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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28화


1163화

한 번 터진 비명은 멈출 줄 몰랐다.

“꾸에에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마치 야생 오크의 괴성 같았다.

오죽하면 옆 저택에서 항의가 들어오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무심히 내력을 주입했고, 보일런의 몸에 들어간 내력은 근육과 지방을 비틀어 술기운을 짜냈다.

사실 순한 양기로 술기운만 태워 버릴 수도 있었지만, 라미아와 일리나를 향해 음심을 불태우던 놈에게 그런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영혼까지 쥐어짜 주마!’

이 상태가 조금만 더 이어지면 근기가 상해 몇 달은 여자 손목도 잡을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점점 높아지는 비명에 와튼 백작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섰다.

“너무 아파하는 것 같은데, 멈춰야 하지 않겠소?”

“원래 조금 고통이 따르는 방법입니다만, 이렇게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닌데…………… 엄살이 심하군요.

이드는 대놓고 한심한 눈으로 보일런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와튼 백작이 보기엔 달랐다.

“엄살이 아닌 것 같은데・・・・・・・”

“엄살입니다. 미친 듯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잖습니까. 몸도 크게 움직이지 않고.”

틀린 것 없는 말에 와튼 백작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보일런은 가지 말라고 백작을 붙잡고 싶었지만, 왜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말 혼이 달아날 정도로 아픈데도 눈물도 흐르지 않는 건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에 두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간이 흐르고, 정육점에 걸린 돼지의 기분을 만끽(?)한 보일러의 몸에서 뿌연 연기 같은 것이 피어났다.

그리고 냄새만 맡아도 취할 것 같은 진한 주향이 풍겨 나오더니, 이내 바람에 흩어졌다.

그제야 의심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보일런의 몸에 들어 있던 술기운인 모양이군.”

“내공을 이용한 방법과 비슷해 보이는데.”

“바벨의 감찰관이니 초인기의 일종이겠지. 그런데 저거, 언제까지 나오는 거야?”

“어머, 어머, 술을 얼마나 마셨으면.”

“에잉, 저러니 천지 분간 못하고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거지. 아무래도 자작을 보면 한마디 해야겠구먼.”

“그나저나, 여러분들은 승리했을 시 내건 조건이 뭔지 아시나요?”


“……오늘 제 행동에 불쾌하셨을 모든 분께 정중히 사과를 드립니다.”

보일런이 사람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드의 손 아래 전신 근육을 쥐어짜져 이미 초주검이 된 상태였건만, 마음은 그 이상으로 힘든지 붉어진 눈에 눈물이 찔끔거리고 있었다. 이 사과가 바로 그 ‘조건’이었다.

너무 무리한 건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었다. 그걸 아는 스윔이 최대한 세련되고,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요구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속에는 그의 또 다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모욕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사과를 요구했다면, 보일런은 설령 술이 다 깼다 한들 거부했을지도 몰랐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들며 차일피일 미룰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파티에 참석한 전부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중에는 와튼 백작같이 그와 친분이 있는 윗사람도 끼어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입으로만 사죄하고 끝은 아니다. 저따위 말 한마디 듣자고 결투에 나서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렇기에 두 번째로 요구한 것이 몸값이었다. 포로로 잡혔을 때를 기준으로 한 보일러의 몸값 말이다.

처음 그 말이 나왔을 땐 천박한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결투에 돈을 언급한다고 비웃었지만, 글쎄. 과연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비록 멍청한 모습을 연달아 보여 주긴 했으나, 보일런의 몸값은 결코 가볍지 않을 터였다. 그만큼이나 귀한 자작 가문의 명예와 체면이 걸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이면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발라파루 모든 귀족의 귀에 들어가 관심을 받을 터였다.

한데 그걸 알면서 어설픈 금액을 내놓는다?

체면에 죽고 사는 귀족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놀림을 당할 게 뻔했다.

“나머지 조건인 몸값에 대해선 추후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소.”

“그 조건, 달리 바꾸는 것도 받아들이겠소.”

“……무슨 말이오?”

“오늘 보일런 공자가 대동한 두 기사와의 계약을 내게 넘긴다면 몸값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오. 그대는 쓸모없다 하지만, 이것저것 부족한 것이 많은 내게는 넘치는 인재들이니.”

빠득.

많은 사람 앞에서 기사를 모욕한 데 대한 조롱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보일런은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이를 강하게 악물고서 몸을 떨더니, 이내 도망치듯 황급히 파티장을 떠났다.

하지만 그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그의 친구들 몇 명 말고는 없었다.

“자, 결투는 끝났습니다. 승자를 위한 축배를 들며, 다시 파티를 시작합시다.”

곧 이어진 피터의 말과 함께 많은 사람이 스윔과 네이탠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흥청대기 시작한 파티는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몇몇은 기절해서 하인과 기사들에게 실려 가는 둥 정신없게 끝이 났을 때,

이드는 자신의 방을 찾아온 피터와 마리를 만나고 있었다.

“두 분, 오늘 파티를 진행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별말씀을. 오히려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인간을 미리 걸러 내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하마터면 여러 가지로 일이 꼬일 뻔했습니다.” 

“덕분에 그 세 사람을 따로 불러낼 계기가 생겼지 않습니까. 좋게 생각하지요.”

사실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 데려오자면 어려울 것도 없다.

고위 귀족처럼 지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하루라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 수상하게 여길 정도로 유명인도 아니다. 가족도 떨어져 있어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카논무파에 또 누가 속해 있는지 모르는 이상,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았다.

“그 말씀은, 의심하던 대로였다는 거군요.’

“예. 세 사람 모두 카논무파의 무공을 익혔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곧 심문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이 셋을 찾아냈을 때처럼 그 주변에 카논무파가 없는지에 대한 조사부터 먼저 부탁하죠.”

이베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벨의 조사로 카논무파를 찾아낸 것은 이드로서도 뜻밖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카논무파의 줄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당장 저들 셋을 끌고 와 심문하는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누가 봐도 그 셋은 카논무파 안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들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비슷한 패턴을 가진 점조직일 거라고 보시는군요.”

“아닌가요?”

“맞습니다. 바벨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조사도 중단된 적이 없고요.”

“그래요? 그럼 사실상 제가 별 필요 없었겠군요.”

“아닙니다. 지금까진 정확한 기준이 없었지만, 이드 님께서 조사 대상 중 카논무파를 특정해 주신다면 확실한 방향성이 생길 겁니다. 오늘만 해도 대상에서 제외된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앞으로 조사가 세 배는 더 빨라지겠지요.”

세 배, 묘하게 붉은색이 어울릴 것 같은 숫자다.

이드는 피터의 대답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으로 말했다.

“카논무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언제든 명단을 주세요. 확인해 줄 테니까.”

“하하하.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정말 일하기 편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마리가 좀 더 쉴 수 있겠습니다. 이드 님께서 오시면 할 일이 가장 많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게다가 그들이 카논무파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아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심문하지 않고서는 저들 조직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으니, 결국 마리가 나설 때가 오기는 올 터였다.

“전 그때까지 자작 부인으로서 편히 쉬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피터 지부장님 바가지를 긁어 보겠어요?” 마리가 화려하게 장식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방글거렸다. 귀부인으로서의 역할이 꽤나 마음에 든 것 같다.


다음날이 되자 피터가 전날 말했던 명단을 가져왔다.

거기엔 십여 개의 인명이 적혀 있었다.

피터의 말에 의하면, 이 안에 든 이름은 항시 두세 개 정도 늘었다 줄었다 하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그만큼 특정이 어렵기 때문이란다. 아무렴 이드에겐 마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카논무파지만, 그런 기준이 없는 그레센의 사람들에겐 그저 똑같은 무공일 뿐일 테니까. 

“이러면 발라파루에서 머무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지겠는걸요.

그렇게 말한 라미아가 아공간을 열었다. 하루 이틀 머물 게 아니라면, 쓸 것들을 미리 꺼내 놔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바벨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으니까. 듣기로는 이미 절반 정도 걸렀다고 하더라고.”

발라파루에 있는 기사의 수를 생각하면, ‘과연 바벨’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러자 라미아와 함께 물건들을 정리하던 일리나가 말했다.

“그래도 일단 저택에 연락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은색 기사단 수련도 당분간 돕지 못하게 되었다고 알려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죠.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죠. 후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

결정을 내린 이드는 라미아를 통해 바로 검후와 통신을 연결했다. 이쪽의 사정을 들은 검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아쉬워하겠지만, 제가 이드 몫까지 대신할 테니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말고요. 그곳에서 일이나 확실히 처리하세요.”

“그래 주면 고맙지.”

“하지만 토벌이 결정되면 바로 돌아오셔야 해요. 알죠?”

검후가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이드가 없이 시작된 토벌에 혼돈의 파편이 뛰어들기라도 한다면, 그 피해가 얼마나 무지막지할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봤잖아. 거기까지 가는 건 순식간이라고. 그보다, 마스에 있는 추격대는 어떻게 되고 있어?”

“오늘 밤이면 블레인 영지에 도착한다고 해요. 진입은 내일.”

“진짜 영혼의 관 코앞까지 도착했네.”

이드가 카논에 와 있는 며칠 사이, 저쪽의 일도 빠르게 진행된 모양이다. 황제에게 정체를 밝혀 놓은 덕일까.

어쩐지 황제가 일을 서둘러 처리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거기까지 갔으면, 도망치던 놈들은?”

“맞춰 볼래요?”

“당연히 못 잡았겠지.”

“맞아요. 블레인 영지 안으로 향한 흔적만 남았다고 하네요. 우습죠. 무려 검왕이 직접 나서고도 도망자들 꽁무니만 쫓고 있다니.” 

입가에 조소를 담은 것과 달리, 그 눈은 한없이 차갑기만 한 검후였다.

과연 그녀와 검왕이 마주 서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라 버린 이드는 묘하게 기대가 되는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날 밤.

블레인 영지를 앞에 두고서 야영을 시작한 검왕은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왕. 저는 이더비히, 영혼의 관 부관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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