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30화
1165화
갑자기 찾아온 고요 속.
뿌드드드드-
검강과 마법에 휩쓸렸던 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페시딘을 향해 쓰러졌다.
하지만 한낱 나무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될까.
쿵! 쿠쿵!
호신강기에 닿는 순간 둘로 나뉜 나무가 땅에 떨어지며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렸다. 이 또한 호신강기에 막혀 페시딘의 몸을 더럽히지는 못했다. 이런 반응은 페시딘이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다른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바빴다. 나무나 먼지 따위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1도 없었다.
“영혼의 관에 왔었다고? 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페시딘은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공간의 파편에 베인 상처는 어느새 감쪽같이 회복되어 얇은 선만 남았다. 트롤이 떠오를 정도의 신체 회복 능력.
하지만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진 그로서도 친구의 최근 행동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예상할 수 없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최근 낯설게 느껴졌다. 다 늙어서 뒤늦게 육십춘기라도 온 것일까.
그렇다 해도 왜 하필 지금인가. 그와 친구들의 인생에 있어 지금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인데 말이다. 이런 때일수록 작은 변수라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
“단장, 최대한 빨리 존을 만나야겠다.”
페시딘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돌연 짙은 보랏빛이 도는 파츠 아머를 걸친 기사가 나타나 가슴을 두드렸다.
“충.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나 약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 쉽게 뒤를 내어 주고 다닐 친구가 아니니까. 기수들은?”
“완벽히 철수한 상태입니다. 눈에 띄는 소지품은 모두 처분했으며, 내일 중으로 제국의 국경을 넘을 것입니다.”
“도망자 노릇을 하느라 고생했을 터. 충분한 휴식과 포상을 챙겨 주어라.”
“충!”
기사가 한 번 더 가슴을 두드렸다. 페시딘이 말하는 기수들이란 바로 그의 부하이기도 했다.
페시딘은 그런 그를 뒤에 두고서 블레인 영지가 있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영지가 불타오를 시간이 머지않았어. 뒷정리를 맡기겠다.”
“편히 쉬십시오.”
기사의 인사에 페시딘은 간단히 손을 흔들곤 사라졌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남자와 비슷한 차림을 한 기사들이 나타나 주변을 정리해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검왕의 합류에 그저 감격해서 신이 난 기사들이 전혀 알지 못하도록.
이후 두 번째 토벌이 시작되었을 때 이곳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말이다.
명단을 손에 쥔 이드는 바로 움직였다. 여기에 올라 있는 사람을 찾아 카논의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목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해당자가 되는 순간, 바벨의 24시간 감시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드는 바벨에서 전해 주는 정보를 따라 누구를 먼저 만날 것인지 동선만 정하면 되었다. 그러면 목표와 접촉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와 상황은 바벨에서 알아서 만들어 주었다.
“너무 편해서 중독될 것 같아.”
첫 번째 대상자의 확인을 끝내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이드가 말했다.
그러자 같이 이동 중이던 피터가 잽싸게 두 손을 비비며 반응했다.
“이드 님께서 저희 바벨의 회원이 되어 주신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처럼 불편이 없도록 보좌해 드릴 수 있습니다.”
“뭐랄까. 지금 피터 씨, 꼭 암표상 같아요.”
가감 없이 느낀 점을 그대로 표현한 일리나의 말에 숨이 턱 막힌 피터가 가슴을 두드렸다.
“어억! 이, 이건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급히 부정하는 찰나, 라미아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지금 반응을 보면, 우리를 섭외하라고 명령이라도 받았나 보죠? 이드 입에서 편하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반응하시던데.”
“예, 뭐…… 라울 님은 물론이고, 바벨에서도 따로 권해 보라는 얘길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도 세 분을 저희 바벨에 모시고 싶은 게 제 진심입니다. 세 분이 함께 해 주신다면 저희 바벨이 더욱 든든할 것 같거든요.”
던전에서 함께하며 이드와 라미아가 보이는 힘을 일부나마 직접 목격한 그였다. 그런 만큼 아무래도 진정성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아무렴 귀빈으로 모시겠다는데,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
“피터 씨의 권유는 감사한 일이지만, 일단 거절하죠. 자세한 건 차후에 라울과 이야기 해 볼 테니, 이곳에서 일을 하는 동안 권유는 사양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느릿한 대답이, 좀 많이 실망한 것 같다.
“그런데, 바벨은 초인들만 가입하는 곳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초인도 아닌데 가입이 가능한 겁니까?”
물론 이드도 초인기를 각성해서 초인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바벨이선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초인에게 도움이 되는 외부인이라면 바벨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이런 점은 마탑이나 용병 길드를 비롯해서 모든 단체가 똑같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탑을 후원하는 귀족들이다. 이들은 마법사는 아니지만, 정식으로 마탑에 소속되어 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이름표 하나 못 달아 주겠는가.
따지고 보면 황제로부터 받은 명예 후작이라는 작위도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이야길 시작해 자연스레 바벨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피터였다.
그러는 동안, 이드와 라미아가 눈을 마주치고는 은밀히 눈빛을 교환했다.
결정적인 정보는 없겠지만, 이런 식으로 바벨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 두는 것도 충분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사이 열심히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명단 속 인물은, 이드를 보고는 호들갑을 떨어 댔다.
“두 분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지난밤 있었던 대단한 파티의 그….. 아, 직함은 함부로 거론하면 실례겠지요?”
“가능한 한 크게 소문나는 건 피하고 싶으니,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뭐, 이미 소문을 피하고 말고 할 단계는 한참 지나 버린 것 같지만 말이다. 얼마나 자세히 알려졌으면 이쪽에서 접근하기도 전에 목표가 먼저 다가오겠는가.
“당연하지요. 아무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단 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로첼로 남작님.”
자연스레 악수를 청해 오는 상대의 손을 맞잡으며 이드가 답했다.
“어? 제가 이름을 밝혔던가요?”
이드는 어리둥절한 로첼로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피터를 향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 로첼로는 카논무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 확인과 동시에 은밀히 로첼로를 감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물러났다.
“이거, 생각 외로 접촉이 쉽겠는걸.”
이런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열에 여덟은 먼저 이드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이드를 보고 그를 알아차린 게 아니라, 일리나와 라미아의 존재를 통해 이드의 정체를 확신하고 다가왔다는 것이다.
“봐요. 저희하고 같이 움직이길 잘했죠?”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턱을 치켜들고 잘난 척하는 라미아였지만, 이번엔 이드도 순순히 납득해야만 했다.
두 사람 덕분에 상대편이 먼저 알아보고, 악수를 청해 온다. 과연 그 상황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만 그런 과정에서 불편이라면 불편인 것이, 명단에 올라 있지 않은 사람들도 이드를 알아보고 접근해 왔다는 점이다. 그들이라고 바벨의 감찰관과 안면을 트고 싶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덕분에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을 때,
이드는 명단에 있던 사람을 모두 확인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확인했으니, 하루만 더 고생하면 끝나겠어요. 그나저나 결과가 의외네요.”
“의외지. 절반이나 확인했는데, 정작 개중 카논무파는 한 명뿐이라니.”
이드가 펼쳐 든 명단에는 대략 절반 정도의 이름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카논무파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중 오직 하나. 붉은 줄이 그어진 이름이 있었다.
오르포 가이.
카논무파라고 주장하는 마공을 익힌 기사였다.
또 오늘 바벨의 감시가 중단되는 대신, 오히려 두 배 이상 강화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명단 속 절반의 인물 중 유일한 카논무파라는 점이었다.
용의자로 뒀던 스웜 남작 일행이 모두 카논무파였기에 바벨의 명단에 꽤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조금은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오늘 운이 나빴던 걸지도 몰라요.”
아직 확인하지 못한 나머지 명단 속 인물에 카논무파가 몰려 있을 가능성은 아직 충분하다.
최소한 피터만은 꼭 그렇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고 다음 날.
네 사람은 명단에 올라 있는 나머지 인물들을 찾아, 다시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어제와 같이 대외적인 목적은 바벨의 감찰관에게 카논의 수도 발라파루를 소개하는 관광 투어였다. 피터의 역할은 안내.
사실 웃긴 일이다. 지금까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에서 올라온 자작이 수도를 안내한다니.
하지만 그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같이 이드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안면을 익히는 데만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목표한 인물과 접촉한 이드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논무파 확인’
오늘 처음으로 확인한 대상이 카논무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결과는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에도 이어졌다.
카논무파가 명단의 뒤쪽에 몰려 있었다는 생각이 확신에 가까워질 때였다.
네 번째 대상을 만나기 위해 일행이 들른 곳은 발라파루에서도 유명한 무구점이었다.
클래식한 풀 플레이트 아머에서부터 시작해서 최신의 파츠 아머까지, 무구라면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
특히 가게 안에 있는 무구의 품질도 하나같이 최상급으로, 전시된 물건 중에는 드워프의 손길이 닿은 초고가품도 있다는 것이 피터의 설명이었다. 그쯤 되자 이드와 일리나도 자연스럽게 가게에 진열된 무구에 눈이 갔다.
두 사람이 가진 검은 그야말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검, 보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검이었다.
하나 돈이 아무리 많아도 더 가지고 싶은 것처럼, 좋은 무구는 아무리 많아도 욕심이 나는 게 무인의 본능이었다.
덕분에 따로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은 검에 흥미가 있어서 이곳을 방문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혹시 에단 님이 아니십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상대가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어제도 그렇고 많은 분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군요.”
“하하하. 그게 다 아름다운 부인을 두 분이나 둔 죄가 아니겠습니까.”
‘네 번째는 꽝이네.’
이드가 손을 놓으며 내심 고개를 흔들 때였다. 이제 그만 상대와 대화를 마치려는 순간, 상대가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가 말입니까?”
“역시 모르고 오셨군요. 지금 여기에 톤 자작이 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그제 파티에서 난장을 부린 블레인 공자의 부친 말입니다.”
아하!
“어쩐지 뒤통수가 뜨끈하더라니.”
갑자기 마법검이 불이라도 뿜었다 했는데 말이다.
젠장.
매우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