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729화


1164화

이 만남은 분명 약속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깜짝 방문.

물론 놀란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이건 또 지나치게 태연하다.

“이야기는 앉아서 합시다.”

하는 말만 보면 도리어 자신이 검왕에게 불려 나온 줄 알겠다.

하지만 이런 이더비히의 생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페시딘은 무심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핏. 피피피핏.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서 한겨울 찬바람보다 서늘한 기운들이 뱀 혓바닥처럼 뻗어 나오더니, 이내 사이좋게 서 있는 두 그루 나무를 휘감았다. 그그그극.

곧 성인 허리춤 정도의 높이에서 비스듬히 잘린 나무가 땅바닥에 박히고, 남아 있던 밑둥은 사람이 앉기 좋은 의자로 깎여 나갔다. 그야말로 숨 몇 번 쉬는 사이 끝난 작업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이 실력으로 가구업계에 뛰어든다면 순식간에 가구의 왕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만든 의자에 기대앉은 페시딘이 빈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앉으시오.”

“이런 배려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듣던 것과 다르게 젠틀하시네요.’

이처럼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검강 컨트롤 능력을 눈앞에 보고도 젠틀 운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페시딘도 어이가 없는지 딱딱하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무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더비히는 말랑말랑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요리조리 몸을 기대 보더니, 편한 자세를 찾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갑작스러운 방문에 실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과할 것 없소. 오히려 말로만 듣던 부관주를 직접 만나는 기회가 되었으니, 나는 오히려 영광이오.”

“호호호.”

이더비히는 가볍게 웃었다. 과연 누구에게 좋은 기회일까.

“그래, 부관주께선 어쩐 일이시오? 이 밤중에 날 찾아온 것을 보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 있을 듯한데. 아무 예고도 없이 페시딘이 갑자기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에 이더비히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음? 용건이 없단 말이오?”

“그것이 아니라, 불려 나온 쪽은 저란 의미입니다.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고 하진 마세요.”

“이런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

이더비히의 말에도 페시딘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는 선명하다. 슬쩍 보이는 하얀 치아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포식자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한 당사자인 이더비히는.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짜증 나는 인간이야.’

그저 솟아나는 짜증에 속으로 이런저런 욕을 쏟아붓기 바빴다.

그렇게 잠시 페시딘을 노려보던 이더비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혼의 관이 이 앞 블레인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모른다고 하시는 건가요?”

“오호, 그렇소? 전혀 몰랐소.”

기다렸다는 듯 나온 즉답. 처음부터 작정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뻔뻔함에 대한 준비는 이미 하고 있었다.

“제 실수로군요. 미리 알려 드렸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추격대의 말머리가 블레인으로 향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은 것은 아니겠죠. 말머리를 돌려 주세요. 이대로라면 자칫 영혼의 관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 염려는 마시오. 내 임무는 죄인을 잡는 것이지, 영혼의 관 토벌이 아니오.”

으득.

이더비히가 이를 꽉 물었다. 방금 대놓고 ‘토벌’이라고 했다. 제국에서조차 그런 언급은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더욱 말 머리를 돌리셔야 할 겁니다. 검왕이 쫓고 있는 죄인은 이곳 블레인에 없습니다.”

“호오~ 확신하는 모양이오.”

페시딘이 한 손으로 턱을 괬다.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이더비히도 다리를 꼬았다.

“확신합니다. 현재 영지 전체에 결계를 펼쳐 놓았습니다. 누군가 발을 들였다면 바로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그건 며칠 전, 블레인에서 영혼의 관에 대해 탐색하는 이들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 후의 조치였다.

이미 영지 안으로 발을 들인 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상의 침입자를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 죄인들은 블레인에 없다?”

“네.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말 머리를 돌리세요. 협력자로서 정중히 요청합니다.”

“미안하지만, 그 청은 들어줄 수 없겠소. 우린 내일 도망자들을 쫓아 블레인으로 들어갈 거요.”

“제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나요?”

정중한 부탁이 단칼에 잘렸기 때문일까. 이더비히의 말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둘 다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이미 상대방의 눈에서 시선을 돌린 적도 없을 만큼 치열한 기세 싸움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있겠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리 없잖소.

“검왕의 말에 반대하는 인간은 없을 텐데요.”

“훗, 기분 좋은 소리지만, 지금은 나도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일 뿐이오. 그러니 불가피 블레인으로 들어가야겠소.”

“그 과정에서 영혼의 관이 드러나는 건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아까 말했다시피 내 목적은 도망자를 잡는 것. 영혼의 관이 아니오. 누가 뭐래도 소드 팰러스와 미완의 마탑은 중요한 협력 관계가 아니겠소?”

“웃기고 자빠지셨네요.”

순간 이더비히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비틀렸다. 상큼한 사과가 썩은 사과가 된 정도의 변화랄까.

원래 협상에서는 먼저 화내는 쪽이 지기 쉬웠다. 인내심이 끊어진 것 같은 이더비히의 반응에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으려던 페시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어진 욕설에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검왕이라는 이름에 똥칠하는 수작도 정도껏 하셔야죠.”

설마 부관주씩이나 되는, 그것도 귀부인처럼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더비히의 입에서 ‘똥’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검왕의 이름에 똥칠을 한다니.

검왕이라 불리기 시작한 이후, 이런 모욕을 받은 기억은 맹세코 없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순간의 분노와 황당함에 잠시 말문이 막힌 까닭은.

그리고 그사이를 이용해 이더비히의 말이 화살처럼 쏟아져 나왔다.

“블레인에 영혼의 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거짓말도 적당히 하세요. 이미 철벽의 검왕이 이곳을 찾아왔었습니다.”

순간 화낼 타이밍을 보고 있던 검왕의 몸짓이 흠칫 굳어졌다. 철벽의 검왕이 이곳을 찾았다는 발언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이더비히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영혼의 관을 노리고 있음을 압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그래도 그간의 우리 관계를 생각한다면, 최소한의 협상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기만하려고만 하는군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자가 어떻게 기사들의 우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요.”

“・・・・・・ 영혼의 관 부관주라기에 기대했는데. 어리군.”

이더비히의 말이 이어질수록 페시딘은 조용히 피어오르던 분노가 식었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관계에서 예의를 찾다니. 영혼의 관을 무너트리는 일은 의외로 쉬울지도 모르겠다. 페시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 아직 이더비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요. 내가 어린 것이 아니라, 당신이 너무 세파에 찌들어 더러워진 겁니다. 위선자, 과연 스승을 배신하고, 주군의 등에 칼을 꽂은 인물답습니다. 스스로 야망이 크다고 여기고 있죠? 틀려요. 당신은 그저 욕심에 눈먼 돼지일 뿐입니다.”

“닥쳐! 탑주도 내 앞에선 조심하거늘, 부관주 따위가 감히!”

어떤 말도 비웃으면서 흘려넘길 수 있는 페시딘이었지만, 검후와 관련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건 그의 인생 최대의 약점이며, 최고의 수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이더비히의 이마를 가리켰다.

핏.

나무를 의자로 만들 때처럼, 무형의 검강이 하나의 탄환으로 변해 쏘아졌다.

화살보다 빠른 검강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에 구멍을 낼 듯한 순간.

파파파파파팡!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돌연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며 검탄을 막아 냈다. 마법사의 격언에 따라 이더비히가 미리 준비해 둔 열한 장의 포스 배리어였다.

이더비히가 천천히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눈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페시딘을 비웃고 있었다.

아무리 분노했다지만 대화를 위해 찾아온 상대, 그것도 마법사에게 기습이라니.

이건 둘의 승패를 떠나 ‘기사’로서 스스로에게 패배한 순간이었다.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당신이 욕심에 눈먼 돼지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덕분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한때 협력 관계에 있던 소드 팰러스가 이젠 명백한 적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멍청하군. 그걸 알면서도 날 찾아오다니. 지금부턴 감히 쓸데없이 혓바닥을 놀린 대가를 받도록 하겠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

“물론! 하고말고!”

이더비히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미 한번 선을 넘은 페시딘은 이젠 마치 고삐가 풀린 야생마처럼 과감하게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갑자기 날이 밝은 듯 하늘빛 말간 검강이 사방을 감싸자, 그에 대응해 포스 배리어가 나타났다.

검과 방패의 힘 겨루기는 금방 끝났다. 본래 힘의 밀집도에 있어서는 마법이 검강을 따라오기 힘든 법.

끼기기기기긱!

거기에 검왕의 검술까지 더해지자 포스 배리어는 순식간에 과일 껍질처럼 깎여 나갔고, 이내 그 안에 있는 이더비히가 드러났다.

하나 그녀는 당황하는 대신, 두 손에 마법진 하나를 올린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 배리어 정도로 막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노르딘의 일탈(逸脫).”

다급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녀가 마법을 발동시키자 두 사람은 돌연 시야가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공간의 어긋남이었다.

“흥, 당당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선택한 것이 겨우 도망이냐!”

놓칠 생각이 없는 페시딘의 검이 변했다.

직선에서 곡선으로 파괴를 부르던 힘이 담겼던 검에는 대신 깊고 깊은 검의가 담겼다. 지극한 무리가 임계점에 오른 순간. 푸욱.

‘공간’이라는 개념을 담은 마법을 관통해, 이더비히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누구도 내 검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

“잘못 아셨군요. 이건 도망치기 위한 마법이 아닙니다.”

이더비히가 말했다. 심장이 관통당한 사람치고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걸 인식함과 동시에 페시딘이 한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관통된 공간이 깨어지는 것이 먼저였다.

콰콰콰콱!

잘게 쪼개진 공간은 하나하나가 창날이 되어 사방을 휩쓸었다. 그렇게 마법이 스치고 지난 주변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 중앙에 있어야 할 이더비히의 모습 역시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영혼의 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이더비히가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진 자리에는 페시딘만이 남았다.

주르륵.

살짝 베인 그의 뺨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