤 쌉싸름한 문장으로 가득한 로맨스 소설.

그녀의 일광욕에 항상 함께하는 삼총사 중 하나였다.

그녀는 행복한 기분으로 독서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몇 줄이나 읽었을까.

“부관주님!!”

익숙한 목소리가 다급히 그녀를 찾으며 달려왔다.

“하아~ 메이소우시여, 제 평화는 어디에 있나요.”

결국 이더비히는 긴 한숨과 함께 책을 덮었다.

<노르딘의 서ᅳ스펠 변화에 따른 마나 얽힘 현상에 대한 고찰>. 

표지에 적힌 제목이었다.

이더비히는 가볍게 책 귀퉁이를 쓰다듬고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사이 그녀 앞에 도착한 남자가 숨을 골랐다.

“송구합니다. 급히 보고드려야 할 내용이 있어 휴식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그 말과 달리 남자의 태도는 당당했다.

영혼의 관을 운영해 온 이더비히가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해해요. 무슨 일이죠?”

“가장 급한 건은, 발터 백작 저택 습격 사건으로 시작된 추적대에 오늘 검왕이 합류한 것입니다.”

“진행 방향은 여전히 이곳, 블레인이겠죠?”

“……아무래도 이 도망자 놈들이 저희 존재를 아는 것이 확실합니다.”

남자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분명 자신들과 관계없는 사건이었건만, 일을 벌인 놈들이 어느 순간 마스 국경을 넘어 영혼의 관이 있는 블레인 자작령을 향하고 있었다. 이동 경로가 점점 확실해지면서 이 사건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의 관에 대한 토벌을 끝낸 아나크렌 제국이 언제 영혼의 관을 찾아올지 몰라 긴장하던 차였다.

한데 그런 시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니 단순한 우연이라고 넘기기 힘들었다.

현재 마탑에서 놈들의 정체와 목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뭐하나 속 시원하게 나온 게 없었다.

바벨처럼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소드 팰러스처럼 인맥이 빵빵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검왕까지 추적조에 가세했다. 그가 나섰으니 마스도 중간에 일을 방해하기는 힘들 테고, 죄인들은 쉽게 잡겠죠?”

“검왕이 나서고도 잡지 못한다면, 그의 합류는 이번 일의 주체가 소드 팰러스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겁니다.”

“소드 팰러스를 통해서 검왕 측에 연락을 넣어요. 방향을 틀라고.”

“네. 그리고 이 건과 관련해서 마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 영혼의 관을 비우는 게 어떠냐고 말이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귀부인을 연상케 하던 우아한 표정이 무너지는 건 순간이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비웃음을 띄우고는 답했다. 마스의 대응에 대한 감정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봤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습니다.”

“헛소리는 무시하세요.”

이더비히는 은근한 분노를 담아 말했다.

마법사에게 마탑을 비우라니.

마법사는 마탑에 자신의 정수를 담아 둔다. 즉,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법사에 대한 이해라고는 티끌도 찾아볼 수 없는 권유 마스에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알려 줄 마법사도 없단 말인가.

야옹.

그런 집사의 기분을 느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이더비히를 진정시켰다.

“논의 중이라고 답해 놓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존 워스에 대한 추적인데, 흔적은 완전히 놓친 것 같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철벽의 검왕을 쫓는 일이 쉽지 않을 건 알았지만, 아쉽군요. 소드 팰러스로 돌아간 건 아니겠죠?”

“거기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제국에서 죄를 물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겠죠. 그럼, 보고는 이게 끝인가요?”

“마지막이 남았습니다. 최근 볼레인 영지 안을 수색하고 다니는 놈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확실한 건가요?”

“꼬리는 잡았습니다. 다만 바로 잡아들이려는 차에………….”

“놓쳤나 보군요.”

“바로 숨어든 것으로 보아, 보통 놈들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이놈들을 잡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볼레인 영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필요합니다만……?”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볼레인 영지는 영혼의 관 영역이었다. 자신들의 앞마당에 숨은 이상, 마음만 먹으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라면 이런 탐색을 위해서는 티가 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하기에 이더비히의 허가가 필수적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지금 다른 두 관에서 넘어온 마법사들이 영혼의 관에 넘쳐난다고 해도, 허락 없이 그들을 써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토독토독.

가늘고 긴 이더비히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답은 금방 나왔다.

“탐색은 중지하세요.”

“하지만…….”

“어차피 우리 위치는 이미 드러났어요. 소드 팰러스, 바벨, 마스까지. 정보가 샐 곳은 많다는 말이에요. 현재 추적대를 꼬리에 달고 있는 자들만 해도 그 목적은 우리 마탑이 확실하잖아요. 이런 상황에 굳이 우리 전력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부관주께선 탐색자들의 목적이 저희를 끌어내는 거라고 보시는 거로군요.”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함정일 가능성까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진 남자의 표정을 보며 이더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들도 슬슬 전투를 준비해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전에 마스가 확실한 결정을 내려 준다면 좋겠지만……..’

아무리 마스라도 자국에 검후가 감금된 문제가 있으니, 그렇게 쉽게 나설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쿠르르르릉!

영혼의 관 최상층에서 빛이 뿜어지며 시작된 진동에, 영혼의 관과 그 주변 땅이 흔들렸다.

캬오오오옹!

심상치 않은 기파에 축 늘어져 있던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더니, 이더비히의 무릎에서 뛰어내려 도망쳐 버렸다.

어차피 결계가 있는 이상 밖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이더비히와 남자는 도망친 고양이는 신경 쓰지 않고 빛이 잦아드는 최상층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충격이 약해지는 것이, 탑주님의 연구에 진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뻐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더비히는 손을 저어 그를 물러가게 했다.

그런 그녀의 눈엔 남자와 달리 심각한 걱정이 끼어 있었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남자와 달리, 그녀는 이 진동의 근원과 최근 탑주가 매달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이트 타블렛.

탑주는 잃어버린 진본을 대신해, 랜달의 콘티에롬을 써서 그것을 완성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진동은 그 와중에 발생하는 여파였고. 사실 이런 시도 자체는 문제 될 게 아니었다. 마법에서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권장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진짜 문제는 그 핵심이 되는 콘티에롬이 존 워스의 손을 거쳤다는 점이었다.

현재 추적대를 이끌고 영혼의 관을 향해 달려오는 페시딘과 더불어 삼검왕으로 불리는, 소드 팰러스의 철벽의 검왕 말이다.

이더비히는 콘티에롬을 전해 주기 위해 방문했을 때, 속을 알 수 없는 존 워스의 그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가 떠오를 때면 탑주의 손에 있는 콘티에롬이 불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콘티에롬은 여전히 탑주의 손에 있었고, 바이트 타블렛을 완성하려는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그녀는 스승이자, 그녀의 주인인 탑주의 결정을 뚜렷한 근거 없이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불안을 이대로 두고만 있어도 될까.

냐아앙~ 냐앙!

도망쳤던 고양이가 어느새 다시 나타나 그녀의 다리에 몸을 문질렀다. 이더비히는 녀석을 품에 안아 들고는 쓰다듬었다.

“혼자 도망치다니. 비겁한 녀석.”

야옹.

“다음에 또 날 버리고 가면 혼내 줄 거야.”

고양이의 코끝을 꼬옥 누르는 이더비히의 말이지만, 인간의 말을 알지 못하는 고양이는 그저 열심히 그녀의 손가락을 핥을 뿐이었다. 이더비히는 손끝에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감각을 멍하게 즐기다가 문득 무의식을 입 밖으로 흘리고 말았다.

“검왕을.. 만나 봐야겠어….”

가르릉.


협력을 약속한 라울은 영혼의 관이 있는 블레인 자작령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발터를 통해서였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일을 뭐 새삼스럽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나 이드를 통해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전해진 바와 달리, 이 건은 바벨을 통한 공식적인 정보였다.

바벨이라는 책임 소재가 생겼기에,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때마침 이드가 블레인으로 보내 둔 기사들에게서도 영혼의 관을 확인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정보는 이드에서 황녀로, 다시 황제에게로 전해졌고,

“검왕에게 전하라. 블레인이다!”

어전 회의를 주관하는 자리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대전을 울렸다.

바벨이 나선 이상, 마스도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뗄 수는 없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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