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27화
1162화
승패가 갈렸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벌어진 일이었다.
말릴 틈도 없었거니와, 설령 그럴 시간이 있었다 해도 말릴 수 없었다. 이건 대련이 아니고 목숨을 건 결투였기 때문이다.
“멈춰, 네이탠!”
애셔가 말리고자 급히 외쳐 보지만, 소용없었다.
화르르륵!
이미 눈이 뒤집힌 네이탠은 외부의 소리에 반응할 정신이 없었다. 오히려 커지는 흥분에 검기가 더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 모습이 흡사 횃불 같았다.
이대로라면 정원에 바인의 피와 내장이 뿌려지게 생겼다.
“이드.”
그 이상은 보기 싫은 것일까.
이드는 일리나의 부름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움직일 생각이었다.
네이탠을 한층 더 흥분하게 만든 이가 자신인 만큼, 만약 그 손에 바인이 죽는다면 그건 자신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괘씸한 자는 보일런이지, 바인이 아니지 않은가.
“패배를 인정합・・・・・・”
마침 딱 좋은 타이밍에 바인이 입 밖으로 패배를 꺼내 놓는다.
“거기까지! 승패가 갈렸습니다.”
그러자 쩌렁쩌렁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와 함께 이드에게서 한 줄기 무형의 기세가 뻗어 나왔다. 바람처럼 허공을 가른 기세는 이내 소리 없이 네이탠을 휩쓸었다.
“어엇!”
그에 강풍에 휩쓸린 갈대처럼 몸이 휘청거리자 네이탠도 당장의 칼질보다는 넘어지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구경하던 사람들 눈에는 재수 없이 발이 미끄러진 것으로 보일 모습.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몽롱하던 정신이 갑자기 돌아온 덕분이었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인을 마주하고는 인상을 썼다.
‘제기랄. 또 실수할 뻔했잖아.’
그는 언제나처럼 지금의 일 역시 온전히 자신의 급한 성질 탓이라고 여겼다.
다행히 이번엔 큰 사달이 나기 전에 잘 멈춘 것 같지만.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온몸에 돋아난 소름,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상. 하지만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급히 달려나온 피터가 뒤로 물러나라며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잘 멈춰 주셨소. 이제 그만 물러서 주시오. 네이탠 경.
“네?”
“바인 경이 패배를 인정했으니 이번 결투는 그대의 승리이자, 보일런 공자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는 말이오. 결과가 나온 이상, 패자를 공격하는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없소.”
어지간해서는 시작되는 경우가 잘 없지만, 그런 만큼 한 번 불이 붙으면 쉽게 끝낼 수 없는 것 역시 결투다. 이미 서로 극도로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탓이다.
그런 만큼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설령 인정하더라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필요한 존재가 바로 공증인이었다. 단순히 비겁한 수단을 쓰지 않도록 지켜보는 역할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아악! 빌어먹을 년! 그간 지원한 돈이 얼마인데 저런 놈 하나를 못 이겨!”
“후후후. 저 꼴을 보니, 제가 이겼음이 실감나는군요. 알겠습니다. 저는 이 결투의 결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바인 경?”
“……인정합니다.”
바인이 눈을 꾸욱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인에 네이탠도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애셔가 주먹으로 반겼다.
“빌어먹을 놈. 파티에서 피 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로 정신을 놓고 살지는 않거든? 그런데 남작님. 이기기는 했는데, 저 자식이 과연 승복하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결투에는 각자의 명예와 더불어 조건이 걸려 있었다.
네이탠이 물러서자마자 보일런이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달려나와 쓰러진 기사를 닦달하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보일런의 친구들은 말리는 것도 지쳤는지, 아예 눈을 돌려 버렸다.
기사를 저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기사가 충성을 위해 목숨을 걸면, 주군은 그만큼 자신의 기사를 존중하고 아껴야 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주종 간에 이어져 온 무언의 약속이었다.
한데 지금 보일런의 행동은 그런 최소한의 존중도 없다. 기사를 마치 하인 다루듯 하고 있었으니.
“저 가문도 망조야. 후계가 저런 놈이라니. 쯧쯧.”
“그렇지. 자식 농사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그런 말들 그만하고 좀 말려 보셔요. 기사가 너무 안쓰러워요.”
마음 약한 한 부인이 발을 동동 구르자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을 가리켜 보였다.
“안달할 것 없소. 나설 사람들이 나섰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과연 스윔 남작 일행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드도 피터의 뒤로 다가섰다.
“바벨의 감찰관도 움직였어.”
“오늘 재밌는 구경을 하겠군.”
“술, 이런 일에 술이 빠질 수 없지. 술을 더 가져와라!”
결투에 이어 2부로 이어지는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구경꾼이 될 준비를 했다.
대중이 그런 이유로 시끄러운 한편, 피터는 이드가 자신에게 다가서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꼴사나운 짓을 멈추지 않는 보일런을 불러 세웠다.
“보일런 공자도 애꿎은 이는 그만 괴롭히고 이리 오시게 결투의 결과는 이미 나왔어.”
“내 기사를 내 맘대로 다루는 겁니다. 참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결투? 그거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고요!”
“……어째서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조용히 두 눈을 깜빡인 피터가 순간 잘못 듣기라도 했나 싶었는지 제 귀를 팠다.
그렇지 않아도 술기운 때문에 뒤집어진 눈이었지만, 그게 두 바퀴 정도 더 돌아가지 않고서는 차마 나올 수 없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바인은 아직 날아간 검도 회수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결투 결과를 부정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데 말이다.
여기저기 혀 차는 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보일런은 당당하게 헛소리를 계속 지껄여댔다.
“겨우 한 번 이겼을 뿐이잖습니까. 이년을 내보낸 건 실숩니다. 진짜 기사는 저택에 있으니, 그가 나서지 않은 결투는 무홉니다. 무효!”
“이미 공자의 동의하에 벌어진 일이네. 이제 와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안 될 건 뭡니까? 한 번 만에 결판을 낸다는 약속을 한 적도 없잖습니까?”
확실히 취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무리 심사가 꼬였어도 맨정신으로는 저런 억지를 부릴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말을 바꾸는 건, 결투 상대뿐 아니라 공증인까지 무시하는 처사였다.
“지금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술을 좀 깨도록 해 드리죠.’
결국 뒤에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이드가 피터에게 속삭였다.
꿀렁거리는 손가락의 형상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이빨 같았다. 그 모양새가 아무래도 절대 부드럽게 술을 깨워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앞서 어떤 명령이라도 실행할 것 같던 피터가 어쩐 일인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놈에게 이드 님의 손길은 과분합니다. 특효약이 있으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말을 마친 피터가 와튼 백작을 돌아보았다.
“……”
말없이 짧은 눈빛이 오간 후, 와튼 백작이 고개를 돌렸다. 앞서 보일런을 감싸던 그도 지금과 같은 행동에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무언의 허락에 피터가 큰 소리로 웃으며 보일런에게 다가갔다.
“하하하! 그렇지. 분명 한 번 만에 끝낸다는 말은 없었지. 아무렴!”
“으흐흐흐, 역시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결투 전에 그런 개소리를 했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예?”
피터의 목소리와 표정이 싸늘하게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벼락처럼 보일런의 뺨을 후려쳤다.
쩌어억!
“꾸에에에!”
통통한 뺨이 터질 듯 찌그러지며 보일런이 바닥을 뒹굴었다.
“공자님!”
그에 여기사들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이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물론 굳이 제국의 귀족도 아닌 이드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여기사들은 그대로 멈췄다. 이드의 손이 성벽처럼 압도적인 크기로 눈앞을 가득 채워 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보일런은 덜덜 떨리는 본인의 손으로 피가 쏟아지는 입을 닦아야 했다.
“으흐흑. 내, 내 히팔. 왜…………… 왜 히러는 겁니까!”
핏속에 섞여 나온 치아 때문일까. 중간중간 발음이 새는 보일런의 눈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피터가 성큼성큼 다가가 보일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 자네는 내게 왜 이러는 건가?”
“어째서 날 조롱하느냔 말이야. 제국의 자작인 나를! 자작가의 공자일 뿐, 작위도 없는 자네가!”
“그・・・・・・ 그런 적……”
“없다고 말하지 말아. 그게 아니라면 이 결투의 공증인인 내 앞에서, 어떻게 결과가 무효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의 말은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이 들었어!”
“그렇다고…… 그렇다고 절 때렸단 말입니까?”
“자넨 내가 검 대신 손을 휘두른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걸세.”
과연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온 게 검이었다면 어땠을까.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말에 보일런이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물론 퉁퉁 부어오른 입술 때문에 곧 비명을 삼켜야 했지만 말이다.
“이번 일, 저희 자작님께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쯧쯧. 그 나이를 먹고도 할 수 있는 게 고작 아버지 뒤에 숨는 거라니. 부끄럽지도 않나? 자작이 직접 나선다고 뭐가 달라지긴 할 것 같고?”
보일런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있는 자작까지 비웃는 피터에 이드는 내심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어차피 이번 임무가 끝나면 지금의 작위를 버리는 건 물론, 발라파루에서도 떠나기에 부릴 수 있는 배짱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작이 아무리 힘이 좋아도 어차피 자작이다. 그가 나름 힘을 쓰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영지와 발라파루에 만들어 둔 인맥 덕이었다. 즉, 진짜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처럼 제국 전역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말이다.
“이익…….”
“더 할 말이 없다면 일어나게. 이제 결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질 시간이니까.”
그 말에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보일런이 슬쩍 일어나는 척하더니,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입에 고인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내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어쩌지요? 자작님의 ‘명령을 따라 드리고 싶은데 술기운에 몸이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맞아서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자존심은 남았나 보다.
하지만 이런 어림도 없는 수작에 피터는 그저 코웃음을 날렸다. 못 움직이겠다고 해서 얌전히 기다려 줄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못하겠다? 그럼 움직이게 만들어 주지.”
그렇게 돌아서려는 피터를 이드가 잡았다.
“그 술기운, 내가 빼 주도록 하죠.”
“이…. 에단 님?”
“제가 도와 드리고 싶은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거든요. 과정에서 좀 아플 수는 있겠지만, 효과는 보장합니다.”
이드는 말과 함께 보일런 옆으로 다가갔다.
굼실거리는 손가락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것일까.
“어… 생각해 보니, 이제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거부의 의사를 표하려던 보일런이지만, 그보다 이드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는 것이 먼저였다.
“이 꽉 물어요. 혀 깨물지 않도록”
“예? 에에….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